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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장. 정치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1,078/1,284)

1095장. 정치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이번 투자 감사합니다. 회장님의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30대 중반으로 갈색 금발을 가진 잘생긴 남자가 활짝 웃었다.

방금 사인을 마친 투자 계약서에는 20억 달러가 넘는 가치가 담겨 있었다.

“멋진 계획에 투자 구미가 당겼을 뿐입니다.”

“아빈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조카를 대하듯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아빈 쿠슈너는 지금 이 순간의 일이 믿기지 않았다.

몇 년 사이 월가의 전설이 된 인물이 자신의 사업에 투자를 했다.

이자도 공짜나 다를 바 없다.

“그럼 오늘부터 아빈 자네도 로버트라고 불러주게.”

“알겠습니다. 로버트.”

‘좋았어!’

아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신화에 가까운 천재 투자자와 인맥을 다졌다.

사업에 엄청난 도움이 되리란 건 당연했다.

몇 번의 만남 뒤에 받게 된 거액의 투자.

이 자금으로 거지 같은 세입자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번듯한 빌딩을 세워도 될 것 같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걱정 마십시오! 로버트는 장인어른이 백악관에 입성하는 날부터 제1순위 고객이 될 겁니다.”

아빈 쿠슈너도 나름대로 사업수완이 좋았다.

내세울 것 없던 그가 월가 거물에게 투자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장인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아빈도 장인 트럼프의 대선 출마를 극구 말렸다.

괜히 프로 정치가들한테 찍혀 감옥에 갈 수도 있었다.

장인을 말리는 데 아내까지 동원했다.

그럼에도 고개를 내젓던 트럼프.

반쯤 포기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장인이 정치판에 돌풍을 일으켰다.

특히 기득권 정당에 질려버린 미국 백인층이 열렬히 트럼프를 지지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빈 쿠슈너는 확신했다.

신드롬에 불과하다며 남들은 절대 아니라고 말하지만 이대로라면 장인이 백악관의 주인이 될 것 같았다.

“그 마음 변치 말기를 바라네.”

“제가 신용의 아빈이라고도 불립니다. 마음 놓으십시오.”

아빈 쿠슈너는 미래를 기대하며 호언장담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럽 유대인 가문의 후손인 아빈 쿠슈너.

가문은 2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부동산과 고리사채로 짭짤하게 돈을 벌었다.

전쟁이 터지기 전, 선견지명이 뛰어났던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가문 성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 덕분에 동부 폴란드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공산당이 지배하는 소련 점령지에서는 과거의 영화를 누릴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과감하게 미국으로 이민 왔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성공했다.

부동산을 보는 탁월한 식견과 동부 유대인의 악착같은 근면성을 겸비했던 할아버지.

동시에 인정사정없는 냉혈함으로 단시간에 과거의 부를 뛰어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런 조상의 차가운 피를 이어받은 아빈 쿠슈너다.

일찍부터 부동산업에 뛰어들었다.

하버드에는 기부 입학했다.

학벌을 세탁한 뒤 대형 부동산 전문 업자가 됐다.

한창 위명을 떨치고 있을 때 트럼프가 자신의 딸에게 그를 소개했다.

악당 기질을 갖고 있는 부류끼리 서로 통한 것이다.

미모의 아방카와 결혼한 아빈 쿠슈너는 약속된 미래였던 것처럼 승승장구했다.

트럼프 가문과 서로 끌어주며 부동산으로 짭짤하게 재미를 봤다.

가난하고 없는 자들에게 악명을 떨쳤다.

월세가 밀리기라도 하면 가차 없이 쫓아냈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주변인들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악당으로 불렸던 아빈 쿠슈너였다.

부친이 사기와 세금포탈 혐의로 감옥에 가자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고 오늘에 이르렀다.

“난 아빈을 믿겠네.”

로버트 라이언이 잔잔하게 미소를 머금은 입으로 말했다.

‘멍청한 놈.’

물론 속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20억 달러를 여러 곳의 투자 회사 이름으로 빌려줬다.

문제는 기한이 4년밖에 안 된다는 것.

계약은 갱신할 수 있지만 그건 투자회사 측의 자유 권한이었다.

이자가 거의 없어 거저 쓸 수 있는 돈 같지만 막상 빚이라는 존재는 무서운 것이다.

빌리기는 쉬워도 갚기가 어려웠다.

“저보다는 제 장인을 믿으십시오.”

“물론 그 부분도 포함일세.”

한편으로 20억 달러가 많아 보이지만 로버트에게는 푼돈에 불과했다.

날려도 그만인 액수지만 누군가를 옭아매는 목줄로는 훌륭했다.

‘보스가 짜놓은 그물에 걸린 줄도 모르고.’

보스는 일찍부터 트럼프의 당선을 예견했다.

그리고 과감하게 투자를 감행했다.

투자는 사나운 개의 목에 채워진 단단한 목줄이었다.

아직도 각종 여론 조사에서는 힐러리가 우세했다.

하지만 밑바닥 민심이 소용돌이치는 걸 로버트 역시 잘 알았다.

대놓고 지지하지 못하는 샤이 트럼프 팬들이 속속 늘고 있었다.

겉으로는 젠틀한 영국 신사인 척하지만 속으로는 정크 푸드 같은 미국인들이 많았다.

자신들의 통장이 비었다는 것을 알고 분노했다.

일은 하지 않고 과실만 따먹으려 했던 어리석은 짓의 결과였다.

세상은 변했다.

미국이라고 해도 패권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과거와 달리 인터넷을 통해 세상이 돌아가는 실상을 낱낱이 알아가는 전 세계인들이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깨어났다.

누구나 손해 보는 걸 싫어했다.

특히 중국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잠재돼 있던 문제가 극대화됐다.

세계의 상당 부분의 물질을 중국인들이 소비했다.

부와 물질이 한정돼 있는 상태에서 중국이 그것들을 대거 흡수해 가자 미국인들은 그동안의 정치 스타일과 정치인에게 환멸을 느꼈다.

그사이 위험스러운 장사꾼이 신물 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완벽한 투자입니다. 자랑이 아니라 제 장인은…… 지는 싸움에는 애초부터 끼어들지 않습니다.”

트럼프의 열성팬이 된 아빈 쿠슈너.

그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에게 정치 자금을 제공한 한국의 어떤 사내도 패할 판에는 절대 투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

‘트럼프를?’

두 귀로 듣고도 김현재는 믿을 수 없었다.

미국인들이 아무리 타락하고 어리석다 해도 정치에 문외한인 자를 대통령으로 세울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김현재도 말로만 들었던 인물 트럼프.

공화당 쪽 대선주자로 거의 확정되었다는 소리에 황당했다.

정통 보수의 가치를 내세우는 미국 공화당과 꼴통 트럼프는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공화당 대선주자들을 물리치고 미국 대선 후보로 거의 확정됐다.

아무리 결과가 그렇다 해도 힐러리에게는 밀릴 것이라 생각했다.

힐러리는 미국 정치계의 구미호다.

짧지 않은 시간 영부인으로 살았고 그만큼 대중들에게 이미지도 친숙했다.

정치 성향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오바마 시절에도 무난하게 암중에서 미국을 통치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사기꾼 카사노바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는 말입니까? 진짜요?”

도리어 양우석 의원이 놀라며 반문했다.

“99% 확률입니다.”

아직 본격 대선이 치러지지도 않았는데 장태산은 확신하고 있었다.

“세상에…… 말세가 오겠군요.”

양우석 의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세까지 오지는 않습니다.”

“저도 관심 있어 알아봤는데 트럼프는 쌩 양아치입니다. 그런 자에게 미국 대통령을 떠나 세계 경제와 경찰국가의 수장을 맡긴다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멀쩡한 한반도를 운하로 두 동강을 내려는 작자가 버젓이 전임 대통령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쥐새끼가 빼돌린 자금이 수십조입니다. 트럼프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김현재의 고개가 작게 끄덕끄덕 움직였다.

같은 정치인으로서 생각만으로도 몹시 부끄러운 일이었다.

세상이 몰라보게 변했음에도 아직도 부동산으로 표심을 얻었다.

불로소득에 눈먼 자들일수록 더욱 더 사기꾼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그 같은 미국 시민들도 트럼프의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확신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미심쩍은 표정으로 김현재 대표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가 정말 미국 대통령이 된다면 자신의 임기 중에 마주쳐야 할 인물이었다.

헤쳐나가야 할 길에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와 접점이 있는 정치인들이 주변에 거의 없었다.

“하늘의 뜻입니다.”

“네?”

“대다수 인간들은 배가 부르면 헛생각을 합니다. 피땀 흘려 자산을 일구고 자식을 키우기보다는 타인과 비교하며 불평불만하기 바쁩니다. 그리고 하늘을 원망합니다. 자신의 지금까지 기울였던 노력은 계산하지 않고, 왜 나만 이렇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느냐고 따집니다. 그 원망이 주변 사방으로 퍼지면 하늘이 다른 방법으로 소원을 들어 줍니다. 지금까지 평안히 누려온 삶을 거둬들임으로써 포악하고 교활한 짐승들을 왕으로 삼아 지난 시간들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너희 안에 잠자고 있는 추악한 본모습이라고 확인시키는 것이지요.”

“…….”

피도 눈물도 없는 서늘한 심판자 같은 말을 무표정하게 내뱉는 장태산.

눈빛에 차가운 감정이 일렁였다.

‘결코 어린 사람이 아니다.’

나이는 한참 어리지만 눈빛에 담겨 있는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동시에 스치는 단 한 가지 생각.

‘건들지 말아야 한다.’

올바른 생각이 확고부동하게 자리한 자가 능력까지 겸비했다면 결단코 친구로 둬야지 적으로 삼으면 안 될 일이었다.

양우석 의원이 회장님이라 부르며 매순간 조심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미국인들이 똥을 밟겠군요.”

양우석이 고개를 내저었다.

“맛을 봐야 알 겁니다.”

“이걸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양우석의 시선이 김현재 대표에게로 향했다.

‘나에게 이렇게 팁을 준 이유는…….’

김현재는 장태산의 진짜 속내가 궁금했다.

“오늘 여러 번 장 회장님의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식견에 감탄을 합니다.”

일단 칭찬을 날렸다.

그리고.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김현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것을 예견했다면 뭔가 그에 대응할 만한 대책이나 비전이 있을 것이다.

“대표님. 오늘 욕심이 과하십니다.”

장태산이 특유의 미소를 보였다.

“회장님은 뭔가 준비를 하고 있을 것 같아 무례를 범합니다.”

김현재는 최대한의 존중의 의사를 표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자신과 그릇 크기가 달랐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어 정신이 건강하고 단단하며 부강한 국가를 만들겠다는 자신의 마음 크기와 깊이로는 비교 불가능했다.

한 세계를 손에 쥐고 흔들 수 있을 것 같은 장태산 회장.

“회장님 쏠 때 확 쏘십시오.”

양우석 의원이 도우미로 나섰다.

틈틈이 김현재는 양우석을 눈여겨봤다.

보궐과 재선을 통해 당의 중진으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는 양우석.

과거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인물이다.

100명이 넘어가는 같은 당 의원들 모두를 낱낱이 알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양우석은 라인을 같이 하는 일정 계파도 없었다.

다른 다선 의원들처럼 아직은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인물이라 여기고 있었던 게 다였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 이후부터는 다르게 평가하게 될 것 같았다.

쉽게 만날 수 없는 장태산 회장이 양우석을 후원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거기에 관계 센스도 남달랐다.

가려운 곳을 알아서 긁어주며 대화의 방향을 부드럽게 이끌었다.

옆에 두고 함께해야 할 1순위 정치 동반자로 썩 괜찮은 인물이었다.

“그럴까요?”

판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장태산.

“경청하겠습니다.”

김현재는 다시 수첩과 볼펜을 들었다.

존경하는 인생 선배를 대하는 듯한 자세였다.

‘역시 대단하신 분이야!’

양우석은 김현재 대표의 모습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배울 게 있으면 나이를 불문하고 겸손한 자세로 고견을 구하는 모습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자신도 보고 배워야 할 자세가 분명했다.

양우석 의원도 덩달아 귀를 쫑긋 열었다.

오늘 주고받은 말들 속에 미래로 나아갈 방향이 여러 가지로 제시돼 있었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미래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

“세상에 완벽하게 나쁜 악은 없습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태풍이 불어야 깊은 바닷속까지 뒤집어져 산소가 공급되면서 그 아래 심층 생명체까지도 살 수 있습니다. 트럼프도 그런 존재입니다. 누가 보면 천하의 바람둥이 쓰레기이지만 또 누구보다 똑똑합니다. 그를 잘만 이용한다면…….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도약할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용이라 함은…….”

“가령 북한 문제라든가.”

“!!!”

북한 문제라는 말에 김현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언제나 아픈 손가락 같은 북한과의 대립 관계.

통일까지는 꿈꾸지도 않았다.

다만 적대적 행보를 멈추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관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했다.

어차피 핵을 보유한 북한이다.

재래식 무기 전략이야 남쪽이 우세하지만 핵무기 한 방이면 모든 게 무의미했다.

그래서 관계 개선이 더욱 조심스러웠다.

“트럼프는 손해나는 일을 매우 싫어합니다. 그걸 명심하면 됩니다.”

“현명하게 판단해야겠군요.”

“사기꾼들은 허영도 좋아합니다. 후에 대통령이 되시면 청와대로 불러 나팔이라도 불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필요하시면 절 불러주십시오. 그럼…… 제가 웬만한 사안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결국 이 말이 듣고 싶었다.

오바마 정부와도 인연이 깊다고 알려진 장태산 회장이다.

트럼프와도 연이 닿아 있을 게 분명했다.

김현재는 아낌없이 내어주기만 하는 장태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말입니다…….”

잠시 머뭇거리다 신중하게 입을 여는 김현재.

“???”

장태산이 그런 김현재의 두 눈을 직시했다.

그 순간.

김현재는 용기 있게 입을 열었다.

“저와 함께 정치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회귀의 전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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