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5장. 무조건 무조건!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류미는 갑작스럽게 표정이 변한 장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정돼 있던 운명처럼 그와 마주쳤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립과의 동행.
베이다이허에서 있었던 만남처럼 여전히 류미를 들뜨게 만들었다.
비록 유부남에 애 아빠가 돼 버렸지만 장립은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오히려 더 멋있어졌고 여유가 넘쳤다.
류미의 신분을 알면서도 보통 사람 대하듯 편하게 행동하는 유일한 남자.
그와 딤섬 맛집에 왔다.
류미의 제안에 장립은 전혀 고민하지 않고 기꺼이 동행했다.
몇 번 다른 친구들과 동행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이곳 딤섬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밖에서부터 이미 인상을 쓰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그 이후로는 혼자 딤섬 집을 찾게 된 류미.
주문한 맛있는 샤오롱바오가 나왔다.
문제는 그 이후 분위기다.
주인 할머니와 어색한 눈빛을 주고받는가 싶더니 장립이 금세 인상을 썼다.
뭔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이게…… 맛이 없어 보이나?’
오늘따라 더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샤오롱바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맛의 얇은 만두피가 윤기 내며 따뜻한 김 속에서 자태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안을 가득 채운 촉촉한 육즙과 고기가 은은하게 비쳐 보였다.
꿀꺽.
절로 입에 침이 돌았다.
류미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이곳을 찾는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괜히 더 생각나는 마성의 요리였다.
엄마가 어린 시절 자주 만들어줬던 요리처럼 영혼이 기억하는 음식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한참 뜨거울 때 먹어야 더한 진미를 맛볼 수 있다.
“뭐 해? 먹어봐. 진짜 맛있어.”
류미가 멍한 시선으로 인상을 쓰고 있는 장립에게 권했다.
나름 자유가 보장돼 있지만 실상은 가부장적인 집에서 자란 류미.
아무래도 어른이나 초대한 손님이 먼저 음식에 손을 댄 후에야 식사를 시작하는 게 습관에 배었다.
“어? 응…….”
장립이 어색하게 웃음을 띠며 수저를 들었다.
“이거 먹어.”
류미가 젓가락으로 샤오롱바오를 집어 장립의 숟가락에 올려주었다.
“고마워.”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약혼자인 날 헌신짝처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갔는데.”
류미가 장난 섞인 말투로 진심을 전했다.
씨익.
그제야 그다운 미소를 보이는 장립.
톡.
젓가락을 들어 샤오롱바오 옆구리를 찔러 구멍을 냈다.
역시 장립은 샤오롱바오를 제대로 먹을 줄 알았다.
멋모르고 그냥 덥석 삼켰다가는 뜨거운 육수에 입안이 온통 데인다.
“흐음……. 역시 솜씨가 대단하시네.”
“응? 솜씨? 누구? 주인 할머니?”
맛있게 풍기는 냄새에 감탄하는 장립의 말에 류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딘가 말투가 묘했다.
“내가 아는 분이 만든 요리와 비슷해서.”
“정말? 아닐 텐데……. 여기 주인 할머니는 내가 인정하는 중국 제일의 샤오롱바오 1인자야.”
류미의 말은 진심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대단한 중국 요리사들의 음식들을 맛보고 자란 류미였다.
그런 그녀가 인정하는 샤오롱바오 1인자.
“그것도 인정.”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식겠다. 먹어.”
장립은 입으로 수저를 가져갔다.
“여기 샤오롱바오는 절인 생강이나 간장도 필요 없어. 그냥 그 자체가 예술이야.”
류미가 기대에 찬 시선으로 장립을 바라봤다.
“류미가 제대로 아네.”
옆에 있던 주인 할머니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좋으신 일이 있나?’
류미가 평소와 다르게 얼굴에 함박웃음을 짓고 계시는 주인 할머니를 쳐다봤다.
오늘 아침 복권에라도 당첨된 듯 싱글벙글 얼굴 가득 웃음꽃이 폈다.
“하아.”
반면 장립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짧은 한숨을 토했다.
후루룻.
그러면서도 장립은 제대로 샤오롱바오를 즐겼다.
입안에서 터진 육즙부터 맛을 음미했다.
“!!!”
깊게 맛을 보던 장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때 맛있지? 둘이 먹다 둘이 죽어도 모를 맛이지?”
류미는 이 순간이 가장 즐거웠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이 순간은 둘만의 데이트였다.
류미의 모든 신경이 온전히 장립에게 집중됐다.
지금 이 시간이 한 번 흘러가 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띠링.
그때 류미의 스마트폰에서 알림음이 들렸다.
스윽.
문자를 살피는 류미.
‘동……행!’
아빠에게서 온 문자였다.
내용은 단조로울 만큼 간단했다.
하지만 품고 있는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문자를 보던 류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짧게 끝나버린 홍콩에서의 데이트.
순간 어깨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자유인 류미가 아닌 공산당 고위 정치 가문의 딸 류미로 돌아가야 할 시간.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아버지와 그 뒤에 계신 외할아버지의 그림자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들이…… 장립을 원하고 있다.
***
- 형님이 이렇게 완패를 당하는 건 처음 봅니다. 흐흐흐.
깨소금 맛이냐?
귀신은 제 일처럼 흐뭇해했다.
누님 옆에서 어부지리로 빚이나 땡겨보려 했던 나쁜 귀신 놈.
- 인간도 신도 모두 완벽한 존재는 세상에 없나 봅니다.
급기야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헛소리까지 뱉는다.
취소를 외쳤지만 계약은 예정대로 실행됐다.
약관 어쩌고 하며 앵무새처럼 중얼거리던 알림음이 최종 결과를 통보했다.
약관을 보고 싶다고 외쳤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신들 간의 계약서는 천기누설이라 등선한 뒤에나 열람이 가능하단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신들의 법.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장금 누님과 알림음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렇게 완벽하게 당할 수 없다.
타짜들의 짜고 치는 고스톱 수준이었다.
그건 도신이 내려도 못 이긴다.
- 그런데 진짜 맛있네요……. 이런 샤오롱바오는 난생 처음입니다!
귀신이 후루룩거리며 자기 몫의 샤오롱바오를 흠향했다.
형체는 그대로지만 맛깔스러워 보이던 음식의 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후루룻.
육즙을 삼켰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기깔 난 맛이다.
누가 있어 대장금 누님의 요리 솜씨를 능가할 수 있겠는가.
나도 음식 쪽으로 레벨이 상당히 올랐지만 누님을 따라잡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
레벨과 상관없는 영혼의 손기술.
음식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니만큼 따라잡을 생각도 없다.
콰직.
돼지고기 특유의 달큰하고 고소한 육즙 향과 가미된 마늘 그리고 각종 야채의 싱그러움이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류미가 새벽에 비행기 타고 올 만했다.
대장금 누님에게 한 방 강하게 당했지만 쿨하게 털어버릴 생각이다.
어차피 포인트는 벌면 된다.
그리고…….
누님.
대장금을 불렀다.
빚을 땡겨 레벨업까지 성취한 대장금 누님은 지금 부처의 화신처럼 온화함을 사방으로 발산했다.
기회가 더욱 좋았다.
- 말해. 존경하는 동생.
호칭부터 달라졌다.
존경하는 동생이란다!
누님 눈가에 호감이 가득 담겼다.
처음 만날 때 날 꼬맹이로 보던 그 시선이 아니다.
신계나 인간계나 넉넉한 인심은 상대를 평안하게 만들었다.
누님, 가끔 아르바이트로 불러도 되죠?
- 물론이야! 동생이 부르면 어디서든 곧장 달려갈 거야. 무조건! 무조건이야!
무조건 무조건이야!
갑자기 트로트 노래 가사 같은 대사를 날렸다.
대장금 누님은 이번 일로 확실한 내 편이 됐다.
그깟 카르마 포인트, 계약금으로 지불한 셈치면 된다.
대장금 누님 요리 솜씨면 어지간한 신선들 모두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아직 습득하지 못한 요리들도 꽤 많다.
생각해 보면 남는 장사였다.
- 형님의 긍정적인 마인드는 세상에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헤헤.
간신배 같은 귀신이 손을 싹싹 비빈다.
당최 믿음이 가지 않는 귀신.
그 틈에 귀신이 자기 몫으로 먹고 있던 샤오롱바오 기가 다 사라졌다.
주제에 입맛은 고급이다.
“누님. 맛이 끝내줍니다! 몇 판 더 주십시오.”
“누이니임? 립? 그게 무슨 말이야?”
무의식중에 한국어가 튀어나와 버렸다.
그 순간 류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몹시 당황스러운 순간이다.
“샤오롱바오가 네 미모만큼의 가치가 된다는 뜻이야.”
대장금 누님이 중국어로 대신 대답했다.
“…….”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류미가 입을 다물었다.
대장금 누님, 성격 많이 변했다.
귀신이 여선이라 부를 만큼 범접하기 어려웠던 도도함을 거두고 편안한 기운을 풍겼다.
중금리에서 해방되자 모든 근심이 다 사라진 듯 가뿐해졌다.
“한국어도 하세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류미가 놀라며 물었다.
“그럼. 요즘은 글로벌 시대잖아.”
태연하게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는 대장금 누님.
“와아아! 멋져요!!!”
류미는 또 거기서 감탄한다.
- 흐흐. 여선님 진짜 대단하십니다!
귀신이 동질감을 느낀 듯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 순간 나는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사람이나 신선이나 여자는 위험하다!
“기다려, 금방 만들어 올게.”
대장금이 쏜살같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같은 날 처음이야.”
“뭐가?”
“여기 주인 할머니 되게 무뚝뚝하고 깐깐하시거든. 그런데 오늘은 이웃집 아줌마처럼 친절해.”
- 흐흐. 풍요로움은 모든 이들을 넉넉하게 만드나니…… 진립니다. 진리!
귀신이 본인 돈 빌려준 것처럼 흐뭇해했다.
“내가 어른들이 좋아라 하는 스타일이야.”
“그건 맞아.”
류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외할아버지를 비롯해 대단한 공산당 원로들께서도 립에게 반했잖아.”
류미 눈에도 나를 향한 존경이 담뿍 담겼다.
- 귀신이면 귀신, 신이면 신, 인간이면 인간. 다들 형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하하하.
속이 훤히 보이는 귀신의 아부.
흐뭇함은 귀로만 느끼고 의미는 깨끗이 씻어냈다.
빈틈을 잠깐만 보여도 무기한 무이자로 카르마를 빌려가고도 남을 귀신이다.
너한테는 안 속는다.
공식적으로 대부업자 자격을 얻었다.
머지않고 신계에 나에 대한 소문이 싹 퍼질 게 뻔하다.
신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찾아와 내 앞에서 죽는 시늉까지 하는 미래의 광경이 훤히 보였다.
“그런데…… 류미.”
“어?”
“안 먹어? 먹고 싶다며?”
“……먹어야지.”
“무슨 고민 있어?”
나의 숟가락에 샤오롱바오를 올려주던 친절한 류미가 갑자기 생각이 많아진 모습이다.
뭔가 말 못 할 고민이 있어 보였다.
“저…… 립.”
류미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나를 본다.
“할 말 있어?”
대놓고 물었다.
순간 뭔가를 결심한 듯한 류미의 표정.
“립!”
“???”
“나랑 북경 갈래?”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