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4장. 경매(3).
‘누구?’
양소려가 장립을 쳐다봤다.
새로 나타난 방문자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장립이 있는 곳에 큰마음 먹고 찾아왔다.
모두의 이목이 쏠려 있는 이곳.
지금쯤이면 자신의 방문이 각 세력들 사이에 널리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다행히 윗선의 허락을 받은 방문이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정치 행위가 됐다.
자칫 섣부른 행동으로 오해를 사면 그 파장이 어디로 튈지 몰랐다.
그런 입장임에도 장립을 만나보고 싶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 상황을 추진하고 있는지 정말 궁금했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중국 권력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베이다이허 회의가 열린 것도 아니건만 긴급으로 모임이 소집된 상태.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폭풍에 북경이 소란스러웠다.
몰려드는 이들의 면모가 이 정도 수준이면 웬만한 이들은 명함도 못 내밀었다.
그 점에서는 양소려도 마찬가지.
일개 상해방의 자금 담당 관리자의 딸 정도가 낄 자리가 아닌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장립에게서 초청장을 받았다.
장립은 기다렸다는 듯 보자마자 와인부터 건넸다.
정작 난장판을 만든 주인공은 무사태평했다.
자존심을 버리고 찾아온 자신에게 간단하게 친구라고 정의한 장립.
양소려는 혼란스러웠다.
마주하고 있는 장립은 현재 적도 아군도 아니었다.
그러나 입장이 어떻게 바뀌어도 결코 버릴 수 없었다.
지금도 마주한 그를 보며 심장이 떨렸다.
잊으려 노력했지만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음이 바로 녹아내렸다.
이제 유부남이 되어버린 사내.
양소려의 이런 감정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뻔뻔하게 그 마음을 외면한 채 친구라 선을 그었다.
할 말이 없었다.
서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관계에 있어 안심이 됐다.
동료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긍정적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장립은 잊지 않고 그녀를 일러 ‘지사장’이라 호칭했다.
그러던 중에 새로 등장한 인물.
띠릭.
장립은 방문자가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또각또각.
날선 구두 소리가 들렸다.
‘여자?’
훅하고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향수 냄새.
익숙하면서도 기분 나쁜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는 향기였다.
어쩔 수 없이 양소려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 순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주저없는 여인의 목소리.
“류미…….”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서는 여인을 보며 양소려가 이름을 불렀다.
“어? 손님이…….”
한 걸음 들어서던 류미가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양소려를 발견했다.
파바밧.
두 사람 사이로 불꽃 튀는 스파크가 터졌다.
“뭐야? 양소려! 네가 왜 여기 있어?”
류미의 두 눈이 상큼하게 치켜 올라갔다.
어느 시점부터 사사건건 부딪치는 양소려.
이곳 호텔에서 마주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장립이 벌인 경매 문제로 본가의 호출을 받았다.
이것저것 급한 대로 아버지와 상의하고 준비를 마치자마자 곧장 이곳으로 달려왔다.
장립의 경매에 참가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내로라하는 중국의 정치 경영자들이다.
때와 장소를 생각해 특별히 블랙 계열의 정중한 드레스 코드를 선택했다.
해외 유명 디자이너가 직접 방문해 손봐준 의상이다.
지금까지 그 어떤 자리에서도 내보인 적 없는 정장.
아무리 천방지축의 류미라 해도 이런 자리에서는 숨을 죽여야 했다.
의식해야 하는 시선이 많은 만큼 최대한 얌전하게 예의를 갖춰 행동해야 하는 자리다.
최고급 헤어숍에서 단아한 헤어스타일로 머리를 손대고 핑크빛이 도는 진주 목걸이와 귀걸이로 중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나타났다.
그간 볼 수 없었던 자신의 다른 면모를 특별한 기회를 빌려 장립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한껏 기대에 부풀었던 흥분된 마음은 양소려를 보는 순간 다 망쳐 버렸다.
‘언제 온 거야!’
북경에 귀빈들이 몰리면서 미처 양소려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다.
인사들의 대거 움직임으로 첩보력도 한계를 드러냈다.
“왜? 내가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양소려가 놀리듯 피식 웃었다.
“!!!”
류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뭔가 여유로워 보였다.
특히 자신보다 먼저 와 있다는 사실도, 또 손에 들고 있는 와인잔도 거슬렸다.
특히 그녀는 무공을 수련한 덕에 같은 나이대보다 동안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는 미모의 소유자.
“립……. 소려는 왜 온 거야?”
류미는 고개를 돌려 장립을 보며 물었다.
베이다이허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립의 곁에 양소려가 지금처럼 서 있었다.
“소려 양은 내 친구야.”
“치, 친구???”
장립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불쾌하게 친구라는 단어를 남발하는 장립.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장립은 능력이 차고 넘치는 자유로운 영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원자바오를 외조부로 둔 자신조차 이제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거물이다.
류미는 괜한 입술만 깨물었다.
“그리고 중요한 사업 파트너.”
맞는 말이다.
양소려는 장립과 홍콩에서 투자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중국의 핵심 사업인 일대일로에 자금을 투입했다.
“칫…….”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류미가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양소려와의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와인 마실래?”
“다른 와인으로 줘.”
류미는 사소한 것 하나에도 차이를 두고 싶었다.
살짝 웃음 짓는 장립.
‘너란 남자……. 진짜 나쁜 남자야.’
그럼에도 장립이 결코 밉지 않았다.
유부남에 바람둥이 기질이 넘쳤지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소유한 남자.
“하아…….”
류미의 입에서 괴로운 짧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
- 이걸 인정하네?
귀신이 두 여인의 감정싸움이 끝난 걸 알아챘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고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류미까지 자리를 잡고 와인을 마셨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솔직히 나도 떨렸다.
- 형님……. 만수무강하시옵소서!
갑자기 웬 만수무강?
귀신이 경외에 찬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만수무강을 입에 올렸다.
- 형님께서 한 번 행차하실 때마다 곳곳에 미녀들이 넘쳐나니 이게 바로 하늘이 주신 대단한 홍복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 두 번째로 존경합니다!
두 번째?
- 아직 노바 사부님을 따라가기에는 좀 부족한 점이 있으셔서……. 헤헤.
그래, 그건 인정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바 형님의 대도(大道)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바쁘신 분들 불러다 놓고 와인만 마셔도 돼?”
류미가 와인을 마시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안 될 이유가 있나?”
“……진짜 겁이 없는 거야 간이 큰 거야.”
류미가 어이없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본다.
“둘 다.”
“풋…….”
양소려가 대화를 듣다 참지 못하고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나와? 지금 태자당과 주석이 상해방 족치고 있는 거 몰라?”
불똥이 양소려에게 튀었다.
“공청단도 숨죽이고 있는 건 마찬가지 아니야? 자신들이 판 무덤에 스스로 빠져든 꼴이라니……. 쯧.”
“뭐라고! 말 다했어?”
“아니! 아직 다 못 했어!”
여인들의 전쟁은 무섭다.
- 미모만큼이나 성정들이 대단합니다. 흐흐흐.
귀신은 그 모습까지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후궁들의 전쟁을 지켜보는 환관 우두머리 같았다.
“이제 그만하죠.”
잔을 내려놓았다.
류미가 싸늘하게 양소려를 노려보다 시선을 돌려 나를 봤다.
눈빛에 담겨 있는 진심 어린 걱정.
“다들 기대가 커. 자칫 실망을 줬다가는 큰일 날 거야.”
류미가 냉정한 목소리로 경고해왔다.
바쁜 중국 공산당 최고위층을 모아 놓고 경매를 부치겠다는 것 자체가 대형 사건이었다.
다행히 정보가 밖으로 새나갈 일은 없다.
호텔은 진작 폐쇄 조치했다.
투숙객들은 환불을 받고 더 좋은 호텔로 이동했다.
막무가내 중국 스타일이다 보니 누구도 항의하지 못했다.
경호는 삼엄했다.
날아가는 새도 방향을 바꿔 갈 정도다.
“난 립을 믿어요.”
“믿어? 언제 봤다고?”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이니까.”
“됐어! 나도 친구거든!”
“사업 파트너는 아니잖아.”
양소려가 승기를 잡은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류미.
그러다 갑자기 씨익 입꼬리를 말았다.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립과 나는…….”
류미가 얼굴을 붉히며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날 보며 웃었다.
거기까지!
폭탄 발언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다.
“뭐?”
양소려가 찝찝한 표정으로 채근하듯 물었다.
“됐어. 넌 몰라도 돼. 호호호.”
류미가 다시 승자의 미소를 터트렸다.
“…….”
양소려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 위험한 여자들의 질투는 국가의 존망까지 흔들 수 있다더니…… 정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류미와 양소려의 자존심 싸움에 구경하던 귀신이 큰 깨달음을 얻은 듯 말했다.
그러니까 여자 얼굴만 보는 거 아니다.
- 그렇죠? 다섯 번째 순위로 심성(心性)을 살피라 노바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번째?
첫 번째는 뭔데?
- 흐흐.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첫째도 둘째도…….
귀신이 차마 말하지 못하는 뒷말.
더 묻지 않았다.
과거와 달리 요즘 세상은 여성들도 남자의 얼굴을 첫 번째로 본다.
남자들은 과거부터 쭉 그래왔다.
조선 왕실에서도 중전을 간택할 때 여인의 미모가 조건에 반드시 들어갔다.
왕들이나 평민이나 세상 사람들 눈은 다 똑같다.
스윽.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들 합시다.”
“???”
두 여인이 의아한 듯 쳐다봤다.
시간은 어느새 5시 50분을 가리켰다.
경매 개시 시간은 6시.
“뭘 준비해?”
류미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뭐긴 뭐야. 두 친구이자 파트너들이 날 보조해야지.”
“보조? 내가?”
류미가 어이없는 듯 되받아쳤다.
“싫어?”
“난 좋아요!”
양소려가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나도 콜!!!”
양소려를 째려보던 류미도 덩달아 일어났다.
- 역시 형님! 나도 콜!!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