1145장. 위험한 게임.
“!!!”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완진바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등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는 익숙한 음성이었다.
누가 봐도 패배자가 시비를 거는 꼴이었다.
한때는 중국을 통치했던 주석 신분이었지만 현재는 총리였던 자신보다 명성은 물론 행사 권한도 약해진 인물.
방태민과 슈건핑에 사이에 끼어 원로 대우도 못 받았다.
퇴임 후 고향 강소성에서 낚시에 빠져 살던 그가 다른 때 같지 않게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정작 재임 시절에는 강소성을 고향이라 말하지도 못했다.
동향 출신인 방태민의 눈치를 보느라 모친이 태어난 안후이성을 고향이라 바꿔 말했다.
웨신타오는 황좌를 물려준 방태민의 그림자도 못 밟았다.
재임 당시에는 강소성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을 정도다.
한마디로 방태민의 그늘에 묻혀 평생 절절매며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권좌에 세워준 방태민을 아주 미워했다.
처절한 애증관계에 있는 두 사람.
그런 이유가 있었기에 통렬하게 방태민의 뒤통수를 때릴 수 있었다.
대가는 상상 외로 컸다.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전직 주석이니 서열상으로는 위가 맞았다.
하지만 현재 권력의 포진 상태로 봐서는 자신보다 아래다.
웨신타오가 키워놓았던 호랑이 새끼들은 철저하게 몰락했다.
모두 다 부패혐의와 기율 위반으로 슈건핑이 휘두른 칼날에 베어져 산화됐다.
상해방과 방태민은 그 과정을 지켜보며 수수방관했다.
방태민과 상해방을 견제하고자 벌였던 계책이 악수가 된 셈이었다.
웨신타오가 방태민을 껴안고 자폭하는 사이 슈건핑이 모든 권력을 완벽하게 계승했다.
그리고 뒤이어 발생한 슈건핑의 정적 제거.
빠르고 강력하게 휘몰아쳤다.
판공청 링지화 주임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은 뼈아픈 일격으로 작용했다.
링지화는 웨신타오가 심혈을 기울여 야심 차게 키웠던 후계자였다.
아들의 사망사고만 아니었다면 링지화는 무리 없이 슈건핑을 견제하고 공청단과 중국 권력의 핵심이 되었을 것이다.
슈퍼카를 타고 미녀들과 광란의 질주를 벌이다 사망하고 만 링지화의 아들.
사고에 관한 내용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슈건핑과 태자당이 해당 사건을 정치에 교묘하게 이용했다.
과거였다면 절대 보도되지 않았을 사건.
사고 내용은 기회를 얻은 듯 자극적으로 포장됐다.
예상대로 인민들이 분노했다.
그 모든 게 태자당의 계략이었다.
슈건핑은 명분을 얻어 깊숙한 곳까지 비수를 찔러 웨신타오의 심장을 노렸다.
더불어 공청단의 고위급 인사들 상당수가 부패혐의로 투옥됐다.
슈건핑과 태자당의 암중 힘을 무시하다 벌어진 사태였다.
뒤에서 방태민과 같은 방식으로 상왕 노릇을 하려던 웨신타오가 크게 얻어맞았다.
모든 수족이 일거에 잘려나갔다.
그사이 원로당과 공청단에 한 발씩 걸치고 있던 완진바오가 어부지리로 웨신타오의 힘을 이어받았다.
주인을 잃고 방황하던 공청단 출신 인사들이 완진바오와 손을 잡았다.
공청단 출신 현 란커창 총리도 완진바오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눴을 정도다.
서슬 퍼런 슈건핑의 칼춤이 펼쳐지는 가운데 공청단의 대리인으로 나섰던 완진바오.
슈건핑에게 공청단이 숙청당할 때 웨신타오는 전의를 상실하고 뒤로 물러난 뒤였다.
목숨을 걸고 전면에 나서서 사건을 정리하기 위한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급박하게 벌어진 일련의 상황에 정신적 충격이 상당했던 웨신타오.
주석 재임 시절에는 방태민과 상해방에 휘둘리고 이후 수십 년 대계로 세웠던 중요 공청단 간부들 상당수가 권력에서 밀렸다.
방태민을 위해 키웠던 사냥개 슈건핑에게 제대로 물어뜯긴 웨신타오.
“…….”
경매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몰렸다.
완진바오에 대한 웨신타오의 도발.
방태민이나 슈건핑이 아닌 만만한 완진바오를 겨냥한 명백한 시비였다.
“총리님 괜찮죠?”
웨신타오가 대놓고 물었다.
선택을 강요받는 입장이 된 완진바오.
‘왜?’
화는 일순간 사라졌다.
뒤이어 찾아온 의문에 완진바오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미 파벌이 몰락할 대로 몰락한 웨신타오가 어떻게 이리도 강하게 나올 수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완진바오의 중재가 아니었다면 슈건핑은 웨신타오까지도 제거했을 것이다.
그만큼 당시 슈건핑은 대단히 분노한 상태였다.
상해방 인사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슈건핑을 제거하려 했던 웨신타오는 물론 공청단의 호랑이 새끼들 목까지 모조리 베려 했다.
지금까지 유구하게 이어져 오던 중국 공산당 전통까지 무시했던 슈건핑.
그가 시도한 몇 번의 암살 실패가 슈건핑을 더한 냉혈한으로 만들었다.
그 살기를 감당해온 완진바오.
웨신타오의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이 당황스러웠다.
‘설마?’
번뜩 스치는 생각에 완진바오는 꺼림칙함을 느꼈다.
결단의 시간이 눈앞에 와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립. 어서 따라드리게. 웨 주석이 기다리시잖아.”
완진바오는 얼굴색을 바꾸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잔을 양보했다.
이 정도 일로 자존심을 내세울 완진바오가 아니었다.
슈건핑에게 찾아가 고개를 숙이고 살려 달라 간청하며 협상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당시 슈건핑 주석이 계속해서 무리하게 토벌을 가하면 공청단을 상해방에 넘기겠다는 협박도 은근하게 더했었다.
권력이 완벽하지 못했던 슈건핑은 한 수를 접었다.
그 덕분에 공청단이 살아남았다.
그 대신 잘나가던 상무위원 두 사람이 목을 내놓았다.
현직 총리를 비롯해 상무위원에 공청단 출신 두 사람이 포진할 수 있었던 것도 완진바오 덕분이다.
공청단 인사들도 그 점을 높이 샀기에 완진바오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런 마당에 그간 잠잠하던 웨신타오가 도발을 감행했다.
완진바오가 현 란커창 총리와 함께 공청단의 쌍두마차 역할을 맡고 있지만 실제 주인은 웨신타오였다.
그가 스스로 공청단의 지분권자임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어 준 격인 경매장.
모두가 결과를 예의주시하며 지켜봤다.
완진바오가 웨신타오를 직시했다.
‘계획적이다!’
웨신타오의 눈빛에서 야심을 읽어낸 완진바오.
과거와 달리 기세 좋게 활활 타오르는 웨신타오의 눈동자는 분명 야심이 가득했다.
다 죽어가던 과거와 빛이 달랐다.
과거 주석직을 얻기 위해 자처해 방태민의 개가 되고자 했던 그 시절과 비슷했다.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야망의 빛.
‘다 이 녀석 때문인가?’
완진바오가 술병을 들고 조용히 서 있는 장립을 바라봤다.
장립이 주관한 경매장에 모습을 드러낸 웨신타오.
새로운 인연이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엮이는 게 완진바오의 눈에 훤히 보였다.
***
- 이분들 뭐죠?
귀신이 의문에 차서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지만 또 세상 복잡한 중국 공산당 정치 체계.
땅도 넓고 사람도 많고 그만큼 욕망도 들끓었다.
공산당 일당 체제 안에서 많은 수만큼 다양한 파벌로 나뉘어졌다.
그들끼리 치고받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오늘도 그와 같은 연장 선상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슈건핑과 방태민의 앞에서 공청단의 주력들이 기 싸움 중이다.
문제는 그 한복판에 나를 끌어들였다는 것.
이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또 흥미롭다.
- 웨신타오 주석……. 눈빛에서 귀광이 번들거립니다. 위험한데요.
귀신 장립도 웨신타오를 경계했다.
권력에서 밀려난 뒤 낚시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양반이 예기치 못한 때에 칼을 뽑았다.
그를 바라봤다.
끼어든 자체가 예의에 어긋나지만 그렇다고 태도가 추하지는 않았다.
단기필마로 적진에 돌격하는 여포 같았다.
그게 아니면 풍차를 향해 달려가는 돈키호테 정도.
굳은 얼굴의 웨신타오가 나를 보며 지그시 웃는다.
완진바오의 눈빛은 계산하기에 바빴다.
슈건핑 이하 방태민은 돌아가는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경매가 끝난 후의 연회장에서 펼쳐진 버라이어티 경매 2차전.
- 형님. 누구부터 줄 겁니까?
완진바오가 나에게 자신이 감당해야 할 위험 요소를 분산시켰다.
그는 웨신타오에게 먼저 술을 채워주기를 권했지만 그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완진바오의 진짜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
웨신타오와 말을 섞는 순간 본의 아니게 다른 파벌을 건드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현재 웨신타오는 삼키기 어려운 뜨거운 감자였다.
“안 되나?”
웨신타오가 다시 물어왔다.
전직 국가 주석이 먼저 시작한 위험한 게임.
“…….”
완진바오는 입을 다문 채 침묵했다.
이제부터 벌어지는 일들은 온전히 나의 몫.
싱긋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럴 리가요.”
두 손으로 술병을 잡았다.
파바바바밧.
사방에서 나를 향해 꽂히는 비수 같은 시선들.
주사위는 이미 손을 떠나 바닥을 구르고 있는 꼴이다.
화살은 어찌할 수 없이 시위를 떠났다.
어차피 깽판 치러 행차한 중국행이다.
그런 점에서 이보다 조건이 완벽할 수는 없다.
“고맙네.”
그제야 웨신타오의 얼굴에 만족한 웃음이 번졌다.
“영광입니다. 각하.”
전직이지만 분명한 중국 황제였다.
그에게 쓰는 각하라는 칭호는 자연스러웠다.
모든 이들의 귀에 똑똑히 박혀 들기를 바라며 내공도 살짝 담았다.
강단 있게 나갔다.
도발은 본래 어설프면 본전도 못 찾는 법이다.
나름 웨신타오를 3인자로 인정했다.
힐끗 바라본 방태민의 표정은 담담했다.
슈건핑은 알 수 없는 대외용 미소만 짓고 있었다.
능구렁이 완진바오도 평소처럼 감정을 철저하게 감췄다.
100여 명의 사람들이 가득 찬 공간임에도 주변은 일순간 침묵에 잠겨 들었다.
쪼로로록,
침묵 속에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잔에 채워지는 마오타이주.
왜 중국 정치주(政治酒)라 불리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국공내전에서 벌어졌던 일화는 일부에 불과했다.
술이 담긴 병은 그렇게 고급지지 않았다.
다만 그 술에 담긴 의미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잡스러운 부재료가 전혀 가미되지 않은 채 오직 오랜 시간 맛과 향을 내도록 숙성됐다.
정권을 잡고자 하는 공산당원들의 강한 욕망이 그만큼 온전하게 녹아 있는 술이었다.
최고 권력을 잡기 위해 그만큼 오래 묵혀야 하는 인간들의 밑바닥에 깔린 욕망의 순수함과 닮았다.
질 좋은 원재료를 9번 찌고 8번 누룩을 넣고 발효시킨 후 7번 술을 받아낸다.
권력을 잡기 위해 벌이는 가열 찬 투쟁과 같은 방식이다.
진정한 맛을 찾기 위해서는 최소 5년의 세월 동안 숙성시켜야만 한다.
왕태동과 방태민, 웨신타오, 슈건핑 등등.
중국 황제들도 그렇게 단련되고 숙성되어 결국 권력을 쟁취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웨신타오가 그 권력 판에 다시 등판했다.
권좌에서 물러나 숙고의 시간을 거쳐 다시 정계에 발을 들이는 셈이다.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오!”
웨신타오가 잔을 채운 술을 보며 기뻐했다.
꿀꺽!
잔이 다 채워지자 단숨에 비워냈다.
목이 탄 듯 거침이 없었다.
누구도 그의 태도에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뜻을 온전히 표현해내는 것 같은 그의 행동.
이 또한 정치 행위의 한 모습이었다.
“정말 맛있군.”
잔을 비운 웨신타오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술맛을 음미했다.
- 지금 왜 이러는 거죠? 관종인가요?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인터넷 용어를 남발하는 귀신.
난 충분히 그의 그런 태도가 이해됐다.
중국 권력자들의 앞에서 웨신타오는 선언하고 있었다.
그가 돌아왔음을!
그리고.
“한 잔 받을 텐가?”
웨신타오가 자신이 마셨던 잔을 그대로 나에게 내밀었다.
뜨거운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
씨이익.
나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
이제는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그리고 난…….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