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1장. 누님이 왜 거기서 나와?
“류미가?”
“그렇습니다. 총리님.”
“허어어……. 발이 나보다 빠르군.”
북경의 아침은 언제나 새로웠다.
개혁개방 이후 승승장구 중인 중국.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일본과 유럽을 제치며 미국 다음으로 넘버2가 됐다.
그리고 수도인 북경은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구심점이 됐다.
그런 북경에서도 고위 공산당원들이 대거 몰려 있는 주거지의 특별함은 더욱 남달랐다.
하룻밤 사이에도 이곳에서는 엄청난 일들이 결정됐다.
중국 인민들의 미래를 결정 짓는 사건들이 암중 혈투로 벌어졌다.
각각의 주거지에는 공안들이라 해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다.
총기를 소지한 경호원들이 고위 공산당원들을 목숨 걸고 수호했다.
특히 전직 주석과 총리급에 대한 대우는 특별했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서화를 그리고 있던 원자바오.
갑작스럽게 태자당이 상해방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인 왕정을 정치적으로 공격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상무위원으로 중요한 일을 대리하는 자를 공격했다는 건 선전포고를 의미했다.
평정심이 흐트러졌다.
한때는 자신들이 중심축을 이루며 주변 흐름을 조종하는 게 가능했지만 지금은 슈건핑과 태자 등의 독주가 본격화되고 있었다.
착각이 불러온 결과였다.
비밀 조직 천지회를 이용해 장기적으로 목표를 세운 태자당.
군과 공안 권력을 거머쥐자 거칠 것 없이 몰아쳤다.
부정부패를 명목삼아 상해방을 가차 없이 후려쳤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경고성으로 공청단 외부 간부들까지 손을 보기 시작했다.
단 몇 년 만에 그동안 추구해 왔던 모든 협의와 암중 협약 등이 무시됐다.
하루하루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상황이다.
전쟁은 우려했던 것보다 빠르게 터졌다.
상해방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왕정 상무위원을 태자당 권력자들이 공격했다.
왕정 뒤에 있는 장택민에 대한 도발이 분명했다.
그 틈에 중요한 정보도 함께 흘러들어왔다.
미국에서 칩거하고 있던 장립이 홍콩에 나타났다.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리장창과 장문량과 조우한 장립.
그에 대한 세세한 정보가 밤새 북경을 휩쓸었다.
오늘따라 천천히 움직인 원자바오는 그에 대한 정보를 늦게 접한 축에 들었다.
“왕정의 첩인 홍린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 나왔습니다.”
원자바오의 최측근이 보고를 이어갔다.
“홍린이라…….”
원자바오도 잘 알고 있는 왕정의 첩.
미모가 뛰어난 재녀였다.
지금의 왕정이 상무위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공이 컸다.
“장립이 수상합니다.”
정보를 풀던 측근이 자신의 생각을 넌지시 내놓았다.
“우연히 마주쳤다고?”
“……장립의 계획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야 우연이 맞아.”
“총리님…….”
“류미는 고삐 풀린 망아지야. 갑자기 딤섬을 먹겠다고 새벽부터 홍콩으로 날아간 녀석이야. 그런 녀석을 장립이 어떻게 알고 계획적으로 접근했다는 거야? 아닐 거야.”
외손녀 류미의 성향을 꿰뚫고 있는 원자바오는 부정의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곧 서른이 되는 나이임에도 아직 철없이 행동하는 외손녀.
그렇다고 다른 고위 공산당원들 자제들처럼 막살지는 않았다.
그들 못지않게 스포츠카를 좋아하고 거칠 것 없이 인생을 즐기지만 마약이나 남자 문제에 있어서는 깔끔한 아이였다.
곧잘 반항아처럼 굴고 어른들 말을 듣지 않는 듯 행동하지만 속은 많이 여렸다.
“장립은 위험한 자입니다. 속을 알 수 없는 그자와 어울리게 두시면 괜한 구설수에…….”
“놔둬.”
“네?”
평소 깐깐하기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성격의 원자바오와 다른 지시에 측근 비서는 적잖이 놀랐다.
“태자당과 상해방 쪽 인사들이 장립과 연결되는데 우리 측 인사는 누가 있나?”
허를 찌르는 원자바오의 물음.
“…….”
측근 비서가 입을 다물었다.
어느 순간 공청단은 정치 뒷전으로 밀려났다.
“장립이 나타나자마자 사건이 터졌네. 그렇다면 지금 왕정의 목을 치는 데 어느 정도 관여가 돼 있다는 걸 의미해.”
콧등에 걸린 안경 너머로 날카롭게 빛나는 원자바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상황을 읽어내고 있었다.
“류미 아가씨가 휘말려 자칫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더욱이 장립은 유부남입니다.”
비서가 우려를 거두지 못하고 재차 말을 이었다.
최측근이기에 가능한 충언이었다.
“뭐가 문젠가?”
“네?”
“자네는 그쪽으로 깨끗한가?”
원자바오의 직접적인 물음에 비서의 얼굴이 붉어졌다.
여기 있는 원자바오를 비롯해 대다수 고위 공산당원들은 축첩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류미를 믿게. 아니 장립을 믿게. 만약 정치에 욕심이 있었다면 한국 여자가 아니라 류미를 잡았겠지.”
재작년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류미는 제 입으로 장립을 약혼자라고 소문냈다.
그때 당시 원자바오는 류미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도리어 류미를 능숙하게 다루던 장립에게 호감이 갔다.
도리 없이 공청단은 인재가 부족한 실정이다.
그 와중에 패기 넘치던 청년 장립은 확실히 눈에 띄는 인재가 분명했다.
“지켜봐.”
“알겠습니다.”
“곧 찬바람이 불겠어…….”
원자바오는 자신도 모르게 써 내려간 글귀를 빤히 바라봤다.
‘일부당관막부만개(一夫當關萬夫莫開).’
‘한 사람의 파수병으로 능히 관문을 지켜 만 명의 적병을 막아낸다.’
비단 지금 외손녀 류미가 헤쳐나가야 할 상황이 이러했다.
‘류미야……. 네 능력을 보여다오.’
원자바오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태생부터 고위 공산당원 가문에서 나고 자란 류미.
이제는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가문을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임을 스스로 알 터였다.
***
- 지금 어디 가시는 겁니까? 으흐흐.
귀신아 침 좀 닦아라!
홍린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처음 만남부터 평범하지 않았던 류미와의 조우.
류미와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거리를 걸었다.
두 파트로 나뉜 경호원들은 우리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함께 이동했다.
류미는 다름 아닌 전직 중국 총리의 외손녀다.
아버지가 대그룹 총재이기도 하다.
고위 공산당원들과 그들 가족들이 이동하면 해당 지역 공안이 경호를 맡는 게 관례라고 들었다.
태자당은 아니지만 류미는 공청단의 핵심 주력 인사인 원자바오의 외손녀.
가문에서 투입한 것으로 보이는 여성 경호원들은 류미와 좀 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왔다.
“납치하는 거야?”
“납치? 푸하하하하하.”
류미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보면 몰라? 데이트잖아.”
“나 유부남이야.”
“유부남은 남자 아냐?”
쿨하다 못해 서늘한 반문이다.
“…….”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 오! 이 아가씨 진짜 제 스타일입니다! 움하하하하하하하.
귀신은 다시 얻은 기회라고 생각하는지 아주 방방 뛰었다.
그 모양이 한심해 고개를 내저었다.
류미의 성격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화끈했다.
비상식을 상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이 그녀에게 탑재돼 있었다.
“어디 가는데.”
공청단을 주무르고 있는 원자바오의 외손녀 류미.
이런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는 것 자체가 운명처럼 생각될 정도다.
목적지도 모른 채 그녀와 한참을 걸었다.
“배고파.”
“???”
“못 믿겠지만 새벽에 갑자기 이 동네에서만 파는 딤섬이 먹고 싶었어. 그래서 왔어.”
- 역시 클래스가 다릅니다! 클래스가!
그건 나도 인정한다.
몇조 정도는 비자금을 가볍게 깔고 살아가는 집안의 딸이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홍콩이 아니라 일본, 유럽, 미국도 문제될 게 없다.
“맛집이야?”
“당연하지. 그 집에서 만든 샤오롱바오는 생각만으로…….”
류미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못 말리는 아가씨다.
- 샤오롱바오! 제 입맛 취향과도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이 만남은 하늘이 주신 인연입니다. 형님…… 잘 부탁합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귀신의 짝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류미.
귀신아. 이 여성분이 누군 줄 아느냐?
- 귀티가 좔좔 흐르는 외모로 보아 있는 집 자식이 확실합니다!
지금 장난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넘쳐.
중국의 부익부들 중에서도 갑 오브 갑이다.
- 그래봤자 형님한테는 조족지혈이죠. 제가 만난 갑들 중에 형님이 탑입니다! 흐흐흐.
귀신이 틈새를 노리고 아부를 날렸다.
그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
류미의 아버지 류평이 중국 10대 부호이긴 하지만 전혀 부럽지 않다.
기껏 해봐야 비자금으로 쌓아놓은 자금이 수십조 정도 수준일 것이다.
“여기야!”
류미가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맛집.
홍콩 중심가의 골목 안쪽 길에 위치한 허름한 장소였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쉽게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공간이다.
소미(小味)라는 낡고 오래된 간판이 눈에 띄었다.
미슐랭 맛집 정도 될 줄 알았더니 의외다.
“여기 할머니 손맛이 환상이야.”
“집에 요리사들 있잖아.”
“손맛이 달라. 그리고 맛집은 찾아가서 먹어야 제맛이야.”
류미가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 그렇죠! 음식 맛은 손맛이죠!
누가 보면 류미 팬클럽 회장인 줄 알겠다.
귀신은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류미의 찐 팬이 됐다.
“일단 먹어보고.”
맛이 궁금하기는 했다.
집안에 대단한 요리사들이 상주하고 있을 텐데 그걸 마다하고 류미가 찾아올 정도의 맛집.
최근 들어 바깥에서 내 미각을 충족시킬 만한 요리들을 맛보기 힘들었다.
먹는 요리들의 레벨이 높아지자 그에 따른 부작용이 발생한 것이다.
“나에게 감사해야 할 거야. 이곳은 동네 주민들만 아는 맛집이거든.”
다 좋은데 이제 팔짱은 좀 풀지?
류미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욱 힘을 주고 팔짱을 단단히 했다.
- 좋으면서 왜 그러십니까. 음양의 이치가 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
나에게 느껴지는 감촉이 그대로 전달되면서 귀신은 흡사 성자 모드가 됐다.
그렇게 우리는 딤섬 맛집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경호원들은 밖에서 대기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손님은 없었다.
허름한 탁자 세 개와 의자 몇 개가 전부다.
벽에 붙은 누렇게 변한 나무 메뉴판에는 ‘소룡포’라고만 적혀 있다.
“앉아.”
류미가 덥석 자리에 앉았다.
의외로 털털한 있는 집 아가씨.
덜덜거리며 20년 이상은 족히 되어 보이는 에어컨이 열심히 돌아갔다.
주인장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느낌은…….
- 그런데…… 이 집 뭔가 이상합니다.
귀신도 이제야 뭘 느낀 모양이다.
평범한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못한 공간의 분위기.
“할머니!!!”
류미가 힘차게 주인장을 불렀다.
“누가 왔어?”
가게 안쪽에서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대답.
쭈삣 머리카락이 저절로 섰다.
자박자박.
신발을 끌고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주인장 할머니.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헛!!!”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