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6장. 책임져 줄게!
북경?
홍콩에서 갑자기?
우연이 필연이 되고 필연은 운명이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조금 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류미.
다소 어색한 얼굴로 북경행에 대한 의사를 물어왔다.
- 오!!! 북경 좋죠! 형님 오후에 자금성 산책 가시죠! 그리고 저녁에는 베이징 덕에서 바삭 오리 한 마리 썰죠.
귀신아……. 너 북경이 어떤 곳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
류미가 평범한 신분의 사람이라면 그래, 북경 나들이 괜찮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류미는 공청단 최대 주주의 외손녀다.
그 자체만으로도 정치적 의미가 깔릴 수밖에 없다.
한 번 움직이면 파장이 만만치 않으리란 건 당연했다.
류미의 한마디에 계산이 복잡해졌다.
오늘 그녀와의 만남은 우연이 확실했다.
계획에 없던 일들이 연속 터지는 것만 봐도 그랬다.
물론 대장금 누님 일도 마찬가지.
“……”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안 되겠지?”
나의 눈치를 살피던 류미가 거절을 재차 확인해 왔다.
기대와 아쉬움이 교차하는 그녀의 눈빛.
아리아 초코파이 안에 들어 있는 마시멜로처럼 사건이 쭉쭉 늘어났다.
- 형님 고 하시죠. 여인이 저렇게 원하는데. 그럴 땐 튕기는 거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도대체 그런 걸 누구한테 배웠어?
난 안 가르쳤다.
남녀 간에 밀당은 필수적으로 장착해야 하는 기술인 세상이다.
- 노바 형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상대가 꽃을 원하면 꽃이 되고 맛있는 음식을 원하면 요리사가 될 줄 알아야 완벽한 남자라고요.
푸하하하하하하.
웃기는 소리다.
- 웃기는 소리요? 지금 제 우상이신 노바 형님을 무시하는 겁니까!
귀신이 큰소리를 쳤다.
바보 같은 놈.
초짜가 뭘 알겠니.
- 제가 왜 바봅니까? 형님께 그 발언에 대한 구체적 해명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귀신아 간단하게 설명해 줄게.
피식 웃으며 귀신을 똑바로 쳐다봤다.
너하고 노바 형님하고 레벨이 같아?
- 다르죠. 하지만 그렇게 확 차이나는 건 아니지 말입니다!
군대도 못 가고 죽은 녀석이 어울리지 않는 말투를 사용했다.
아니 달라.
그것도 확실하게 넘사벽 수준이야.
- 인정 못 하겠습니다!!!
너 엘프 여왕님을 애인으로 삼을 수 있어?
훅 팩트를 건드리며 냉혹하게 질문을 찔러 넣었다.
- 그건 환경 자체가…….
환경? 그럼 노바 형님보다 나은 그 얼굴과 가방끈으로 살아생전 스쳤던 뭇 여성들로부터 존경과 애정을 듬뿍 받아 봤어?
- 그 말씀은 저를 포함해 솔로로 살다 죽은 전체 몽달귀신들에 대한 차별적인 발언입니다! 취소해 주십시오.
취소? 푸하하하하하하하하.
웃기는 소리 그만해.
신들의 세상이나 인간들 세상이나 다를 거 없어.
귀신아 넌 노바 형님이 그 경지를 그냥 얻은 줄 알아?
- 제가 보기에는 이렇다 할 스킬 차이는…….
쯧쯧.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귀신을 보며 혀를 찼다.
차원에 관계없이 나 아닌 타인이 일궈낸 성과에 대해 폄하하기를 즐기는 이들이 세상에 참 많다.
귀신 세계도 다르지 않다.
노바 형님이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갈고 닦았던가.
노바 형님은 천재 중의 천재다.
거기에 더해 엄청난 노력파이기도 했다.
그걸 스쳐간 연인들이 알아봤던 거다.
잘생긴 얼굴만 믿고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뿌리고 다니지도 않았다.
또 노바 형님은 생각보다 평범한 축에 드는 외모다.
그러나 뭇 남성들을 압도하는 빠른 눈치와 각종 스킬 활용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헤어진 여성들 모두 화를 내기는커녕 눈물로 추억을 더듬으며 노바 형님을 그리워했다.
상대를 만날 때마다 최선을 다해 마음을 쏟았던 노바 형님.
여인들이 저 스스로 흠뻑 사랑받고 있음을 의심조차 않을 만큼 온 마음과 정신을 다했다.
싼 제비들이나 양아치들이 여성의 마음을 볼모로 자행하는 삥 뜯기도 하지 않았다.
여인들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 물심양면 노바 형님에게 보답했다.
-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저 또한 신으로서…….
넌 신이 아니라 귀신이야!
귀신아.
넌 살아생전 네가 펼쳐놓은 족쇄 그물에 걸려서 벗어나지 못했잖아.
- 족쇄요? 그게 무슨…….
사람이 한세상 살다보면 각종 족쇄에 걸리지 않을 수가 없다.
주정뱅이는 술의 족쇄에, 애연가는 담배 족쇄에, 약 중독자는 약물에, 식탐이 넘치는 자는 식욕의 족쇄에.
그리고 한층 더해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게으름의 족쇄에 걸려 살게 마련이다.
특히나 게으름의 족쇄는 자신 안에서 끊임없는 부정적 감정과 현상을 창조해 낸다.
귀한 인간의 몸을 받아 세상에 태어났음에도 애써 노력하지 않고 가난한 부모에 대한 불평불만을 쏟아내기만 한다.
나름 안전하고 훌륭한 복지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헬 조선이라 외치며 제 나라와 사회에 대한 불평불만을 토로한다.
결정적으로 매사 타인과 비교하며 자신을 비하하며 그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한마디로 자처해 만사형통의 순간에도 복이 임할 틈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 눈앞에 있는 귀신처럼 타인이 이룩한 것들을 일단 부정하고 매일 세상을 욕하느라 귀한 지금의 본인 삶을 고갈시킨다.
특히 그런 사람들에게서 풍기는 악취는 1차적으로 좋은 인연들이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게 한다.
인덕(人德) 자체가 바로 하늘이 주는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핵심 보상이기 때문이다.
- …….
귀신이 느끼는 바가 있는지 입을 다물었다.
측은한 시선으로 귀신을 봤다.
그리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건넨 충고 한마디.
노력해라.
스스로를 냉철한 시선으로 관찰하고 자신 안에 있는 문제를 자각하고 깨우쳐.
자신의 게으름을 면밀히 살피고 각성한 후 세상 욕하는 걸 멈춰.
시간 금방 간다.
언제까지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실체 없는 귀신으로 살다 사라질래?
- ……죄송합니다.
귀신이 숙연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전하는 말을 다 깨우치지는 못했을 테지만 대충 뜻은 알아들은 듯했다.
눈빛을 보니 수용하고 상황을 받아들였다.
하늘이 점지한 삼인행이 풀어야 할 고리다.
귀신이 이 상태로 깨달아 성불이라도 하게 되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미안해…….”
다시 돌아온 현실.
당당하던 류미의 어깨가 축 처졌다.
개인적인 일이 아닌 집안과 엮여 나타난 류미의 변화였다.
“식는다. 먹어.”
확답을 주지는 않았다.
“그래…….”
입맛이 뚝 떨어진 듯 샤오롱바오를 깨작거리는 그녀.
악동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뭐 해 줄 건데?”
“응?”
“북경 가면 나한테 이득이 되는 게 뭐가 있을까?”
“갈 수 있어???”
순식간에 류미의 눈빛이 반짝반짝 생기를 띠었다.
“하는 거 봐서.”
“놀아줄게! 그리고 말만 해. 세상 진미 다 맛보게 해줄게. 만한전석 먹어 봤어? 그것도 아니면 북경 오리?”
애도 아니고 먹을 것과 같이 놀아준다는 말로 나를 홀리는 류미.
“솔직하게 말해. 외할아버지야? 아빠야?”
이럴 때는 직구가 서로 편한 법이다.
“알고 있었어?”
“류미 넌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아.”
“와아! 립!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어?”
류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나 나쁜 놈 아니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전직 약혼자에 배신자니까. 악역에 충실한 것뿐인데.”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류미.
“……진짜 나빠.”
“네가 먼저 그렇게 말했잖아.”
류미는 진짜 상대가 아니다.
귀신보다 쬐금 더 레벨이 높은 정도다.
- 겸손하겠습니다…….
귀신이 자숙모드로 들어갔다.
저 태도, 물론 믿지 않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 기가 살아 형님이라고 불러댈 귀신.
그게 귀신 매력이기도 했다.
- 형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헤헤헤.
거기에 더해 몇몇 장점이 더 존재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미국 명문대를 졸업하고, 갱단에 투신했다가 보스 여자와 도망쳤으니 그 배짱도 장점 중 하나다.
- ……그게 장점인가요?
칭찬인지 욕인지 몰라 귀신이 갸웃거린다.
그래 무식하게 용감한 건 죄라고 할 수 없다.
- 형님……. 흑흑.
쇼까지 하는 귀신.
그와의 동행도 장점 중 하나다.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교육을 빙자해 귀신을 갈구는 게 암암리에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됐다.
“책임져 줄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강하게 나오는 류미의 태도.
대단한 결정을 한 듯 결연한 표정이 역력했다.
“뭘?”
“장립 네 인생.”
저기요 류미 누님.
잊었나 본데 여기 계시는 장립은요, 엄연히 애 둘 딸린 유부남입니다.
어이가 없어 류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동안 생각 많이 해봤어.”
“무슨 생각?”
“베이다이허에서 우리의 인연 그렇게 가볍지 않았어.”
그건 인정.
“난 너에게 호감을 표했어. 립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사실 연락을 기다렸어. 그래도 내가 여잔데 먼저 연락하기는 그렇잖아.”
류미가 속에 담아두었던 그간의 속마음을 풀어놓았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가만히 들었다.
베이다이허에서 류미의 도움을 받은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후회했어.”
류미의 눈빛에 힘이 빡 들어갔다.
폭탄 발언이 나올 것만 같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다.
“그리고 확실히 결정했어!”
뭘 결정해?
- 꿀꺽.
귀신이 류미의 말에 집중하며 침을 삼킨다.
점점 강한 불안감이 밀려오는 이 순간.
“립. 널 내 첩으로 받아줄게!”
“뭐 처어어업???”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