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7장. 이곳이 무릉도원입니다!
-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요? 뭐라고 하던가요.”
- 만나서 조용히 말로 해결하자고 합니다.
“쯧쯧쯧. 진작 그럴 것이지…….”
남자가 나지막이 혀를 찼다.
진작 백기를 들고 흔들었다면 이렇게까지 사건이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임 대통령 최병박처럼 조국일보 반 회장을 통해 백지 위임서를 작성해 보냈다면 부와 명예를 보장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매하기 짝이 없는 주순자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녀의 꼭두각시나 매한가지인 조근영도 마찬가지다.
되지도 않는 고집을 부리다 이번 일로 호되게 얻어터졌다.
대통령의 권력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철 피는 꽃과 다를 바 없다.
그 점에서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항복 선언도 아니고 말로 해결하자며 대화를 건네왔다.
- 어떻게 할까요?
상대 쪽에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일국의 대통령이 전해 온 전갈도 가차 없이 무시할 수 있는 남자.
“답을 정해주지 않았나요?”
남자가 조용히 그에 대한 대답을 했다.
- 아, 알겠습니다! 계획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상대는 군기가 바짝 들어간 목소리로 답했다.
두 말은 필요 없었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원하는 자들에게 자비는 사치입니다. 앞으로 회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따끔한 회초리를 들 때입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말 속에 담겨 있는 뜻은 의미심장했다.
- 회주님의 뜻대로 되실 것이옵니다.
“그래요. 내가 반 장로를 많이 믿어요.”
- 감사합니다. 회주님!
“항복도 필요 없어요.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으세요. 그리고 주순자는…… 시궁창에 처박아 버리세요.”
조곤조곤한 남자의 목소리는 살벌한 지시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 완벽하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래요. 수고해요.”
- 쉬십시오. 회주님.
통화는 끝났다.
“흐흐흐흐흐흐. 멍청한 것 같으니라고.”
생전에 남자는 주순자의 부친과 사이가 각별했다.
한때는 말을 잘 듣던 똥개였다.
조근영을 암중에서 조종하기 위해서 회주가 보낸 선물이 희대의 사기꾼 주철성이었다.
회에서 심혈을 기울여 한국인들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분란을 조장하기 위해 육성한 사이비 목사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권력에 취한 조근영의 아버지가 회의 뜻을 거역하기 시작했다.
그때 트로이 목마처럼 조근영 곁에 주철성을 보내 긴 시간을 투자해 세뇌시켰다.
세상 물정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던 공주는 예상대로 주철성의 포로가 되었다.
그즈음 사고가 터졌다.
조근영의 부친이 부하가 쏜 총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부랴부랴 새로운 군부를 물색해 쓸 만한 자를 찾아 대통령에 세웠다.
그때부터 시야에서 벗어나 잊어버리고 살았던 조근영과 주순자.
예상치 못하게 어느 시점부터 잊혀졌던 공주가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면밀히 살펴보니 쓸모가 좀 많았다.
인터넷망이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면서 정보가 쉽게 풀리자 그만큼 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머리를 쓰는 개돼지들이 많아졌다.
두고 보고만 있지 않았다.
더욱더 언론을 이용해 무지한 한국인을 세뇌시키는 데 집중했다.
리앤장의 힘으로 검찰과 법원, 공권력을 동원해 통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굴복하지 않는 자들은 없는 죄를 만들어 단죄하고 파멸시켰다.
모든 게 완벽하게 아귀가 맞아 굴러갔다.
10여 년만 지나면 대한민국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를 누리지만 정신이 썩어버린 2류 국가로 전락하게 될 터였다.
그때 예상치 못한 사건이 한 번 더 터졌다.
대한민국을 강타한 IMF.
대한민국을 휩쓴 IMF의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회에서 계획한 계획들이 크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들러리쯤으로 여겨져 왔던 자가 덜컥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뒤를 이어 엉뚱한 돈키호테가 나타나 5년 동안 대한민국의 지도자로 바통을 이었다.
회주도 예상치 못한 오만함의 대가였다.
당시 일송회 역시 내부적으로 바쁜 시기를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힘을 다 흡수하지 못한 회주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회주라 해도 전지전능할 수만은 없었다.
서둘러 대항마들을 키웠다.
모든 힘을 동원해 정권에 흠집을 내는 데 집중했다.
짧은 시간을 투자해 탄핵까지 몰아붙였다.
그 와중에 돈키호테는 기사회생했다.
도리어 일송회가 타격을 받았다.
고대했던 총선에서 보기 좋게 참패를 당했다.
그 시기에 조근영을 등판시켰다.
정치 기반이 약했던 돈키호테에게 썩은 인간들을 지지자로 투입시켰다.
그들을 통해 여기저기서 사고를 치게 만들었다.
흠집 내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돈키호테는 천성 자체가 성선설을 떠올리게 할 만큼 대놓고 사람을 잘 믿었다.
배신은 최대한 치졸하고 더럽게 진행됐다.
기다렸다는 여론이 악화됐다.
돈키호테가 퇴임 후 말년을 보내려고 하는 시골집을 아방궁 이상의 시설로 묘사했다.
모든 악화된 일들이 그의 탓으로 화살이 돌아갔다.
실력 없어 도산한 자영업자들도 냄비를 내던지며 그를 원망하는 데 목소리를 높였다.
교묘하게 세뇌당한 어리석은 자들의 삶에 대한 불만은 약속이나 한 듯 그의 탓으로 돌려졌다.
예상대로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
쓰나미처럼 몰려온 지지율 하락과 레임덕은 그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불쌍한 이들을 진정으로 섬기려 했던 선구자는 그들의 원망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계획대로 준비되어 있던 사기꾼 큰 쥐가 다음 대통령이 됐다.
뒤에서 그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던 회주는 그때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자신과 친일파 후손들에 의해 깨어나려던 대한민국의 혼불을 누르고 그 위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사이 회주는 힘을 완벽하게 얻었다.
사악한 자들의 주인이 되어 본격적으로 한민족의 혼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오대강 사업을 통해 한반도를 두 동강 내는 것부터 진행했다.
최병박을 일본 천황과 알현시켜 공개적으로 고개 숙이게 만들었다.
조국일보 회장에게도 마찬가지였고 목사에게도 복종시켰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지도자도 일본 천황 앞에서는 별것 아니라는 걸 철저하게 한국 국민들에게 각인시켰다.
타락한 언론과 지도층 인사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돈과 권력이면 후손들의 미래도 거뜬히 팔아먹을 자들이 차고 넘쳤다.
세상에 불만이 넘치는 자들을 포섭해 익명의 인터넷 전사로 키웠다
일송회의 오래된 동지인 반공 종교 지도자들도 크게 일조했다.
십알단과 공작소라는 곳을 통해 악의 씨앗들을 모아 육성해 나갔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주 유용하게 그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하고 있다.
“조센징 너희들은 안 돼……. 예수를 팔아먹은 유다 같은 자들이 사방에 깔렸다. 긴 세월 동안 뿌리내린 대 일본제국의 후손들의 피가 섞였다. 그들이 너희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2등 신민으로…… 복속하게 될 것이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서로 미워하고 싸워라! 지금처럼 쾌락과 돈에 눈멀고 양심을 팔아라! 거짓이 진실이 되고 진실은 땅바닥의 버려진 쓰레기가 되어 구를 것이다! 크하하하하하하!”
남자가 창밖을 내다보며 광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내가 너희들의…… 왕이 될 것이다! 황금관을 쓴 뱀의 왕 말이다!!!”
***
‘왕의 길……. 악당의 길!’
쿠궁!
김현재는 심장을 후려치는 장태산의 한마디에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착각에 빠져 있었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살신성인의 성인이 있어야 세상이 정화되는 법이다.
지금은 악이 꽃을 피우는 시대였다.
100년 세월 동안 감춰져 있던 친일파가 싸놓은 똥이 더 이상 묻을 곳도 없을 정도로 지천에 널렸다.
악취가 사방에 진동하고 있지만 누구도 그것을 치우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기득권이라는 이름 아래 긴 세월 핍박을 받아 저항정신마저 잃어버렸다.
도리어 쓰레기가 묻혔다고 진실을 외치는 자들을 무지한 자들이 배척하고 싫어했다.
그런 세상에서 자신이 지금 순진하게 구도자가 되어 정치나 하자고 청하고 있었다.
수신도 못 하면서 정치를 꿈꾸었던 것이다.
부르르 꽉 쥔 주먹이 떨렸다.
자신의 유약함 때문에 귀한 친구도 험한 모습으로 떠나보냈다.
피의 제단에 원망의 재물을 원하는 무지한 자들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져 주었던 친구.
조금 더 친구를 위하는 마음으로 악당의 길을 걸었다면 어쩌면 그를 지켜냈을지도 몰랐다.
순진함이 아닌 독함으로 무장했다면.
지금과 조금은 다른 세상이 열렸을 것이리라.
장태산의 모습에서 떠나버린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돈키호테처럼 무모하게 정의를 향해 도전했던 그 친구!
주르르륵.
김현재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꼭꼭 감춰두고 눌러왔던 고통이 터진 샘처럼 눈물을 쏟아냈다.
“대, 대표님…….”
양우석은 오늘 벌써 몇 차례나 당황했다.
자신은 감히 해석하지 못할 의미가 가득한 말들이 오갔다.
그런 와중에 김현재 대표가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보는 것만으로 이미 마음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스스로 악당의 길을 가겠다고 선포하는 장태산의 모습은 마치 위대한 성자처럼 보였다.
아무나 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양우석 또한 꽃길 같은 왕의 길을 걷고 싶었다.
악당의 길을 걷는 자는 욕받이로 살아갈 게 확실했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데도 장태산은 주저하지 않고 그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대표님을 울리고 보니 벌써 악당이 된 것 같습니다.”
김현재의 눈물을 보며 장태산이 농담 같은 말을 건넸다.
“아……닙니다!”
김현재는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친구가 세상을 떠나던 날 다짐했었다.
대한민국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주주의 횃불을 밝힐 때까지 함부로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 다짐을 잊고 잠시 감정이 복받쳤다.
‘저 나이에 어찌 저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웃고 있지만 김현재는 장태산의 눈동자 깊은 곳에 감춰진 삶의 지혜를 알아챘다.
희로애락의 강을 제대로 건너본 자의 시선이었다.
눈은 혼의 창이라 했던가.
악당의 길을 가겠다고 말하지만 장태산은 보통의 악당이 아니었다.
“이런 순간에 한잔하는 게 맞겠죠?”
장태산이 술병을 쥐었다.
“제가 진하게 말아보겠습니다!”
양우석이 빠르게 술병을 채갔다.
이제 맥주로는 갈증을 해소할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의원님 솜씨 한번 볼까요?”
“제가 군시절에 군단에서 운영하는 탄약창 폭발물 취급반에 있었습니다. 폭탄주 제대로 말아보겠습니다!”
“진짜요?”
“물론입니다! 한 번 마시면 앞으로 계속 제가 생각날 겁니다.”
양우석이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대표님도 콜?”
양우석이 김현재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코올!!!”
분위기는 금세 유쾌하게 살아났다.
“그럼 말아 보겠습니다.”
팅!
빈 맥주잔에 소주가 가득한 잔을 과감하게 떨어뜨리는 양우석.
치이이익.
그리고 맥주병을 몇 차례 흔들더니 분수처럼 잔에 쏟아 부었다.
거품이 빠르게 차오르며 진한 주향이 공간에 퍼졌다.
맥주와 소주가 순식간에 뒤섞였다.
“오!”
술을 자주 즐기지는 않지만 좋은 만남의 자리에 빠지지 않는 김현재가 감탄을 터트렸다.
양우석의 기술은 쉽게 볼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다 말았습니다! 한 잔들 거하게 드시죠.”
순식간에 제조된 소맥 폭탄주 석 잔.
세 사람이 함께 잔을 들었다.
“왕의 길을 위하여!”
장태산이 김현재를 향해 먼저 선창을 외쳤다.
“악당의 길을 위하여!”
김현재도 장태산을 마주보며 미소 띤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위하여!!!”
마지막으로 양우석이 추임새를 넣었다.
짱!
잔이 부딪쳤다.
벌컥벌컥.
세 사람 모두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이 잔이 오늘 만남의 막잔이라는 걸 모두 알았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
“크으.”
“큽.”
폭탄주에 소주 비율이 크다보니 쓴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오직 장태산만이 조용히 잔을 비워냈다.
“복숭아꽃 향기가 맡아집니다.”
장태산이 웃으며 뜻 모를 말을 내뱉었다.
“…….”
김현재와 양우석은 그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마지막까지 한 마디 남겨줄 것 같은 가르침을 고대하는 눈빛이다.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장태산은 오늘 이 자리에서 인생 스승과 같은 역할을 했다.
“별유천지 무릉도원이 별거겠습니까? 동천(洞天), 극락(極樂), 천당(天堂), 소유유(逍遙遊), 유토피아가 다른 곳이겠습니까?”
장태산의 입가에 그야말로 복사꽃 같은 웃음이 피어났다.
신선처럼 온몸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소박한 이들이 꿈꾸던 푸른 하늘, 은하수 돛대도 없고 삿대도 없는 하얀 쪽배를 타고 향하던, 그 서쪽 나라가 멀리 있을까요?”
장태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김현재와 양우석은 그의 말을 먹먹한 심정으로 경청했다.
마치 선승의 법단이 열리기라도 한 것처럼 상서로운 기운이 공간에 감돌았다.
“불재영산막원구(佛在靈山莫遠求), 영산지재여심두(靈山只在汝心頭)라 했습니다. 멀리 영축산에서 부처를 찾지 마라. 영산은 다만 너의 마음속에 있음이라…….”
어느 고승의 시조가 장태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공간마저 숨을 죽이는 듯했다.
가히 현생한 부처의 가르침 같았다.
“우리가 사는 이곳 이 땅이 바로 그곳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믿고 사랑하고 감사함으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곳……. 피와 땀으로 이 땅을 지켜왔던 선조들이 꿈꾸던 무릉도원……. 이곳이 바로 한민족이 살아갈 무릉도원의 텃밭입니다.”
말을 잇는 장태산의 모습은 진짜 선구자 같았다.
담담하지만 분명하게 자신이 꿈꾸는 한민족의 세상을, 그 밑그림을 완벽하게 드러냈다.
덥석.
갑자기 김현재가 장태산의 손을 뜨겁게 붙잡았다.
그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저 가슴 밑바닥부터 솟아오르는 격한 감동의 열기!
“그럽시다! 우리…… 무릉도원 멋지게 만들어 봅시다!!!”
김현재가 장태산을 바라보며 활활 타오르는 도깨비 신장 같은 눈빛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