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8장. 그래 친구!
‘자존심……이라고?’
류미는 장립의 말을 몇 번이나 되새겼다.
솔직히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류미는 당연히 장립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보통의 남자라면 류미의 제안이 엄청난 기회임을 알고 절대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야망 있는 중국 남자들이라면 더욱더 그랬다.
당장 앞에서 고개 숙여 절까지 했을 것이다.
그런 제안을 장립이 단칼에 거절했다.
그것도 가치 없는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말이다.
‘그게 중요해?’
류미가 아는 주변 사람들도 물론 자존심을 중요하게 여겼다.
다만 경중에 따라 다르게 내세웠다.
자신의 이득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자존심을 가장 아래로 놓았다.
명분을 중시하지만 그만큼 실리가 우선하기 때문이다.
역대 왕조와 작금의 공산당 정권까지 모두가 눈앞의 이익을 두고서는 가차없이 동지를 팔았다.
철저히 계산기를 두들겨 한 푼이라도 남는 장사를 택하는 것이 중국인들의 성향이다.
공산당 간부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이익을 위해서는 부모를 죽인 적과도 웃는 얼굴로 동침 가능한 자들이 태반이다.
일련의 일에 대해 외할아버지와 아빠도 누누이 류미에게 상기시켜 온 바였다.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건 결국 자신밖에 없다고 했다.
한마디로 피붙이인 외조부와 부모도 믿지 말라는 소리였다.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가장 먼저 자존심을 버리라고 충고했다.
류미의 성향과는 다분히 다른 가르침이었다.
그래도 저항하지 말고 따라야 했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그런 상황에서 류미는 장립을 향한 자신의 입장을 고려해 최선의 방법을 짜냈던 것이다.
자신이 습득하고 깨달아 온 인생 노하우를 적절히 녹여냈다.
고위 권력자 집안 여인들에게 선택받은 남자들은 고속도로 달리듯 승승장구했다.
꽌시도 철저하게 그런 류의 이익 관계였다.
자존심만 앞세우기보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이득이 돌아온다면 서로 돕고 살아가는 관계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농담은 아닌 것 같은데…….’
장립의 표정은 확고해 보였다.
한국인이라 받아들이는 데 있어 입장이 다른 것 같다.
끄덕끄덕.
주인집 할머니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도대체 어떡하라고!’
류미는 장립이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놓치기 싫다.
그간 제법 이성을 만났지만 마음을 연 것은 장립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정작 상대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여인을 선택했다.
무척 자존심 상했다.
다 지난 일로 잊혀졌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그와 맞닥뜨린 순간 류미는 확실히 깨달았다.
이 세상에 장립 같은 남자는 다시없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숙고 끝에 제안한 자리 ‘첩’.
장립은 생각해보지도 않고 단박에 거절했다.
‘멋있어…….’
류미의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다른 남자들과는 배포가 달랐다.
도리어 그는 자신이 흔쾌히 선물로 주겠다고 말한 5억 달러의 열 배를 주겠다고 선언했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그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그리고 또 한 번 확실히 깨달았다.
‘립……. 이번 생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두 번 놓치지 않을 거야!’
굳이 지금에 와서 결혼은 의미가 없었다.
어린 시절 같이 놀던 친구들 대부분이 결혼을 했지만 행복한 경우는 손가락으로 꼽았다.
욕망과 야망에 의한 결합 그 이상도 아니었다.
남편은 밖에서 첩을 들이고 여인들도 그에 상응한 쾌락을 좇았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소황제들은 대부분이 인간말종에 가까웠다.
세태가 돌아가는 걸 겪어온 류미에게 장립은 말 그대로 신비로운 인종에 가까웠다.
“업이 익어 인과의 결실을 얻을 때가 됐어…….”
그때 조용히 들려오는 주인 할머니의 뜻을 헤아릴 수 없는 말.
나지막하게 들린 그 말에 장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 여선께서 인과(因果)라고 하시네요. 이런 걸 요즘 말로 빼박이라고 하죠? 으흐흐.
류미의 눈빛에 담겨 있는 확고한 결심.
“하아.”
짧은 한숨이 절로 터져나왔다.
누님이 인과까지 언급할 정도라면 류미가 그만큼 굳게 마음먹었다는 의미였다.
안타까웠다.
공산당 고위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류미는 지극히 선하다.
그런 그녀가 가시밭길로 걸음을 내딛었다.
“인정할게.”
“???”
“립의 자존심 받아줄게.”
아니 류미 누님, 지금 우리가 해장 딤섬을 먹으며 나눌 대화는 아니지 않습니까?
한숨 푹푹 내쉬며 류미의 말에 귀를 열어두었다.
“첩이 싫다면……. 내가 첩이 될게.”
“!!!”
- 와씨! 세다!
귀신이 턱이 빠져라 입을 쩍 벌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폭탄이 또 터졌다.
내가 첩이 싫다니 본인이 첩이 되겠다는 기막힌 발상.
“저기 류미……. 내게는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쌍둥이가 미국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괜찮아. 기다릴게.”
“응?”
“엄마가 그랬어. 남자들은 몸속에 각인된 DNA 때문에 한 여자한테 정착하기 힘들다고 말이야. 내가 필요하면 말해.”
가정교육을 너튜브 찌라시로 배운 거야!
자고로 여자와 남자는 서로 사랑하면 평생 머리칼이 파 뿌리처럼 희어지도록…….
- 큼큼. 형님 양심은 지키고 삽시다. 최소한으로다가.
귀신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측근에서 가장 많이 나를 지켜봐온 귀신.
입이 저절로 닫혔다.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립도 남자잖아. 나 정도면 괜찮지 않아?”
류미가 분위기에 맞지 않게 윙크를 날린다.
걸 크러쉬 매력이 넘치는 중국 미녀.
- 미인이십니다! 과거에 태어났다면 양귀비와 달기 정도 되실 레벨이십니다!
귀신이 흐뭇한 얼굴로 씨알도 먹히지 않을 아부를 날렸다.
귀신의 말처럼 류미에게는 딱 꼬집어서 말할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 이 정도면 받아줘야 영웅이지. 자처해 품에 안기겠다는 여인을 거절함은 천지간의 기본이 되는 음양의 도가 아닐세.
아니! 누님은 여선이잖아요!
착한 선신이 그런 발언하시면 안 되죠!
- ……신선이 되어도 긴 밤은 외롭다네.
남친 없는 여신선의 고백.
지금 내 편은 한 명도 없다.
지조를 지키고 싶어도 환경이 허락지 않는다.
폭풍 속에서 바다를 헤치고 나가는 외로운 일엽편주 같은 신세가 아닐 수 없다.
- 침이나 닦으시고…….
어, 언제 침을……?
스윽.
나도 모르게 흐른 침을 손으로 닦았다.
도덕적 양심과 실리, 욕망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운명의 딤섬 집.
어쩐지 이번에는 홍콩에 오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지참금도 두둑이 가져갈게.”
류미! 배가 터질 것 같아!
떡밥은 이제 그만!
“우리 아빠와 외할아버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내가 목숨 걸고 립이 원하는 대로 해줄게.”
진짜였다.
전생에 사랑에 눈이 멀어 나라를 팔아먹은 낙랑공주의 현신이 분명했다.
장립의 탈을 쓰고 그 안에 장태산이란 인간이 들어 있는 걸 그녀는 몰랐다.
현재 공청단이 상해방과 태자당에 밀리고 있지만 삼국시대 때의 오나라 정도는 됐다.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헛되이 꿈꾸고 있는 중국몽을 부숴버리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내게 힘이 되겠다고 호언하는 류미.
“류미.”
한껏 흥분한 그녀를 조용히 불렀다.
“응!”
그녀가 한 옥타브 올라간 목소리로 낭랑히 대답했다.
처음으로 되돌리기에는 늦은 것 같은 분위기다.
“지금 류미가 한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이야기하는 거야?”
“……응.”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나에게는 본처가 있어.”
“상관없어.”
“상관있어. 아내를 두고 난 첩을 둘 수 없어.”
단호한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리이이입! 이건 자존심 문제가 아니잖아. 그냥 받아주기만 하면 돼. 귀찮게 하지 않을게.”
류미가 몸부림치듯 발악했다.
그녀가 왜 이런 마음을 먹었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널 사랑하지 않아.”
창칼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푹푹 쑤시는 언어폭력을 가했다.
꾸욱.
류미가 입술이 까매지도록 깨물었다.
- 안타깝네요. 형님은 사랑에 너무 잔인하십니다. 널리 여인을 이롭게 하라는 노바 형님의 뜻을 잊어버리시고…….
귀신이 허탈한 듯 개탄하며 한마디 했다.
투둑.
동시에 류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 한 줄기.
당연히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을 이용하는 일은 내 양심이 허락지 않는다.
홍린이었다면 차라리 결정이 쉬웠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배경이 필요한 홍린.
거래하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그러나 류미는 홍린과 입장이 완전히 달랐다.
시집도 안 간 선한 여인을 첩으로 묶어 둘 수는 없다.
“나에게 조금도 줄 마음은 없는 거야?”
류미가 재차 확인하듯 물어왔다.
끄덕.
확인 사살도 빠뜨리지 않았다.
“흐으윽.”
이제는 대놓고 눈물을 쏟기 시작한 류미.
웬일인지 나도 심장이 아파왔다.
사랑도 돈으로 흥정하는 양아치가 아닌 이상 감정이 동요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 홀로 사랑은 부운종적(浮雲蹤迹)이라. 뜬구름의 종적과 같이 막연하여 걷잡을 수 없는 걸 어린 중생이 어이 알고. 가여운지고.
대장금 누님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류미를 바라봤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
아무리 내가 중국몽을 깨부수기 위해 태어난 한민족 후손이라 해도 여인의 사랑까지 이용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내가 편해지고 이득을 취하고자 선한 자의 착한 심성을 이용하는 행위 자체가 어둠의 카르마를 쌓는 지름길이다.
그것도 엄청난 어둠의 카르마.
- 그만 가시죠.
귀신이 이제 그만 가자고 재촉했다.
거절한다.
- 형님!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럽니까.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으면…….
“류미!”
눈물을 그칠 줄 모르는 류미를 짧고 강한 어조로 불렀다.
“…….”
벌써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무는 류미.
스윽.
그녀에게 무심히 손수건을 내밀었다.
“닦아.”
“……내가 싫다면서 왜 이렇게 잘해주는데.”
류미가 혼란스러운 듯 묻는다.
씨익.
입가에 번지는 친절한 나의 미소.
“북경 가야지.”
“???”
류미가 두 눈을 껌벅였다.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더라도……. 친구는 될 수 있잖아.”
“친……구?”
“그래 친구. 우리…… 인생 친구 먹자!”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