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장. 작업의 정석.
“위험하지 않을까?”
“……기회가 좋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자칫 불똥이 우리한테 튈 수가 있어.”
“장립이 나선다면 장 주석도 명분이 희석될 겁니다.”
“왕정이라…….”
장립은 자리를 떴다.
입회를 명확하게 거절한 장립이 부탁조의 조건을 내걸었다.
왕정을 치우겠다 선언한 장립.
남겨진 장문량과 리장창은 고심에 빠졌다.
장립의 요구는 말처럼 들어주기 쉬운 문제가 아니다.
왕정이 눈에 거슬리는 건 사실이지만 아직은 그를 치울 때가 아니다.
시 주석이 권력을 잡았어도 중국의 오래된 정치 관습이라는 게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지금이야 누가 봐도 시 주석과 태자당의 세월이 분명했지만 이 영광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누구도 단언할 수 없었다.
권력을 잡은 주인이 하루아침에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런 순간에 최소한의 버팀목이 될 수 있는 게 상대 세력에 대한 배려였다.
아무리 적대적인 관계였다 해도 상대의 핵심 인물은 남겨두는 것이 중국 공산당이 정한 최소한의 예의이고 규칙이었다.
막말로 고위 공산당원들은 감옥에 투옥되어서도 밖에서와같이 귀족처럼 지낸다.
전용 요리사에 장원 같은 넓은 생활공간, 비서와 여자까지 들여놓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다만 대내외적인 공식 석상에서 모습이 사라질 뿐.
왕정은 상해방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을 치워 버리면 진짜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지켜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틀 동안에 가능할까?”
“장립이라면……. 그리 만들 수도 있습니다.”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니고?”
“베이다이허에서 보였던 놈의 정치적 술수는 가히 우리 이상입니다. 오늘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으음…….”
장문량이 묵직한 신음을 흘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냉정하게 각자의 계략에서 그에게 밀렸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장립의 손에 놀아났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안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장립이 총대를 멘다면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코를 풀 수 있다.
게다가 왕정은 상해시 서기다.
중국 거점 대도시 중 하나인 상해시.
그를 치우고 상해시를 득할 수 있다면 이로써 얻는 전략적 이점은 엄청났다.
상해방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그곳에 태자당 쪽 서기를 임명할 수 있다면 장택민 주석의 힘은 그만큼 반감될 것이다.
“꼭 왕정의 목이 날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손에 이미 떡이 두 개나 들어왔습니다.”
리장창이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장 주석의 역린을 건들면 장립도 날아갈 수 있습니다.”
“제 꾀에 다칠 수도 있겠지.”
장문량이 동감하는 의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장택민 주석이 어떤 인물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실제로 수십 년간 뒤에서 중국을 통치해 온 절대자.
사리사욕을 위한 권력만 탐하는 머저리 같은 정치인이 아니었다.
“왕정은 장 주석의 허수아비입니다. 아무리 장립이 장 주석의 관심을 듬뿍 받고 있다 하더라도 용서받기 힘들 겁니다.”
“……명분에 있어서 희생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이 흐름대로 간다면 도리어 장택민이 장립을 칠 게 확실합니다.”
“그럼…….”
“칼자루가 우리 쪽에 넘어온다면 다시 계산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리장창의 눈동자가 사특하게 빛났다.
“당연한 얘기지. 물건값이 떨어지면 흥정은 다시 해야지.”
장문량이 흡족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장립이 자신들을 놓고 흥정해왔지만 도리어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정치는 움직이는 생물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일이 허다했다.
지금도 간간이 장택민과 손을 잡고 일 처리할 때도 있었다.
누구도 모르게 은밀한 방식으로 주고받는 중국 정치의 뒷골목.
정치에 있어 무지한 장립은 그런 진짜 정치 맛을 몰랐다.
“이제야 속이 시원하군.”
장문량이 얼마 만에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장립의 뜻대로 해주시죠.”
“그래야지. 감히 겁도 없이 왕정의 개 노릇을 한 놈들한테 사탕을 줄 수는 없지.”
중국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식품의약품감독관리총국.
한 번쯤 일벌백계를 내릴 필요가 있었다.
암암리에 뒤에서 상해방을 돕던 공무원들한테 공포를 심어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고 방법이었다.
뇌물죄로 엮어 제대로 파멸시키는 것이다.
“이제 마음 편히 마시도록 하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립에 관련한 일을 제외하고도 두 사람 사이에는 나눌 얘기들이 많았다.
천지회의 중요한 기관인 천단과 인단 단주의 회동이 아닌가.
“공청단은…….”
가볍게 술잔을 나누며 그들 입에서 흘러나오는 중국 권력에 관한 실제적 이야기들.
어느새 홍콩의 밤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
- 형님 저자들 믿어요? 제가 보기에 전혀 진실성 담보가 안 되는데.
부우우우웅.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이다.
리장창의 저택으로 택시를 불렀다.
한사코 리무진을 내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그렇게 해서 이동하고 있는 차 안.
귀신이 천지회 단주들에 대한 뒷담화를 풀었다.
답은 간단하다.
나의 뇌가 우동 사리로 가득 차는 한이 있어도 절대 안 믿는다!
- 그렇죠. 흐흐흐. 형님 연기가 워낙 진실돼 보여서 저도 깜빡 속을 뻔했습니다.
귀신의 말을 듣고 있으니 내심 흡족했다.
장문량과 리장창이 나의 말을 순순히 믿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서로 계산이 다른 조건 만남에서, 왕정이라는 공통의 먹잇감이 가운데 등장한 것뿐이다.
- 그런데 어떻게 잡을 겁니까? 상무위원이면 만만치 않은 권력잔데.
귀신도 내가 어떻게 할지 궁금한 듯 물었다.
당연히 영업 비밀이다.
-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디 있습니까!
귀신이 답답한지 서운해했다.
원래 중요한 거사는 최측근도 모르게 준비하고 실행하는 법이다.
- 칫…….
귀신이 어울리지 않게 혀를 찼다.
장립아.
오랜만에 그를 불렀다.
- 왜요.
토라진 듯 툭 쏘는 귀신.
너 작업의 정석이 무엇인지는 아느냐?
- 작업의 정석요? 갑자기 작업의 정석은 또 뭡니까?
쯧쯧.
한심해 혀를 찼다.
그리고.
도원결의 삼형제 유비, 관우, 장비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 누구인가?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얘기를 질문했다.
- 당연히 유비님이죠! 대장이 가장 중요하고 다음이 인품이나 무공이 훌륭한 관우님이시죠.
역시 귀신은 뭘 모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삼형제 중 가장 중요한 건 장비다.
- 장비요? 그 술꾼 장비요? 왜요?
귀신이 내 옆자리에 딱 붙어 앉아 그 이유를 물어왔다.
그건 직접 보면 안다.
- 아니!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입을 닫으면 어떡합니까!
오랜만에 호기심이 동했는지 귀신이 으르렁거렸다.
“도착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지갑에서 100달러 지폐를 꺼내 건넸다.
“여기 잔돈…….”
“팁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느새 도착한 홍린의 럭셔리 아파트.
- 전 이런 곳이 더 좋습니다.
홍린이 알려준 장소는 번화가에 위치했다.
그야말로 사방이 붉은 홍등 천지다.
딸깍.
택시에서 내렸다.
그 순간.
“립!!!”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붉은 치파오를 입은 늘씬한 미녀가 나를 불렀다.
덥석.
그리고 내 팔에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왜 이제 온 거야? 이 누님이 기다리다 지쳤잖아.
팔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야릇함 감촉.
시작부터 육탄공세다.
- ……헤에에.
귀신에게 촉감을 공유하자 눈이 풀리고 입이 반쯤 벌어졌다.
늦게 배운 바람질이 제대로 꽃을 피우는 중이다.
“잘 지내셨습니까?”
홍린의 팔을 굳이 뿌리치지 않았다.
다시 프로 연기모드로 전환했다.
이번 파트 제목은 ‘작업의 정석’.
“안 보는 사이 더 잘생겨진 것 같아. 유부남이 돼서 그런가? 더 늠름해진 것도 같고.”
- 유부남이면 매력이 더 떨어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귀신이 뭘 많이 모른다.
남자나 여자나 이런 작업에 공을 들일 때 가장 중요한 게 장비빨이다.
- 장비빨요? 방금 전 그 장비하고…….
말 뜻을 이해하는 듯 마는 듯 애매한 상태의 귀신.
얼굴, 키, 몸매.
아예 구체적인 답을 알려줬다.
- 허억!
귀신이 이제야 눈치 챘다.
이성 간에 제일 먼저 얼굴을 보고 다음 몸매를 눈여겨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간의 신체는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장비라 할 수 있다.
돈이 넘쳐도 장비빨이 떨어지면 지난 과거 시대와 달리 의도하는 바가 잘 먹히지 않는다.
- 와아아아아……. 이런 불공평한 세상이라니!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신체 장착 장비도 전생의 업에 따라 타고나는 게 결정된다.
고운 마음씨를 품고 아름다운 꽃이나 물건들을 신들께 공양한 자들은 그 공덕으로 이생에 훌륭한 외모를 타고 난다.
- 형님! 지금 쓰고 계신 몸뚱이가 제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전…….
차마 말을 다 뱉지 못하고 입을 닫는 귀신.
이런 외모로 왕따를 당하며 살던 과거 생이 떠오른 듯했다.
장비빨 다음에 필요한 건 돈빨과 자신감이다.
장립의 살아생전 장비는 꽤 괜찮았지만 재력과 자존감이 부족했다.
아무리 바위를 두부 자르듯 자를 대단한 명검을 소유했다 해도 겸비한 무공이 형편없으면 동네 건달에게 얻어터지는 게 이치다.
- 지금 형님. 제 앞에서 잘났다고 자체 홍보하십니까?
그렇다.
- 으으으으. 형님 진짜…….
“어서 들어가. 나 다리 아프단 말이야.”
팔짱을 낀 채 몸을 나의 팔에 밀착한 홍린에게서 농염한 체취가 훅 풍겼다.
- 흐으으으…….
그럴 때마다 귀신의 눈동자가 흐리멍덩하게 풀렸다.
이래서 귀신은 나와 게임이 안 되는 것이다.
“누님. 오늘 밤……. 각오하십시오.”
홍린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어? 어…….”
나의 선전포고에 금세 귓불이 빨개지며 당황하는 홍린.
- 형님 이건 무슨 장비빨입니까?
보면 몰라?
딱. 느낌 오잖아.
이건…… 그냥 타고난 원초적 기술이야!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