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9장. 정(情). (1,082/1,284)

1099장. 정(情).

“바비 로저스에게서 아직 연락 없나?”

“갑자기 제재가 심해져서 끼어들 수가…….”

“썅! 종간나 새끼들!”

콰앙!

덩치 큰 한 남자가 주먹으로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등 뒤로 조부와 부친의 초상화를 걸어 배경 삼고 서 있는 남자.

지구상에 몇 남지 않은 독재국가의 수장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업무 내용을 보고하던 허수용 외무상의 목이 짧아지며 자라목이 됐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연신 주르륵 흘러내렸다.

잘못 보이면 바로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

나이는 아직 어리지만 이래봬도 최고 권력자였다.

한때 자신을 물심양면 밀어주었던 고모부도 냉혹한 권력 앞에 기관총으로 갈겨버렸다.

무자비함을 정치력에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어린 독재자.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는 이미 극한 분노가 일렁였다.

“뜨거운 맛을 더 봐야 알겠지. 양코쟁이 새끼들을 바짝 조여야갔어.”

“……위원장 동지. 자중하라고 했던 중국 쪽에서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떼놈들이 뭐가 무서워? 그 승냥이 같은 놈들은 우리를 지들 식민지쯤으로 여기고 있어. 할아버지께서도 생전에 말씀하셨어. 절대 그놈들 믿지 말라고 말이야.”

얼마 전 본격적으로 정치적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김정은.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과 조선노동당 위원장, 국무위원회 위원장의 자리를 꿰찼다.

눈엣가시 같은 고모부와 그 아래로 엮여 있던 인맥들을 척살했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았던 치열한 권력 싸움이 이제 겨우 끝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걸렸다.

과감하게 정리할 자는 정리하고 손을 잡을 만한 자들은 끌어안았다.

일단 나이를 시비 삼아 무시하던 오래된 생강들부터 박살내고 권력을 움켜쥔 김정은 위원장.

권력의 핵심인 군부 지지를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정치 스타일을 완성해갔다.

과거부터 즐겨 사용했던 벼랑 끝 전술을 한 차원 더 높이 끌어 올렸다.

서울 불바다 정도 수준이 아니다.

아버지 때부터 완성 단계에 와 있던 핵무력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수시로 미사일을 날려 위세를 확인시켰다.

미국과 한국 정부를 동시에 자극했다.

그리고 미국이 강하게 터부시하는 대륙간 탄도 마사일까지 쏘아 올렸다.

인공위성 발사라고 발표했지만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 정도에서 미국이 무릎을 꿇을 줄 알았다.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 보유국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서로 죽자고 덤빌 게 아니라면 상황을 인정할 것이라 여겼다.

적당히 비핵화 협상을 진행하며 각종 제재를 풀고 경제 활성화에 집중하려고 했다.

스위스 유학을 통해 일찍부터 북한의 열악한 환경과 경제적 부족을 깨달은 김정은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사상만으로 인민의 정신까지 통제할 수 없게 됐다.

먼저 중국과의 무역으로 북한 주민들이 문물에 알게 모르게 깨어났다.

고난의 행군이 한 번 더 발생하면 정권은 무너질 것이다.

그 사태를 막기 위해 김정은으로서는 북한 발전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공산권인 중국과 베트남처럼 경제적 부흥을 일으키고 인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싶었다.

동시에 1인 절대 권력을 지킴으로써 더욱 강도 높은 독재국가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미국이 김정은이 품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남한 정부도 미국의 움직임과 같이 반응했다.

마치 당장이라도 전쟁을 불사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김정은은 판의 돌아가는 모양을 보며 자신의 패착을 깨달았다.

아버지 시절부터 내뱉어 온 서울 불바다 발언을 너무 써먹어 더 이상 말발이 먹히지 않았다.

“미국 간나새끼들이……. 전쟁을 시작할지 모릅니다.”

총정치국장 김수길이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현재로서 재래식 전력은 폭망했다.

주 전력이 1970년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북한의 현실이다.

남한이 보유한 비행기와 탱크 함선은 북한을 며칠 만에 박살내기에 충분했다.

국제 제재로 기름도 바닥을 쳤다.

전쟁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북한 상공 위에 10여 대가 넘는 인공위성이 상시 감시 체제로 돌아갔다.

거기에 더해 촘촘함을 자랑하는 항공방어망도 스텔스기의 등장으로 무력화됐다.

얼마 전 미국 스텔스 폭격기 몇 대가 북한 상공을 지나갔다.

그들이 서해에서 동해로 관통하는 사이 아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스스로 항공기 식별장치를 켤 때 서야 눈치챘다.

그때 김정은이 얼마나 노발대발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지하 벙커에서 회의 중이다.

언제 정밀 유도무기나 스텔스기로 공격당할지 몰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쫄지 말라우! 개수작질이야! 지깟놈들만 핵버튼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야! 나도 아주 큰 게 있어!”

김정은이 큰소리를 탕탕 쳤다.

아버지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계적 독재자들이 거의 다 사라졌다.

내부 반란뿐만 아니라 국제 연합군에 의해 개죽음을 당한 사례도 있었다.

그걸 똑똑히 지켜봤기에 김정은은 더욱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는 결실의 끝을 봤다.

대륙간 탄도 미사일뿐만 아니라 잠수함에도 장착할 수 있도록 소형화시켰다.

미국이 전쟁을 감행한다면 서울과 미국 대도시 하나쯤은 박살내 저승길 동무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끝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 대에서만큼은 북한 주민들도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을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원했던 이밥에 고깃국을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인민들의 낙원을 만들고 싶다.

그 때가 무척 가깝고도 멀게 생각되는 시기다.

중국과 베트남은 자본주의에 편승해 성장을 거듭하고 있지만 북한은 아직도 고난의 행군 중이다.

“……제가 그자를 접촉해 보겠습니다.”

“누구?”

“바비 로저스가 극찬하던 장태산. 그자와 연락해 보겠습니다!”

외무상 허수용이 용기를 내어 단단한 목소리로 의견을 내었다.

***

- 태산아? 아는 아줌마세요?

귀신이 바짝 다가와 목소리를 듣고는 묻는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눈치 빠른 양우석 의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 인사를 나눴다.

스르륵.

양우석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오랜만입니다.”

예상치 못한 연락이다.

한동안 잊고 살았다.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원수는 갚았지만 더 이상 주씨 집안과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동룡 주현태 회장은 아직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나와 가족을 해치려고 했다가 바보가 됐다.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몰랐다.

와이프와 아이들은 미국에서 그를 잊고 새출발했다.

그가 없이도 동룡그룹은 잘 굴러갔다.

원래 내실이 탄탄한 알짜 기업이었다.

내가 관리하고 있는 그룹들이 수혈을 해주자 빠르게 성장했다.

- 그래. 이모가 연락이 뜸했지…….

배가 달라도 이모는 이모였다.

그녀의 오빠가 바보가 된 이후로는 일체 연락이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와는 간간이 연락을 하는 듯했다.

피붙이니 그 부분까지는 관여치 않았다.

그렇게 나와는 약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조심스럽게 지내고 있던 이모 주미란.

갑자기 연락을 해왔다.

“무슨 일입니까?”

기억에도 없는 외할아버지의 핏줄.

혈연으로 엮여 있다는 생각에 매정하게 대할 수만도 없었다.

- 갑작스럽게 전화해서 미안한데……. 나 좀 만나줄 수 있니?

이모 주미란의 목소리는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왜요?”

쓸데없는 만남은 사양이다.

본론을 요구했다.

- 염치없지만 나 좀 도와주면 좋겠다…….

도와줘?

동룡제과는 현재 잘나갔다.

러시아, 중국에 이어 베트남에서도 아리아 초코파이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베트남에서는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제사상에도 올라갈 정도다.

그런 동룡제과가 나에게 도움을 청할 일은 없었다.

“흐음.”

쉽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 하아아……. 태산아. 동룡제과도 아빠의 작품이야. 그런데 짱개들이 우리를 잡아먹겠다고 난리다.

어라? 짱개?

그럼 또 얘기가 달라진다.

“지금 만날까요? 시간 어떠세요?”

- 난 괜찮아!

“마침 어머니도 서울에 와 계십니다. 주소 찍어 보내드리겠습니다.”

- 알았어! 바로 출발하마!

이래서 미워도 피붙이라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엄마도 이미 벌써 이모에 대해서는 미워하는 마음을 접었다.

이제 엄마에게는 외할아버지의 온전한 피붙이는 주미란 이모밖에 없었다.

띠릭.

통화를 끝났다.

- 저 아리아 초코파이 좋아합니다. 정 신선님은 못 드셔봤죠?

귀신이 학신 정모씨에게 그것도 자랑이라고 한마디 했다.

- 먹어봤습니다.

- 어떻게요?

- 요즘 간간이 제사상에 올라온답니다. 후생과 인연이 다 끝나지 않은 신선들이 가져와 나눠 줍니다.

- 정말요?

- 그게 바로 한국민족 특유의 정(情) 아니겠습니까.

신계에서도 먹히는 아리아 초코파이.

아무리 짝퉁 초코파이가 나와도 아리아 초코파이 맛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걸 노린다는 짱개.

정(情)이 넘치는 한민족답게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 그런데 짱개가 누굽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귀신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순간 할 말이 턱하고 막혔다.

중국인들 모두가 나쁜 건 아니었다.

15억 인구 중에 선한 심성을 소유한 이들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선동에 넘어가 중화민족이 최고라 외치며 세상의 질서를 파괴하는 다수의 인간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짱개라 부를 수밖에 없다.

***

“설란아…….”

팰튼 호텔 스위트룸.

하나밖에 없는 아빠의 피붙이가 살갑게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포악한 오빠 때문에 모든 게 어긋나 버렸던 관계.

평범한 가정이었다면 그냥저냥 대충 참고 이해하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룹이라는 허울과 그 안에서 도는 돈이 문제였다.

새엄마를 무참히 죽인 동룡 주현태.

지금은 정신병원에서 기저귀를 차고 아무것도 모르는 애처럼 살고 있다.

“언니…….”

주설란이 주미란를 불렀다.

화랑까지 찾아와 그간의 일에 대해 직접 용서를 구했다.

그 이후 아버지 기일에 맞춰 만났다.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절에서 함께 제사를 지냈다.

엄마가 잠들어 있는 산소에 가서도 고개 숙여 절했던 주미란.

주설란은 말처럼 그렇게 독하지 못했다.

성품 자체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피붙이를 용서하고도 남았다.

어린 시절 악하게 대했던 걸 모두 용서해줬다.

대가는 오빠 인생 망가진 일 하나로 충분했다.

하늘에 계신 아빠 엄마도 더 이상의 불화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란이 넌 하나도 안 늙는 것 같다? 비결이 뭐야?”

본심을 감추지 못한 주미란은 깜짝 놀랐다.

주설란도 이제 나이를 제법 먹은 중년 여인이었다.

그러나 만날 때마다 더 젊어지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스트레스 안 받고 살잖아. 애들도 잘 크고.”

“그래 그게 최고지. 우리 애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서 큰일이다. 태산이 100분 1만 따라도 소원이 없겠는데.”

“잘할 거야. 외할아버지 피를 물려받았으면.”

“그럴까?”

“그런데 이 밤에 무슨 일이야? 나까지 부르고.”

주설란도 호출을 받았다.

주씨 집안일이라고 태산이가 부쩍 신경을 썼다.

“휴우……. 미치겠다. 까딱 잘못하다가 아빠가 남겨 놓은 동룡제과를 짱개들한테 다 털리게 생겼어.”

“왜? 무슨 이유로?”

주설란도 상황이 궁금한지 다급하게 물었다.

동룡제과 하나만 주야장천 파고 있던 언니였다.

사업이 잘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짱개들한테 털린다는 등의 소리를 했다.

“중국 식품감독 총국에서 느닷없이 시비를 걸어왔어.”

“왜???”

“중국에 세운 합작 법인 공장에서 이물질이 나왔나봐. 우리 공정에서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물질인데……. 갑자기…… 하아아아.”

말을 하다 말고 긴 한숨을 내쉬는 주미란.

이마에 주름이 깊이 패었다.

“작업을 당하셨군요.”

그때 장태산이 룸으로 들어왔다.

주미란은 거의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덥석.

조카 장태산의 손을 붙잡았다.

“조카! 나 한번 살려줘라!”

회귀의 전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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