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6장. 왕의 길, 악당의 길. (1,079/1,284)

1096장. 왕의 길, 악당의 길.

“김현재 대표가 장태산을 만난다고?”

“그렇습니다. 의원님.”

“그랬단 말이지…….”

여의도 국회회관 신관에 위치한 로열층.

창밖으로 한강이 내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의원실에서 야당의 실세인 나국찬이 비서진의 보고를 받았다.

당 대표는 아니지만 지난 총선을 통해 최대 계파의 수장이 됐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던 회색분자들이 알아서 떠났다.

야당의 발판인 호남에서 대거 당선된 저력을 보였지만 나국찬은 그 불길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진실성이 전혀 담보되지 않은 자가 현재 당 대표였다.

게다가 자기 사람들을 챙길 줄도 몰랐다.

불리해지면 먼저 눈빛이 흔들렸다.

소신도 없이 정치적 야망만 불태우는 치기 어린 자.

새로운 정치 바람을 원하는 국민들 눈에 어쩌다 잠깐 들었지만 본 모습이 곧 까발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 밑으로 줄을 서며 따라붙은 4년짜리 철새들도 입장은 마찬가지.

민주주의보다 자신들이 쥐고 흔들 권력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자들이다.

공공연히 계파나 조성하고 특정 지역에 뿌리를 내려 영원히 여의도를 떠나고 싶지 않아 하는 자들이 다수다.

기대했던 의석수가 그자들 때문에 줄어들었지만 괜찮다.

썩은 고름 같은 자들이 빠져나가는 것 자체가 당과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축복이었다.

거기에 권력에 취한 여당이 똥볼을 연속 차고 있다.

허수아비 대통령을 세워놓고 각종 이권에 심취하다 저희끼리 불협화음을 만들어 냈다.

드디어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토록 열망했던 기득권의 뿌리를 뽑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친일파와 독재 정권 하수인들이 만들어 놓은 그들만의 세상을 죽기 전에 제거하는 게 나국찬의 소원이었다.

“행보가 빠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한 수석 보좌관이 의견을 냈다.

“김현재 대표도 생각이 있겠지.”

나국찬은 김현재를 아직까지 대표라고 불렀다.

전직 당 대표이지만 여전히 그의 신분을 존중했다.

정치 후배인 동시에 대선 주자였던 김현재.

오만하다 평가받는 나국찬이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진국 민주투사였다.

“국정원이 뒤를 캘 게 확실합니다. 괜히 빌미를 줬다가 여론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그간 지독하게 뒤를 물고 괴롭혀온 국정원의 만행.

민주 쪽이 정권을 잡았을 당시에도 결국 국정원은 개혁되지 못했다.

그들 안에 깊이 뿌리박은 암세포는 오래 묵고 세가 컸다.

태생 자체가 군부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고급 정보를 받아먹을 놈이 거의 없어.”

나국찬의 눈동자가 안경 너머에서 반짝였다.

대통령은 물론 여당 실세 관계자들은 권력에 취한 나머지 오늘날 세상 돌아가는 판세를 읽지 못했다.

한 해가 지날 때마다 보수 정권을 지지하던 이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가난으로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세뇌시키기 쉬운 세대들이 그만큼의 속도로 저물어갔다.

날이 갈수록 대한민국의 유권자들 의식 수준이 높아지고 성장했다.

국민 대부분이 고등 교육을 받은 영향이다.

차고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도 기가 막히게 옥석을 가려냈다.

과거처럼 조국과 중부, 동서 일보 따위가 뱉어내는 쓰레기 기사들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한때는 사회적 선망과 성공의 기준이었던 중요 매체 기자들이 기레기라 불리며 조롱의 대상이 됐다.

대한민국 국민들을 개돼지로 보던 자들이 도리어 심판당하는 추세다.

이번 선거에서 그 원인과 결과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무자비하게 여론을 펼치며 흔들어댔지만 민낯을 들킨 언론들에 유권자들이 휩쓸리지 않았다.

결과는 야당의 대승.

여당은 충격을 받았고 사태를 수습해야 할 청와대는 기득권과 전쟁에 돌입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합니다. 놈들은 악마에게 영혼도 팔 자들입니다.”

일본 국왕을 천황으로 칭하고 생일 파티에 참석하는 넋 나간 국회의원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대학 강단에도 일본 쪽에서 흘러든 자금을 받아 연구 활동을 하는 교수들이 널렸다.

진저리칠 정도로 깊게 박혀 있는 친일파의 핏줄.

사익을 위해서 국가를 팔아먹고도 누구보다 당당했다.

“이번에는 힘들 거야.”

“네?”

“자네 장태산에 대해서 아나?”

“……요즘 사방에서 들리는 말로 뜨겁게 뜨고 있는 청년이라고 들었습니다.”

“뜨겁게 뜨는 청년?”

나국찬이 말을 곱씹으며 재차 물었다.

“자수성가해서 상당한 부를 축적한 청년 투자가로 알고 있습니다.”

‘왜 저런 시선으로 보시는 거야?’

모시는 국회의원이자 미래 공천권자인 나국찬 의원의 표정에 수석보좌관은 당황했다.

평소 무언가가 못마땅할 때 보이는 시선이었다.

“쯧쯧. 아직 멀었군.”

이내 나국찬이 혀를 찼다.

‘나이도 어린 녀석이 주식으로 떼돈을 번 게 다인데…….’

수석 보좌관이라도 보니 평소에도 나국찬을 보좌하며 필요하다 싶은 정보를 캤다.

그의 마음에 장태산을 경시하는 생각이 어느 정도 들어 있었다.

아무리 높이 쳐줘 봐야 30대도 안 되는 애송이 청년이었다.

같은 한국대 출신이고 보니 학벌에도 별 감정이 없었다.

흔히 미국에서 IT 갑부들이 쏟아지고 있다 보니 그 역시 돈을 잘 버나 싶은 정도였다.

“인정하기 싫겠지. 자네보다 한참 젊은 친구이니까.”

“그게 아니라…….”

“됐어. 나도 그랬으니까.”

나국찬이 말을 끊었다.

개인적으로 나국찬은 장태산을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을 산산이 깨뜨려준 인물이다.

담뱃값, 겨우 야당 의원, 꼰대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면전에서 내뱉었던 장태산.

정문일침의 따가운 일갈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덕분에 잃어버렸던 꿈을 되찾았다.

친일파들을 척결하고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완성을 보고 싶었던 청년 시절에 품었던 원대한 꿈.

‘김현재 대표. 장태산을 끌어들이는 게 쉽지 않을 거요.’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곁에 인재를 두고 욕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장태산은 그런 인재 수준을 넘어서는 사람이다.

아무리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해도 호락호락 장태산을 끌어들일 수 없을 걸 확신했다.

이미 장태산은 대한민국이 품을 수 있는 그릇을 넘어선 인물이었다.

“김현재 대표 일에는 신경 끄고 여당 쪽 보좌관들 쑤셔봐. 뭔가 감춰진 음모 냄새가 나…….”

나국찬은 정치 향방에 민감한 개코를 소유했다.

그의 민감한 코에 느껴지기를 여의도에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눈치 빠른 자들만 맡을 수 있는 진한 피바람 냄새.

“오늘 술자리를 잡아놨습니다.”

“아끼지 말고 퍼먹여. 그리고 반드시 알아내!”

“넵! 의원님!”

철저하게 준비한 자만이 떡을 손에 쥘 수 있는 정치판.

곳곳에서 다선 의원들이 꿈틀거렸다.

은근히 풍기고 있는 피바람은 앞으로 미래를 결정지을 엄청난 정치전쟁의 서막을 의미했다.

***

- 정치요? 와아! 형님 그럼 국회의원이나 장관 같은 사람이 되는 겁니까?

귀신이 김현재 대표의 제안을 듣고 들떠 떠들어댔다.

미리부터 김칫국을 시원하게 마셨다.

덩달아 김현재 대표도 뜨거운 시선으로 날 응시했다.

- 참여하시지요. 장 신선께서는 충분히 자격이 되십니다. 지금껏 체득하신 여러 지혜를 후손들을 위해 베풀어 주신다면 이 또한 선덕을 쌓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정치에 한이 많은 학신 정모씨도 거들고 나섰다.

돌아가는 판을 보며 양우석 의원이 적잖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당 대표도 아니고 차기 대권주자의 청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장관급까지는 아니어도 청와대 핵심 보좌관 자리 정도는 차지하게 될 것이다.

“주변에 사람은 많으나 무엇을 믿고 맡길 만한 인재가 드뭅니다. 저와 함께 이 대한민국을 위해 구도자의 길을 걸어주십시오!”

김현재 대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목소리에 담겨 있는 강력한 염원과 진심이 느껴졌다.

- 오! 구도자의 길, 그 말 좋습니다!!!

-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저런 성군을 모시고 정치를 펼 수만 있다면…….

귀신과 신선이 김현재 대표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격동했다.

물론 난…….

“싫습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장 회장님. 저도 정치가 싫습니다. 지난 숱한 세월 동안 피를 흘리며 쓰러진 동료들이 수십수백 명입니다. 변절한 자들 또한 부지기수입니다. 하지만 이 겨레와 민족을 위해서 누군가는 나서서 힘껏 싸워야 합니다. 스스로 피를 흘려 민족을 구도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사람으로 태어나 한 생 멋지게 살다 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박수를 치며 응원하고 싶은 명언이자 포부다.

하지만 난 싫다.

왜?

“그래서 싫습니다.”

“네???”

“전 대표님처럼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이가 못됩니다. 공명보다는 나와 내 가족, 내 지인이 먼저입니다. 모두를 위함보다는 사사로움을 취하고 기뻐하는 소시민에 불과합니다. 날 아프게 만드는 자에게는 몇 배의 고통을 가해야 잠을 잘 수 있는 소인배의 성격입니다. 목표한 일을 위해 가끔씩은 불법도 저지릅니다. 그런 제가 대표님과 함께 정치를 한다는 게 과연 옳은 일이겠습니까?”

솔직하게 내 자신을 깠다.

“회, 회장님.”

양우석 의원이 당황했다.

놀랄 것 하나 없다.

그를 암중에서 지원하는 것도 이 나라 법에서는 불법이었다.

“대도(大道)에 도달하는 법은 각기 다릅니다. 굳이 어울리지 않고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거추장스럽게 살 필요가 있습니까?”

반문을 던졌다.

“음…….”

낮게 신음을 흘리는 김현재 대표.

나의 대답이 다소 충격을 준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이다.

김현재 대표처럼 정의롭게 살 자신이 없다.

내 개인의 감정과 선입견, 주관적 판단으로 풍진 세상 한 번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다.

물론 양심을 잣대 삼아 최대한 불법은 지양할 생각이다.

그러나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자가 없다고 그럴 수 없는 세상이다.

세상에 도적들이 넘치는데 간디와 같은 마음으로 사는 건 어쩌면 어리석은 짓인지도 모른다.

도적이 나타나면 과감하게 칼로서 맞서 싸우고 목을 베어야 내 것을 지킬 수 있는 법이다.

이계에서 오크들을 벨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넓게 보면 오크도 신이 창조한 생명체지만 나와 주변인에게 해를 가하는 해충이나 진배없다.

악인을 위해 성인군자처럼 내 뼈와 살을 내어 줄 수는 없다.

이 나라를 좀먹는 오크 같은 놈들이 사방에 널렸다.

정공법으로는 한계가 있다.

좋은 말로 타이른다고 들을 자들이 아니다.

양심을 팔아넘긴 기생충들이 그만큼 많이 사방에서 꿈틀거렸다.

살인도 했다.

앞으로 그렇게 넘어뜨리게 될 숫자가 얼마나 더 될지 모른다.

내가 살기 위해서 먼저 뒤통수도 깠다.

깡패 새끼와 더러운 정치인, 경제인들을 향해 비수도 꽂았다.

지금도 암중에서 토착 왜구들을 처단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가장 치졸하고 더러운 놈들이 넘치는 판에서 나도 동색이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놈들보다 더 잔인하고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세상 사는 일 모두가 마찬가지다.

곳곳에 널린 악의 씨앗이 곧 싹을 틔우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놈들이 좋아하는 돈과 권력으로 검과 방패 삼아 전투에 임해야 생존이 가능했다.

그런 마당에 내가 정치를?

김현재 대표와 난 지향하는 목표는 같을지언정 걸어가야 하는 길은 달랐다.

“대표님은 대표님의 길을 가십시오. 모든 일에 사사롭지 않게 공정성을 앞세우고 정정당당하게 걸어가십시오.”

충고가 아닌 충언을 드렸다.

백두대간에 혼백을 묻고 자리 잡은 한민족 조상님들이 원하는 바였다.

김현재 대표는 나와는 다른 길로 안내되고 예비 되었다.

“장 회장님…….”

김현재 대표가 나의 말뜻을 어느 정도 깨달은 것 같다.

그의 눈시울이 붉게 변했다.

- 흐흐. 역시 형님이십니다! 악당은 악당의 길을 가야죠!

귀신이 싱겁게 초를 친다.

내가 어디를 봐서 악당이야!

- 에이……. 다 아시면서.

지금껏 내 치부라고 할 만한 것들을 옆에서 보아온 귀신.

이 순간에도 귀신은 순수한 내 영혼의 밑바닥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난 누가 뭐라고 해도…….

“왕의 길을 걸으십시오. 전 대표님이 가는 길을 예비하는 악당의 길을 가겠습니다!”

회귀의 전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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