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6장. 반간계(反間計)(2).
“정말 대단해요. 이곳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정말 황홀해요.”
LA타임즈의 로라 질트는 진심으로 탄복했다.
대형 신문사에 적을 두고 있지만 그녀는 아직 한창 젊은 여성이다.
오늘처럼 상류층 파티에 초대받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 자리도 주변 인맥을 통해 어렵게 참석했다.
파티 주최자인 다니엘 장이라는 남자의 정체가 궁금했던 터였다.
소문에 의하면 자기보다 어린 동양인 청년이 단시간에 미국 상류층에 입성했고 그들 사이에 심심치 않게 회자됐다.
아직은 대부분 쉬쉬하는 분위기지만 현실은 상류층 인사치고 다니엘 장을 모르는 이들이 드물었다.
소문에 불과하지만 미국 대통령과 직통으로 통화할 수 있는 남자라 했다.
월가의 전설 로버트 라이언의 핵심 파트너인 것도 한몫했다.
뿐만 아니라 음악계에서는 베토벤 재림자로 불릴 만큼 대단한 아티스트로 알려져 있다.
‘멋있어.’
작심하고 다니엘을 유혹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미모를 적극 활용할 줄 알게 된 로라 질트.
트럼프 파티에서 겨우 눈인사 한 번 나눈 게 다였다.
그때 다니엘에게서 후광을 봤다.
고등학교 시절 만났던 근육만 우락부락한 럭비부 주장의 후광과 달랐다.
동양인치고 꽤 큰 키에 잘 다져진 몸매.
완벽한 영어와 넘치는 유머, 그리고 박식함까지.
파티에 참석한 여인들이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유혹의 씨앗을 뿌려 다니엘과 비밀 공간에서 대화를 나눴다.
와이너리 건물 최상층.
파티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둠이 깊숙이 침투한 평원에 자리 잡은 중세풍의 와이너리.
불빛 사이로 욕망에 충실한 인간들이 술을 마시며 자신을 어필하느라 바빴다.
그중에 가장 큰 행운을 움켜잡은 로라 질트.
스윽.
옆에 선 다니엘이 충분히 의식할 수 있도록 왼손으로 제 머리칼을 넘겼다.
남자를 유혹할 때 사용하는 은은하지만 치명적인 향수도 뿌렸다.
상당한 금액을 지불한 고가의 제품이다.
시중에 널린 싸구려 페르몬 향수 따위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수제로 작업한 명품.
가끔 사용하지만 그 효과는 100%.
마음에 든다 싶은 남자들 모두 그녀의 유혹에 넘어왔다.
오늘 드레스 코드도 마음에 들었다.
은근히 몸을 감싸면서도 드러날 곳은 확실히 드러난 모양의 과감한 드레스는 늘씬하고 육감적인 로라 질트의 강점을 그대로 나타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다니엘의 목소리는 아직 담담했다.
자중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아직은 아니란 말이지……. 훗.’
로라 질트는 승리를 확신했다.
프라이빗한 이 공간은 공개된 다른 장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바깥에서는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집주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은밀한 공간.
다니엘이 자신을 향한 욕망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와인 맛이 달콤해요.”
은은한 빛깔이 붉은 장미 같은 와인.
로라가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목소리까지 촉촉하게 젖어드는 듯했다.
여인의 진한 향기와 한 잔의 술.
조건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와이너리에서 제조된 와인들 중에서도 최상품입니다.”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눈을 마주쳤다.
로라 질트는 입가에 가볍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소리 없이 분위기로 전했다.
“그 최상품에…… 당신도 포함되지 않을까요.”
너무 끈적거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담백하지도 않은 음색을 만들어 냈다.
싸구려로 자신을 풀어헤쳐 버리지 않는 로라 질트.
“나보다 로라가 그 말에 더 어울리는 것 같군요.”
다니엘의 눈동자에 욕망의 불꽃이 살살 타오르는 게 보였다.
“정말요?”
로라가 기쁜 듯 배시시 웃었다.
밀당이 수준급 이상이다.
“오늘 밤 당신은 이곳의 비너스입니다.”
‘뭐야? 다니엘 이 남자 쉽지 않다더니.’
직업이 기자인 그녀에게 소문은 그만큼 빠르게 전해졌다.
뭇 여성들과 몇 마디 이상 말을 나누지 않는다고 전해졌던 다니엘.
또 항상 주변에 대단한 미녀들이 포진해 있어 웬만해서는 접근하기 어렵다고도 했다.
그러나 오늘 확인해 보니 그렇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로라 질트와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찌리릿.
이미 악수했을 때부터 감지됐던 욕망의 에너지.
마지막 한 방이 필요한 순간이다.
“그 칭찬……. 진짜 제가 받아도 되는 거 맞죠?”
로라 질트가 와인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큰 눈에 끼를 담아 그에게 적극적인 신호를 보냈다.
사박.
다니엘 가까이 한 발자국 다가갔다.
본격적으로 눈에 욕망을 내비치는 다니엘.
그의 손길이 로라를 향해 다가왔다.
‘끝났어!’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로라 질트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잘 알았다.
스륵.
볼에 느껴지는 다니엘의 손길.
뜨거웠다.
“하아아…….”
로라 질트가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오는 다니엘의 얼굴.
분위기를 더하기 위해 로라 질트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만나본 남자들 대부분이 키스할 때 눈 감기를 원했다.
입술에 느껴지는 다니엘의 뜨거운 숨결.
‘후훗.’
로라 질트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때.
“윽!”
갑자기 다니엘이 고통에 찬 신음을 터트렸다.
“???”
황급히 눈을 뜬 로라.
“다……니엘!!!”
방금 전까지 욕망을 불태우던 다니엘.
갑자기 그가 얼굴이 핼쑥해진 상태로 심장을 부여잡았다.
급성 심장 마비라도 일으킨 듯한 반응이다.
“장태산……. 이 나쁜 노오오오옴!!!”
다니엘이 심장을 움켜쥔 채 눈알을 뒤집고 하늘을 향해 뭐라고 소리쳤다.
마치 누군가를 원망하는 듯한 느낌의 한국어로 말이다.
***
- 동업자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 어둠의 카르마 포인트를 선물 받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귀에 들려온 알림음.
동업자라는 말에 한 남자를 떠올렸다.
- 어둠의 카르마 포인트? 형님 이 포인트는 뭐죠?
삼인행 동맹 소속 귀신이 어둠의 포인트를 받고 어리둥절했다.
후훗.
헛웃음이 나왔다.
예상대로 임성철 회장이 사고를 친 모양이다.
평소 버릇 개 못 준다.
아무리 임성철 회장이 깨달음을 얻고 쌍둥이 아빠가 되었어도 남자는 본래 유혹에 약한 법이다.
임성철 회장도 나름 조심했겠지만 파티에 참석했을 미녀들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적당히 보고 즐기면 될 테지만 그 이상의 행동을 하게 되면 발동되는 저주를 몸에 걸어 놨다.
나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몸을 놀리다가는…….
“허수아비의 심장…….”
홍린의 눈동자가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그녀가 들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심장과 당신의 미래. 이 정도 돼야 거래 조건이 맞다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난 투자가다.
남지 않는 사업에 투자하는 건 질색이다.
홍린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누구보다 난 신사다.
- 상습범이네요.
뭐가?
귀신이 갑자기 내 옆으로 다가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 여심을 훔치다 말고 이제는 상습 협박까지……. 그런데 당하는 입장에서는 따라올 수밖에 없는 큰 그림. 진짜 형님……. 존경합니다!
귀신이 이제야 내가 말한 그림을 읽어냈다.
홍린과의 인연이 얕지 않았다.
암암리에 그녀의 도움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기회도 갖지 못하고 팽개쳐지는 걸 보는 건 양심에 찔렸다.
물론 선택은 온전히 자신의 몫.
홍린이 빠져도 판은 커지고 스스로 굴러갈 것이다.
“호호호호 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
갑자기 홍린이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트렸다.
- 미……친 거 아니에요?
섬뜩하기까지 한 광소에 귀신이 바짝 쫄았다.
별거 아니다.
심장에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표출되는 과정이다.
가만히 홍린을 바라봤다.
“동생. 진짜 대단해.”
눈물까지 흘리며 웃던 홍린이 고개를 내저으며 나를 쳐다봤다.
한결 개운해진 표정이 결단을 내렸음을 말해줬다.
“누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정이 홍린 같은 인물이었다면 상대하기 껄끄러웠을 것이다.
중국 고위 공산당원들보다 더 전략적이고 계산적인 홍린.
“칼자루를 쥐고도 살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줄게.”
홍린은 쿨했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어차피 구멍 난 배였어.”
꿀꺽.
홍린은 격식을 버리고 와인을 단숨에 비웠다.
쪼로로록.
다시 잔을 채웠다.
“왕을 설득할 자신 있어?”
“솔직히 허수아비의 심장은 필요 없습니다. 왕에게 바칠 공물은 저에게도 넘칩니다.”
왕정은 장택민에게 그저 그런 하수인들 중 하나다.
상무위원이야 다른 자를 세우면 그만.
다만 명분과 자존심 문제가 남을 뿐이다.
그 감정을 대체해 줄 대가만 충분하다면 허수아비 교체는 쉬웠다.
“날 위한 거야?”
“네.”
빠른 대답에 지그시 날 보는 홍린.
“왜?”
스으윽.
그녀가 상체를 기울여 나에게 다가왔다.
코끝을 타고 폐부 속으로 들어오는 진한 유혹의 향기.
- 꾸우우울꺽.
귀신이 또 김칫국을 마셨다.
“동업자니까.”
홍콩에 투자 법인을 세워뒀다.
홍린도 투자자 중 한 명이다.
“약해. 평생 주인의 심장을 판 배신자로 살아야 하는데……. 좀 다른 이유 없어?”
상큼하게 눈초리를 세우며 붉은 입술을 나풀거리는 요부.
직접적인 유혹이다.
- 혀, 형님! 이번에는 노 빠꾸!!!
“다른 이유가 필요할까요?”
“동생, 여자는 말이야. 때로는 큼지막한 다이아반지보다 달콤한 말에 목숨을 걸 때가 있어. 남들이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그저 그런 통속적인 말.”
- 빨리 말해주세요! 그거 돈도 안 드는 말이잖아요!
“조건입니까?”
“나도 동생을 믿을 만한 끈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허수아비 대신 날 지켜줄 그 무엇 하나쯤은 필요한데…….”
묘하게 말을 끊는 홍린.
이 여자 진짜 고수다.
스윽.
홍린의 얼굴 가까이 나의 얼굴을 가져갔다.
서로의 숨결이 맞교환됐다.
몹시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치는 눈빛.
“누님이 원하신다면…… 드려야죠.”
말과 함께 천천히 내 손이 움직였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