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0장.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2).
파르르.
죽은 듯 누워있는 여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잠은 진작 깼다.
남자가 떠나던 순간 이미 잠에서 깨어났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젯밤처럼 긴 밤은 처음 보냈다.
와인 한 잔과 곁들여진 몇 가지의 이야기.
그리고 또다시 이어진 와인과 옛이야기들이 채운 시간.
알코올이 주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지금껏 감춰두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다 풀어놓았다.
비밀처럼 봉인돼 있던 기억들이었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과 갑자기 찾아온 불행, 그리고 왕정을 만난 이후의 인생과 지금까지 겪었던 비사들까지 전부 쏟아져 나왔다.
남자는 천천히 풀어놓는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어떤 말도 필요 없이 그 모습 하나면 됐다.
흐른 세월에 대한 맞장구를 쳐주는 고갯짓 한 번에 얼어 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삼십대 여인의 인생사가 그렇게 확인되었다.
무엇보다 마음이 통했다.
굳이 몸을 섞지 않아도 서로의 감정이 올올이 전달됐다.
이 나이가 되도록 자신이 알고 습득해 왔던 생존방식에 실금을 남겼다.
그간 고수해 왔던 삶에 대한 생각은 커다란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미모의 여성을 거부하는 남자.
관심 없는 듯 피부 탄력을 운운하며 놀려댔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지금도 밖에 나가면 자신보다 눈에 띄는 미녀는 드물었다.
“하아.”
짧은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지만 자신을 들어 올리던 그 남자의 손길과 감촉이 꿈결처럼 남아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목을 감았던 손길에 전해진 그의 체온.
사르르.
지난 밤의 여운을 떠올리는 여인의 얼굴에 홍조가 깃들었다.
소녀 시절 누구나 한 번쯤 품었던 환상 같은 밤이 실현된 짧은 순간이었다.
스르릇.
그제야 홍린이 눈을 떴다.
그녀의 두 눈이 샛별처럼 맑게 반짝였다.
어제까지의 자신은 죽고 지금 막 새로 태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까지 시원했다.
신께 고해성사한 뒤 온갖 죄에 대한 사함을 받은 것 같은 새로운 인생의 아침.
“장립…….”
그가 남겼던 체취가 집안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가볍고 부드럽게 웃던 그의 웃음이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듯했다.
스으윽.
자리에서 일어나는 홍린이 창가로 다가갔다.
촤라라라라랏.
먼저 두터운 커튼을 옆으로 밀쳤다.
맑은 홍콩의 하늘과 빅토리아 항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살아서 다가오는 풍경.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저토록 아름다운 풍경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겹게 오가는 배들과 불이 꺼지지 않는 불야성의 세상은 그녀와 상관없는 딴 세상 같았다.
왕정에 빌붙어 살아남기 위해 매일매일 머리 터지게 자신을 괴롭히는 일을 거듭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달랐다.
홍린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간 장립.
앞으로 그가 홍린의 단단한 배경이 돼 줄 것이다.
“후회하지 않을게……. 죽어도.”
단 하루를 살아도 청명한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 자유롭게 부는 바람처럼 살고 싶었던 홍린.
자신을 옥죄던 단단한 운명의 그물에서 완전히 해방된 물고기가 된 기분이 들었다.
라라라라라~♫.
스마트폰 벨소리가 들렸다.
왕정이다.
그의 지정 벨로 저장된 멜로디.
홍린이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다른 때 같았다면 바로 가식적인 웃음기를 머금고 그의 전화를 받았겠지만 오늘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전혀 두렵지 않다.
이렇다 할 감정적 동요도 일지 않았다.
띠릭.
가볍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 호오오오옹린!!!
역시 으르렁거리는 거친 늑대의 사나운 목소리가 터졌다.
“귀 아파요. 소리치지 말아주세요.”
- 뭐, 뭐라고?
홍린의 반응에 왕정은 몹시 당황했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혼린은 시치미를 뚝 떼며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장립이 지난 밤 지금의 상황을 이미 예견했다.
아침이 밝으면 왕정에게 폭풍이 불어 닥칠 거라고 말이다.
- 그놈 어딨어?
“누구요?”
- 누구긴 누구야! 너와 밤새 같이 있던 새끼!!!
왕정의 상태로 보아 그는 지금 분풀이 대상이 필요했다.
버럭버럭 목청을 높였다.
“립 말하는 거예요?”
홍린은 여유 있는 모습으로 피식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
- 리이이입?
다정한 음성으로 립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왕정이 다시 다그쳐왔다.
“보고 안 들어갔어요? 이곳에서 밤을 보내고 나갔는데.”
마치 놀리는 듯한 홍린의 가볍고 유쾌한 목소리.
홍린이 심리적 우위를 차지했다.
과거라면 감히 입 밖에 낼 수도, 보일 수도 없는 말과 태도였다.
- 네가……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널 갈아서…… 개밥으로 던져주겠다.
왕정이 겨우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야차처럼 차가워진 그의 음성.
얼마 전까지 살을 섞던 자가 뱉을 말이 아니었다.
‘내가 이런 자에게 그동안 복종했다니.’
주저 없이 자신을 죽여 개밥으로 던지겠다고 호언하는 왕정.
홍린의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갑게 변했다.
“지금 나를 처분하는 일이 급한 것 같지 않은데……. 여유가 넘치시네요. 후훗.”
속내를 감추지 않고 대놓고 비웃는 홍린.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다리를 스스로 끊어버렸다.
- ……그놈이 말해주더냐.
왕정이 이를 갈며 물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네.”
홍린도 말을 놓았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사내였다.
- 배신의 대가는…… 국화꽃다발과 함께 보내주지.
“누가 먼저 꽃다발을 받을지 모르겠네.”
홍린도 끝까지 지지 않고 응대했다.
-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듣고 있던 왕정이 미친 듯 광소를 터트렸다.
띠릭.
그리고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통화.
“하아아아아아.”
끊어진 전화기를 들고 홍린이 긴 숨을 내뱉었다.
지긋지긋하게 자신의 삶을 지배해 왔던 왕정과의 인연.
이제 남은 건 배신을 주고받은 자들끼리 나눠야 할 진검승부밖에 없었다.
“립. 난 당신한테 올인했어. 이제…… 날 지켜줘.”
홍린은 단단해진 눈빛으로 멀리 보이는 홍콩 도심을 응시했다.
그곳 어딘가를 걷고 있을 장립에게 모든 걸 던진 상무위원 왕정의 첩 홍린.
휘리리리리링.
창문 틈새를 타고 들어온 거친 바닷바람이 홍린의 집안을 짧게 휘젓고 사라졌다.
***
- 리이이입?
귀신이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
그 심정 나도 마찬가지다.
홍린의 집에서 나와 잠깐 걸었을 뿐인데 그사이에 맞닥뜨린 인연.
“립 맞지?”
커다란 선글라스를 벗으며 재차 확인해 오는 여인.
“류미…….”
첫 만남부터 강렬했던 류미였다.
람씨성 스포츠카로 날 받아 죽이려던 그 아찔했던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당시 사과의 의미로 현찰 뭉치와 차 한 대를 선물하겠다던 그녀.
포스는 여전하다.
강렬함의 상징인 붉은 치파오 차림과 뾰족 구두 대신 오늘은 편안한 운동화에 짧은 반바지 차림이다.
상의도 시원한 탑 브라 차림.
몸매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늘씬했다.
눈꼬리가 상큼하게 치켜 올라간 중국 미녀.
놀란 듯한 두 눈에는 반가움이 가득 담겼다.
- 류미? 이 미녀분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아니 형님은 가는 데마다……. 정체가 뭡니까?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미녀들 모두가 형님과 인연 있는 건 아니죠?
본인 입으로 빈익빈 부익부를 설파하던 귀신이 도리어 묻는다.
나도 이 상황은 예상 밖이다.
홍콩 거리에서 류미를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좋아?”
느닷없이 류미가 물었다.
“???”
반가운 기색은 금세 사라지고 삐친 듯한 표정으로 바뀌는 류미의 얼굴.
뜬금없는 질문과 상황 전개에 류미의 다음 반응이 궁금해졌다.
“나와 약혼해 놓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 립 당신 전문 사기꾼이야?”
- 야, 약혼! 아니 형님 약혼 빙자로 사기도 치셨어요?
귀신이 진짜 나쁜 놈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날 쏘아 봤다.
솔직히 어이가 가출하기 일보 직전의 심정이다.
이 일은 베이다이허에서 본인이 먼저 내뱉은 말이다.
이광이라는 놈에게서 날 보호하겠다는 마음으로 멋대로 내뱉은 말.
잠시 이런저런 얘기가 더해져 소문이 돌았지만 그 이후 류미와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
그랬던 일이 그녀에게는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류미. 당시에 그 말은…….”
“내가 그만큼 널 좋아했는데 그런 눈치도 없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는 거야?”
아닌 게 아니라 류미의 눈빛에 담긴 감정선이 분노에서 처량함으로 바뀌었다.
- 와아! 진짜 나쁜 놈이네! 어떻게 약혼한 여자를 놔두고 장가를 갑니까? 양심은 어디다 놓고 사시는 겁니까?
작정하고 지난밤 일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고 덤비는 귀신.
건수를 잡은 듯 아주 나를 파렴치한으로 몰아갔다.
“하아.”
짧은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이른 아침부터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홍콩에 오자마자 폭죽 터지듯 터지는 여난.
아직 하루밖에 안 됐는데 폭풍이 되어 날 집어삼킬 듯 닥쳐왔다.
“이해해 줄게.”
이해? 갑자기 뭘?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나도 가끔 흔들릴 때가 있으니까.”
“…….”
저기 류미.
당신이 내 조강지처도 아니고 뭘 이해해!
- 이분은 완전 쿨하시네. 딱 내가 원하던 스타일!
됐어! 치마만 두르면 환장하는 귀신 주제에!
- 무슨 소립니까! 저도 볼 건 다 보고 따질 건 다 따지는 계산적인 남자라구요!
네가 남자? 그냥 귀신이지.
대낮에 만난 낮도깨비 같은 류미.
“저 남자 바람둥이인가 봐!”
“약혼잔데 여자가 용서해 준다는 거 같지?”
“……요즘 같은 세상에 저런 여자도 있어?”
“여자가 아깝네.”
눈에 확 띄는 류미와 나의 대화에 이를 몰래 듣던 이들이 수군거렸다.
절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졸지에 바람 핀 약혼자가 됐다.
은근슬쩍 스마트폰까지 꺼내는 이들도 보였다.
여기 더 서 있다가는 강제 증거를 남기게 될 것 같았다.
한창 평온하고 행복한 임성철 회장의 가정을 깨뜨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처저적.
그때 일단의 남자들이 나타나 스마트폰을 꺼내는 이들을 막아섰다.
“뭐에요?”
“지금 당신들…….”
사람들이 얼굴을 붉히며 따졌다.
스윽.
그때 남자들이 신분증을 내보였다.
“고, 공안!”
“!!!”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던 이들이 크게 당황했다.
“우리 대화가 필요해.”
대화?
“나 당신에게 할 얘기가 많아. 그리고…….”
스으윽.
갑자기 바짝 다가오는 류미.
말릴 사이도 없이 팔짱을 걸었다.
그 순간 팔꿈치에 뭉클하게 느껴지는 낯선 감촉과 뜨거운 열기.
- 흐흐흐흐흐……. 역시 뭐든지 넘치는 게 좋아.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