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6장. 파티의 계절(2). (1,086/1,284)

1106장. 파티의 계절(2).

“파아아아티이이???”

월가에 위치한 화려한 건물들 중에서도 가장 럭셔리하기로 소문난 사무실.

미모의 여인 사라 요한슨이 상큼하게 눈썹을 찌푸리며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아사신의 공격 때문에 한동안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달달한 마시멜로우 같은 다니엘과의 만남이 완전 악몽이 됐다.

인간이 아닌 괴물 아사신의 습격 당시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피와 살점이 바로 눈앞에서 터져 비산했다.

오랫동안 믿었던 경호원들은 순식간에 눈이 돌아가 적이 됐다.

현대 과학 수준으로도 쉽게 처리할 수 없게 된 아사신은 차일드 가문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이 모든 일이 다른 곳도 아닌 이스라엘의 주인이신 야훼의 성전에서 벌어진 대참사였다.

신의 땅이 더렵혀지고 야훼바트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

지금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길러낸 전사들이 막상 현장에서는 맥도 못 췄다.

내부에서 배신자가 발생한 탓이다.

그것도 장로급.

배신자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방계들이야 이익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지만 설마하니 내부 실권자들의 반란은 생각지도 못했다.

당연히 피의 숙청이 뒤따랐다.

아사신이나 외부 세력과 손을 잡은 사실이 확인된 장로들은 곧바로 처단당했다.

아니, 소리 없이 세상에서 지워졌다는 게 더 맞았다.

장로들과 그의 가족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박탈했다.

차일드 가문이 오늘의 위치에 오르고 그 힘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반역자들에 대한 자비 없는 처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에 대한 것보다 더한 지옥을 선사했다.

전반적인 부분들을 수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방계 쪽 정비도 마찬가지였다.

차일드 가문의 모든 조직들이 일시에 가동됐다.

그동안 방치했던 방계 쪽에 대해서도 대대적으로 감사가 벌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떠있던 별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핵심 방계인 요한슨 가문도 숨을 죽였다.

다행히 큰 사건은 없었다.

차일드 본가의 지시를 잘 따르라는 가벼운 경고 정도가 떨어졌다.

로리아나 쪽에서 손쓴 것 같았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 찾아온 잠시간의 여유.

아사신과 합작한 장로들 때문에 금융계는 난리가 났다.

누군가는 엄청나게 이득을 취했다.

한편 반대로 돈을 잃은 자들은 넘쳤다.

사라 요한슨 쪽 방계도 손해를 크게 봤다.

뒤처리에 골몰하는 사이 다니엘이 소리도 없이 미국에 왔다.

더구나 파티까지 열었다.

하지만 사라는 초청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와이너리를 파티 장소로 정하고 그곳으로 유명한 셀럽들을 초청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미녀가 다수였다.

할리우드를 비롯해 미국 사교계가 순식간에 들썩였다.

로버트 라이언과 돈독한 관계에 있는 한국인 투자자 다니엘 장.

이미 소문은 한 바퀴 쫙 퍼졌다.

초청장을 받은 이들 중심으로 SNS에 자랑하는 글이 올라왔다.

“왜 나에게는 안 보내는 거야? 생사를 같이한 동료에게…….”

사라 요한슨은 괜한 슬픔에 빠졌다.

미국에 왔으면 응당 자신과 못다 가진 시간을 보내야 마땅했다.

아사신 때문에 다니엘과의 휴가가 통째로 날아갔다.

사라에게 다니엘은 이미 운명이 됐다.

다른 이성은 눈에 1도 안 들어왔다.

그런 마음도 몰라주고 다니엘은 사라를 빼놓은 채 성대하고 화끈한 파티를 열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몇 번을 고심하는 사라 요한슨.

손이 멈칫거렸다.

연락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때.

띠링.

문자가 들어왔다.

“다니엘!”

기다리던 다니엘이 보낸 문자였다.

“???”

문자 내용을 읽어가던 사라 요한슨이 눈살을 찌푸렸다.

“……중요한 덫을 준비 중이니 기다려 달라고……. 흐음.”

알 수 없는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 같은 다니엘.

“다니엘……. 도대체 이번에 뭘 계획하는 거야?”

잠깐 사라를 지배했던 서운함이 일시에 날아갔다.

자신을 배려하고 있는 다니엘의 깊은 마음이 느껴졌다.

그 대신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문.

한번 움직이면 세상을 뒤집어 버릴 만큼의 태풍을 일으키는 다니엘.

사라 요한슨은 암호처럼 그 뜻을 알기 어려운 다니엘의 문자를 보며 온갖 상상을 다 했다.

“다니엘 몸조심해요. 당신은……. 내 인생을 밝혀줄 유일한 촛불이라구요.”

창밖을 보며 마치 다니엘을 마주하고 있는 듯 속삭이는 사라 요한슨.

낮게 깔린 진한 그리움이 그녀의 파란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선명하게 반짝였다.

***

- 누우우님? 목소리 죽입니다. 흐흐흐.

귀신이 옆에서 설레발 치며 음흉하게 웃었다.

미국에 남을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날 따라나섰다.

옆에 딱 붙어 있다 보니 사건 내막을 금세 알아챈 귀신.

화끈하게 파티를 열라 청했지만 임성철 회장이 조용하게 파티를 열리라는 것을 귀신이 알아챈 것이다.

뒤늦게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은 임성철 회장.

어느 정도 나의 요구에 장단은 맞춰주겠지만 너무 크게 일 벌일 생각은 없었다.

그런 사정을 꿰뚫고 날 선택한 귀신이다.

홍린과 통화하자 수화기에 바짝 붙었다.

부우우웅.

리장창이 보낸 리무진 차 안이다.

도청 확률은 100%.

- 립! 

역시나 무척 반가워하는 홍린.

지금쯤이면 나의 출현 소식이 그녀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잘 지내셨죠?”

- 물론이야. 동생은 별일 없어?

홍린이 능청을 떨며 안부를 물었다.

“애 키우느라 정신없었습니다.”

난 현재 누가 봐도 장립이다.

- 너무한 거 아냐? 이곳에서 나를 비롯해 뭇 여인들 가슴에 불을 질러놓고 한국 여자와 애를 낳다니…….

홍린이 질투 섞인 투정을 부렸다.

“운명이 그래서 매력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모든 게 예상대로 흘러가면 사는 게 재미없죠.”

- 호호호호. 그건 맞아.

이래봬도 홍린은 고수다.

나의 홍콩 입국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도 절대 먼저 아는 척하지 않았다.

“지금 홍콩입니다.”

- 어머! 정말?

“이제 슬슬 활동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 그래야지. 동생 재능을 썩히는 건 세상을 위해 이롭지 않아.

“오늘 저녁 시간 되십니까?”

- 지금?

“아닙니다. 중요한 분을 뵙고 찾아가겠습니다.”

- 물론이지. 아무 때나 괜찮아.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 그런데 누구…….

“아! 누님도 아시겠군요. 베이다이허에서 인연이 된 리장창 형님이십니다.”

- 리장창…….

“아시는 분입니까?”

- 무, 물론이지.

상무위원 첩인 홍린이 리장창을 모를 리 없었다.

중국에서 리장창 이름이면 나는 새가 고개를 숙일 정도는 됐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 기다리고 있을게.

띠릭.

홍린과의 통화를 끝냈다.

- 흐흐흐. 역시 우리 형님! 홍콩의 밤이 외롭지 않겠군요.

귀신이 또 김칫국을 마신다.

노바 형님과 어울리더니 모든 게 다 그쪽으로 해석이 되는 모양이다.

“후훗.”

가소로워서 웃음이 다 나왔다.

리장창의 집으로 가는 길에 펼쳐지는 홍콩의 불야성.

파티하기 딱 좋은 밤이었다.

나의 도착과 함께 상해방과 태자당은 바빠질 것이다.

조용히 육아나 하던 장립의 방문.

그간 대립하던 두 집단이 안고 있던 문제에 기폭제가 될 게 분명했다.

문제가 안 되도 되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 점을 염두하고 홍린을 이용했다.

그녀는 곧바로 왕정에게 연락할 것이다.

그리고 왕정은…….

꼬이고 꼬이다 보면 줄은 꼬일 대로 꼬여 알아서 끊어지는 법.

나름대로 대 환장 파티에 제격인 폭탄주를 제조한 셈이다.

기분이 상할 일은 없었다.

이모 덕분에 계획 이행이 좀 빨라진 것뿐이다.

끼이익.

차가 멈췄다.

“도착했습니다.”

기사가 정중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수고하셨습니다.”

딸깍.

문이 열렸다.

도청 장치가 가동되고 있을 차 안에서 내렸다.

촤르르르르르르릇.

가까운 곳에서 밤 바닷바람이 거칠게 파도를 만들어 냈다.

오랜만에 와보는 리장창의 저택.

오늘은 야밤을 틈탄 습격자가 아닌 당당한 손님 신분이다.

“들어가시죠.”

대기 중이던 경호원이 앞장을 섰다.

그전보다 경호가 강화됐다.

최신형 보안 장치를 비롯해 실력이 뛰어난 경호원들이 눈에 띄었다.

그래봤자 나에게는 허수아비 수준일 뿐이다.

저벅저벅.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전에 방문했던 생각이 났다.

클라라와 함께 들어섰던 문.

양손에 술을 들고 방문했던 과거의 일이 어제처럼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당시에 느꼈던 떨림과 기쁨이 새삼 되살아났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그 순간.

하지만 모든 게 하룻밤 꿈처럼 지나가 버리게 마련이다.

씁쓸함이 쓴 입맛을 만들어 냈다.

나도 감정에 있어서는 보통 인간일 뿐이다.

지금은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클라라.

그녀와 수줍게 대화를 나누며 들어섰던 이 공간은 아픈 상처로 묻어둘 일이었다.

- 리장창이 형님 첫사랑의 아버지라고 했죠……. 이래서 인생이 아이러니의 연속이라니까요.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될 수도 있으니.

귀신도 나와 다른 방식으로 경험했던 인생의 쓴맛.

가장 가까웠던 이들이 적으로 돌아섰을 때의 그 충격이 가장 큰 상처일 것이다.

“립!!!”

현관에 도착했다.

대기 중이던 리장창이 크게 내 이름을 불렀다.

“형님!”

가면무도회 파티가 열렸다.

리장창을 편하게 형님이라고 불렀다.

- 형님은 타고난 연기자이십니다! 

귀신이 활짝 웃으며 리장창에게 반갑게 반응하는 내 모습에 감탄을 터트렸다.

덥석.

리장창과 깊이 포옹했다.

적과의 동침에 버금가는 적과의 포옹.

내가 장태산이란 사실을 리장창이 안다면 아마 미쳐 버릴 것이다.

“그동안 별일 없으셨습니까?”

“하하하. 살 빠진 것 보게. 매일 같이 사는 게 전쟁일세.”

“저도…… 사는 게 전쟁입니다.”

“쌍둥이 아빠가 힘내야지. 미래를 이끌어 줄 중화민족의 인재들을 육성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중화민족의 인재?

이 아저씨 꿈도 야무지다.

임성철 회장의 아이들은 중화민족의 부흥이 아니라 패망을 위해 키워질 비밀 병기다.

철저하게 세뇌 교육을 시킬 것이다.

나쁜 짱개들에 대해서 단연코 부정적 인상을 남기도록 의식을 훈련시킬 것이다.

“물론입니다. 제 아이들은 민족의 부흥자로 키우겠습니다!

기필코 짱개가 아닌 대한민국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로 말이다.

“들어가지.”

“재촉하지 않아도 들어갈 생각입니다. 형님과 대작할 생각에 벌써 목이 마릅니다.”

“나도 그렇다네. 하지만 잠시 기다려주게.”

“네?”

리장창이 빙긋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의미심장한 시선이다.

“그분이 오신다고 했네.”

“네? 그분요???”

회귀의 전설 3부

파티의 계절(3).

“흐음.”

장립과 통화를 끝낸 홍린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자신이 홍콩에 도착한 사실을 알만한 이들은 모두 알고 있으리라 짐작했을 것이다.

홍린이 만나본 장립은 심계가 깊은 자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상무위원의 첩인 자신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 파벌의 핵심 라인도 파고들었다.

돈과 지략은 물론 배짱과 비밀스러운 능력까지 겸비한 자다.

그런 장립이 신호를 보냈다.

“태자당의 핵심인 리장창이 보낸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상해방 상무위원의 첩인 나한테 신호를 보냈다는 건……. 알아서 판단하라는 의미인데.”

홍린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장립과 엮이면 항상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는 언제나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

카지노에서 보였던 장립의 기발한 수 싸움이 문득 떠올랐다.

그녀가 만났던 그 어떤 남자보다 치밀했다.

일순간 뜨거워졌다 다시 또 차갑게 식는 그는 도저히 그다음 행보를 예상할 수 없는 남자였다.

“이번에는 뭘 노리는 거지?”

홍린이 답답한 듯 와인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장립과 함께 홍콩에 설립한 법인은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돌아갔다.

투자금이 수십 배 늘어난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누구도 장립과 관련한 일에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상해방과 태자당, 공청단의 보호를 받은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대일로에도 민간 투자자로 선정됐을 정도다.

암암리에 미국 측 자본도 흘러들어와 섞여 있었다.

여러 비밀 펀드 자금이다 보니 웬만해서는 추적이 불가능했다.

전반적 사정이 그러함에도 적극적으로 다른 사업에는 뛰어들지 않았던 장립이다.

얼마간 자식한테 빠져 세월을 보내던 그가 갑자기 홍콩에 나타난 것도 모를 일이다.

“느낌이 안 좋은데.”

꿀꺽.

와인을 비우며 홍린이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자신에게 연락한 이유는 말 그대로 상해방에 소식을 전하라는 의미였다.

리장창과 만나 무언가를 계획하려는 게 분명한 장립.

시간이 늦더라도 만나자고 했다.

양쪽을 다 손에 쥔 장립만이 취할 수 있는 거만한 태도였다.

“동생이 원하는 대로 일단 움직여 줄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거 잘 알 테니까…….”

고심 끝에 홍린은 마음을 정했다.

자신을 미끼로 사용한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기꺼이 그의 의도대로 움직여 볼 생각이다.

냉정해 보여도 장립은 생각보다 정이 많았다.

띠띠딕.

스마트폰을 들고 거침없이 번호를 누르는 홍린.

뚜루루루루.

신호가 갔다.

- 무슨 일이지?

오랜만에 첩이 전화를 했는데도 까칠하게 나오는 왕정.

“무슨 일은! 사업 때문에 전화했지.”

홍린도 깔끔하게 마음을 접었다.

북경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왕정에게 동정심 따위는 없었다.

처음부터 두 사람 사이는 거래로 맺어졌다.

- 사업? 요즘 분위기 안 좋은 거 몰라?

왕정이 불쑥 짜증을 냈다.

과거에는 사업을 못 벌여서 안달을 부렸는데 지금은 이것저것 정리하기도 바빴다.

“정신없이 바쁠 때지만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연락했는데…… 끊을까?”

- 뭔데?

왕정이 금방 눈치를 채고 물었다.

“그 남자가 홍콩에 왔어.”

- 누구?

“장립.”

- 뭐라고! 장립!

예상대로 왕정이 깜짝 놀랐다.

미국에서 두문불출하던 자가 갑작스럽게 홍콩에 나타났다니 반응이 그럴 만도 했다.

“지금쯤이면 리장창을 만나고 있겠네.”

- …….

금세 왕정이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오늘 밤에 나도 만날 거야.”

- 널? 왜?

“왜긴 왜야. 젊은 남녀가 만날 수도 있지.”

홍린이 서운함을 은근한 도발로 되갚았다.

보기보다 질투심이 강한 왕정이었다.

애써 유지하고 있는 평정심을 깨는 데 이만한 자극제도 없었다.

- 빌어먹을 개새끼.

아니나 다를까 왕정이 욕을 퍼부었다.

왕정은 처음부터 장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새끼는 너야!’

홍린은 속으로 왕정의 비열함을 비웃었다.

필요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더러운 욕망덩어리.

“어떻게 할까?”

- 뭘!

“장립에게 할 말 없어? 잠시 후면 우리 두 사람의 만남 소식이 베이징에 쫙 깔릴 건데.”

홍린이 짧은 순간 자신의 가치를 수직 상승시켰다.

장립의 등장으로 태풍의 씨앗이 발아됐다.

- 끙…….

왕정의 앓는 신음이 똑똑히 들렸다.

이 일뿐만 아니라 그의 사방에 사건이 널린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느닷없이 등장한 장립.

“당신이 귀찮으면 내가 알아서 할게.”

피식 입가에 조소를 머금으며 홍린이 왕정을 자극했다.

- 뭘 알아서 해!

성질을 참지 못하고 왕정이 버럭 호통을 쳤다.

‘그래 이 새끼를 믿으면 안 돼.’

홍린은 왕정과 통화하며 확실히 어떤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 노선을 정했다.

배의 키를 잡은 선장이 이딴 식이면 그 배의 운명은 뻔했다.

혼란스러울수록 마음을 다스리고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해야 하는 법.

왕정의 현재 태도로 보아 중앙 정계에서 그의 입지가 그만큼 위태롭다는 증거였다.

“그럼 어떻게 해? 만나 말아?”

- ……만나봐. 그리고 최대한 많은 걸 알아내. 그놈이 왜 갑자기 홍콩에 나타났는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알아내!

왕정이 통고하듯 명령했다.

그럴수록 홍린의 마음은 더 차갑고 싸늘하게 식어갔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는 품에 끼고 살았던 첩인 자신마저 밖으로 내모는 무정한 새끼.

“알았어……. 원하는 대로 해줄게.”

홍린이 차디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 똑바로 해. 내가 언제까지고 널 보호해 줄 거라 생각하지 마.

왕정도 덩달아 냉정한 말투로 경고의 한마디를 던졌다.

이해관계가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이제 남은 건 서로를 향한 날 선 청구서밖에 없었다.

***

그분?

리장창이 그분이라고 호칭할 만한 존재는 몇 명 없었다.

- 보통 신분은 아닌 것 같죠?

귀신도 나와 머리를 맞댔다.

“제가 아는 분입니까?”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네.”

이 양반이 지금 사람 놀리나!

열두 고개 추리 놀이도 아니고 빙긋 웃기만 하고 상대의 정체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휴전 제약만 없었다면 죽빵 한 대 날리고 싶은 면상이다.

“기대가 됩니다.”

“하하. 기대해도 되네.”

실내로 들어서지 않고 밖에서 수다를 떨었다.

곧 그분이 나타날 것만 같은 분위기.

“먼저 초청하신 손님이 계신지도 모르고 갑작스럽게 찾아와 무례를 범했습니다.”

듣기 좋은 너스레를 떨었다.

나이 먹고 고위직에 몸담고 있는 인물들일수록 대부분 격식을 중요시했다.

“형 아우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나.”

혀여영영? 아우? 푸하하하하하.

리장창은 진짜 친구와 형, 동생들의 사이를 모를 것이다.

평생 중국몽에 사로 잡혀 하나부터 열까지 계산속에서만 살아온 남자였다.

하나뿐인 딸마저 팔아먹었다면 말 다한 거다.

인간적으로는 무척 안타까운 인생이다.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동생은 나만 믿게.”

- 형님, 저 대사 어디서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니가 잘 던지는 대사잖아!

사탕에 설탕 한 번 더 뿌려 나에게 던지는 귀신의 말과 같았다.

필요한 순간에는 형님이라 부르며 영혼까지 털어 바칠 것처럼 행동하는 장립 귀신.

- 그렇죠? 와아……. 뭔지 모르지만 묘하게 기분 나쁘네요.

자신과 같은 동질의 인간 군상을 마주하자 귀신이 도리어 리장창을 흘겨봤다.

부우우웅.

그때 몇 대의 차량이 저택 앞에 나타났다.

경호 차량을 앞세우고 나타난 중국산 고급 대형 세단.

끼이익.

이내 차가 멈췄다.

“오셨군!”

리장창이 차를 확인하고 반가운 기색을 표했다.

“같이 마중 나가세.”

“넵!”

연기자 모드는 연속 진행 중이다.

리장창을 앞세우고 그의 뒤를 따랐다.

타다닥.

차에서 내린 경호원들이 사방을 경계하며 기립했다.

슈건핑 주석은 아니었다.

그가 홍콩을 방문하게 되면 정치적 문제가 발생한다.

합법적으로 반환받으며 홍콩은 정치 자유 역시 보장받기로 했다.

물론 중국 공산당은 그 약속을 오래 지키지 않는다.

내가 회귀하기 직전까지 홍콩 시민들은 자유 쟁취를 위해 몇 번의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오셨습니까!”

“하하. 자네가 초청했는데 와야지.”

“립. 인사드리게. 내가 진심을 다해 모시는 형님일세.”

그놈의 진심이 다 얼어 죽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리장창 형님의 아우 장립이라고 합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60이 가까워 보이는 초로의 남자였다.

중국인 평균 키에 덩치는 크지 않고 날렵했다.

웃고 있는 얼굴이지만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 시선이 뱀처럼 재빠르게 날 훑었다.

“오오! 자네가 장립인가? 만나서 반갑네. 장문량이라고 하네.”

장문량! 그 장문량?

- 아는 짱개입니까?

귀신이 눈치를 보며 물어왔다.

지금 만나고 있는 리장창이 나와 사이가 안 좋다는 걸 귀신도 알았다.

프랑스 출신 화교임에도 딱히 애국심이 투철하지 않은 장립.

“아! 장문량 대협이셨군요!”

“나에 대해 아는가?”

“베이다이허에서 많은 분들로부터 얘기 들었습니다. 주석께서 총애하는 제갈공명과 같은 분이라고 말입니다.”

“공명 선생과 비교하다니 너무 과하군.”

말과 달리 듣기 좋은 듯 빙그레 웃는 장문량.

속으로야 대차게 한 번 비웃었다.

중국을 암중에서 지배하고 있는 천지회의 천단 단주 장문량.

슈건핑 옆에서 모략질을 일삼는 놈이 바로 이자였다.

그가 기분이 좋은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좋냐?

장문량이 내 정체를 알면 입에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 것이다.

도도희에게 침 질질 흘리며 껄떡대던 변태 새끼 장천.

그놈이 이 장문량의 하나뿐인 외동아들이었다.

뉴욕에서 장문량 아들놈의 대가리를 손봐 줬다.

그 뒤 조용히 실려가 중국에서 장기 요양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게 마지막이었다.

장문량은 날 죽이기 위해 몇 번이나 암살자를 보내기도 했다.

도사와 살수를 보내 나를 제거하려 했던 그 철천지원수.

나의 칭찬에 속도 모르고 눈이 반달이 됐다.

“절대 과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중국몽을 위해 헌신하시는 모습에 한없는 존경심이 끓어오릅니다.”

“하하하하. 오랜만에 애국자 친구를 만났군.”

“형님은 립의 말처럼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자네까지 왜 그러는가. 어서 들어가지. 오늘 만남을 위해 내가 귀한 술을 가져왔어.”

경호원들이 술병을 들고 그를 따랐다.

“들어가시지요.”

두 사람이 먼저 앞장서서 걸었다.

호랑이 앞에서 감히 등을 보이는 어리석은 늑대 새끼 두 마리.

대가리가 참 탐나도록 한 대 갈기고 싶게 생겼다.

“립. 뭐 하나. 같이 들어가야지.”

“넵! 갑니다요.”

사람 좋은 모습으로 활짝 웃으며 뒤를 따랐다.

파티는 손님이 많을수록 좋은 법.

이번 파티도 성대한 성과를 낼 것 같다는 예감이 파팍 들었다.

회귀의 전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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