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2장. 뉴딜(2). (1,075/1,284)

1092장. 뉴딜(2).

“더 달라고 했다고?”

“그렇습니다. 회장님.”

“지 애비를 닮아 무식하게 욕심이 하늘을 찌르는군……. 쯧쯧.”

랏데 호텔에 위치한 명예회장의 집무실.

휠체어에 앉아 있던 성경호 회장이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요즘 들어 기억이 가물거리는 시간이 잦아졌다.

아흔을 넘기자 그만큼 총기가 빠르게 퇴화했다.

하루 종일 창밖을 내다보며 드는 생각은 모든 게 꿈처럼 덧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또 현실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명예회장으로 물러나 앉은 지가 꽤 되었지만 아직도 실질적으로 처리해야 할 그룹 일이 많았다.

자식들이 양에 찰 만큼 다 성장하지 못했다.

차기 회장 자리를 놓고 자식들은 다툼을 벌였다.

흘러가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능력 있고 강한 자가 차지하게 되는 게 그룹 회장 자리다.

문제는 자신이 세운 아성을 되먹지 못한 주순자가 위협하고 있다는 것.

“정치권 움직임이 수상합니다.”

성경호 회장을 수십 년간 보필해 온 윤창호 비서실장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이 자리에 오른 성경호는 그만큼 시류를 잘 읽었다.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정확히 알았다.

한국인이 일본에서 재벌이 된다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이 따르는 길이다.

당시에 일본인들 머릿속에 한국인은 거지와 다를 바 없는 3류 인간에 불과했다.

그들의 무시를 견디고 참으며 이룩한 랏데 그룹.

일본과 한국의 권력자들이 너 나할 것 없이 손을 벌렸다.

그 점에서는 일본이 상대하기 더 깔끔했다.

자민당과 손만 잡으면 모든 게 해결됐다.

정치자금과 혼맥을 적절히 이용해 일본 랏데는 견고한 아성을 구축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사정은 달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욕심에 눈먼 자들이 그룹의 금고를 노골적으로 노렸다.

“탈이 나겠지?”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안 줄 수도 없고.”

“아직은 권력자입니다. 국세청을 비롯해 여러 행정기관에서 압박을 해오고 있습니다.”

요구하는 자금을 주지 않으면 권력의 개를 자처한 자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뜯을 것이다.

긴 세월 동안 그렇게 뜯겨온 돈만 해도 조 단위가 넘었다.

앞으로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관인상생(官印相生)의 원리는 선진국도 피할 수 없는 기업의 성장 방법이기도 했다.

“줘.”

“탈이 날 수 있습니다.”

“시끄러우면 다른 집 개새끼들한테도 던져 줘. 몇 푼이나 된다고.”

자금을 푸는 일 등 각종 이권이 따르는 과정은 기름칠과 같았다.

성경호 회장은 살면서 이 같은 생리를 확실히 깨달았다.

돈을 놓고 더럽다 욕해도 막상 돈 앞에서는 누구도 침을 뱉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누구에게…….”

“누구긴 누구야. 동민이 시켜. 괜히 한국말도 못 하는 놈한테 시켰다가 뒷말 들어.”

성경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조언해왔건만 결코 한국어를 배우지 않는 큰아들.

자존심과 오기로 똘똘 뭉친 녀석이었다.

경영자는 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건만 큰아들은 기대와 달리 편협하고 속이 좁았다.

일본에서 성장하고 자라서인지 그 영향이 있는 듯했다.

성장 과정에서 일본인 친구들에게 당했던 무시와 멸시가 트라우마로 작용한 것 같았다.

한국어를 절대 사용하지 않으려 고집하는 큰아들.

녀석의 아픔을 알고 있지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거기까지였다.

앞으로의 주력 사업은 일본보다 한국 랏데에서 추진하는 게 핵심이다.

일본이나 한국을 넘어 아시아와 세계에 랏데라는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는 통 큰 자식이 필요했다.

“다칠 수 있습니다. 차라리 다른 임직원을…….”

“사자 새끼는 벼랑 끝에 내몰려 생존하는 법을 배워야 해. 언제까지고 품에서 키울 수 없어.”

성경호는 냉정하게 말을 내뱉었다.

탈이 나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정권이 바뀌면 당연히 뇌물 공여자는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 숨은 능력이 드러나는 법이다.

지금까지는 성경호 자신이 가꿔놓은 인맥을 통해 문제 해결 방법을 찾아 왔다.

그 점에서 큰아들의 능력은 0점이다.

한국에서 생긴 문제도 일본 정치인들을 이용하려 했다.

둘째는 나름 한국 사회에 인맥을 다져놓았다.

그것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윤창호가 고개를 숙였다.

“성철이 소식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직 한창 일할 나인데…….”

오정 임성철 회장의 아버지와 인연이 깊었던 성경호였다.

호형호제하던 사이를 감안하면 임성철 회장의 일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룹으로 성장하는 동안 오정과 사업 영역이 겹치지 않게 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그 점에서는 오정도 마찬가지.

덕분에 유통과 식료 사업 쪽에서 승승장구했던 랏데.

그런데 조카나 진배없던 오정 임 회장까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제 나도 슬슬 준비해야겠지…….”

정신이 총총할 때마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과거지사.

희로애락을 그룹과 함께했다.

가난을 딛고 일궈낸 랏데 그룹은 성경호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랏데 그룹 회장이 된 뒤 남자가 누릴 수 있는 복락 또한 다 누렸다.

뭇 미인들과의 사랑은 물론 돈도 원 없이 써봤다.

이제 남아 있는 소원은 조용히 삶을 마무리하고 본인이 이룩한 성을 후계자에게 무사히 물려주는 것뿐이었다.

“회장님, 아직 정정하십니다. 의료기술이 발달해…….”

“윤 실장 그동안 수고했어.”

“회장님…….”

“우리 하고 싶은 것 다 해봤잖아. 여한이 더 남았나?”

“…….”

윤창호가 입을 다물었다.

그도 알게 모르게 보이지 않는 랏데 2인자로 살아왔다.

재산도 쌓을 만큼 쌓았다.

성경호 회장을 빌어 호가호위하면 살았던 지난 시절이었다.

회장이 사라지면 윤창호라는 이름도 그 수명을 다할 것이다.

“내가 혹시 정신줄을 놓거나 아주 죽으면 말이야…….”

마지막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듯한 성경호 회장.

“그룹에 위기가 찾아올 거야. 그때…….”

성경호 회장은 말을 하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장태산을 찾아가.”

“장태산요?”

“그래……. 가서 전해. 꼭 약속 지켜달라고 말이야.”

성경호는 자못 유언 같은 말을 윤창호에게 남기고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윤창호는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절대 잊지 말고, 무시하지 마. 기억해 둬. 장태산, 이 이름을 말이야…….”

***

- 오! 스마트시티! 그 명칭이 그럴싸합니다.

귀신은 구체적인 내용도 모르고 좋아라 했다.

명칭이 그럴싸한 게 아니라 대한민국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IMF 이후 지금껏 성장할 수 있었던 발판은 당시 대통령의 과감한 IT 투자 정책 덕분이다.

악다구니 같은 해외 자본에 살점을 뜯기고 이를 갈며 준비했던 IT 산업 투자.

인터넷이 전국에 깔리며 신성장 동력이 됐다.

빠르고 편한 걸 좋아하는 국민성과 결합하며 폭발적 성장세를 이뤘다.

당시에 고리타분한 법관이 대통령이 됐다면 대한민국은 그때 망했을 것이다.

IMF를 막지 못한 기득권 세력의 대변인에 불과했다.

아무리 잘나가는 기업도 국가의 기간산업 투자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

중국이 무서운 이유가 그거다.

공산당 정권이 목표를 세우면 국가 기관과 국고를 이용해 기업에 물심양면 투자한다는 것.

미국을 비롯해 유럽이 제정해 놓은 반독점이나 여러 가지 지적재산권에 대한 제약을 중국은 과감하게 무시했다.

그렇게 인력과 기술을 빼돌려 급속도로 성장한 중국.

단시간에 각종 제조 기술들이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서방국가들은 간과했다.

자본 맛에 길들여지면 자연스럽게 중국인들이 민주주의를 외칠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무지몽매한 착각이다.

살아온 역사와 그들이 공유해 온 시간이 달랐다.

중국인들은 각자의 배만 채워지면 주변에서 뭘 해도 용서했다.

공산당이 인권을 탄압하고 보이지 않게 감시하고 감독해도 잘 따랐다.

배부르고 자기 권리만 침탈하지 않으면 독재를 영원히 용인할 수 있는 민족이 바로 대다수 중국인들의 습성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김현재 대표의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앞으로 세상은 IT와 4G를 넘어 본격적으로 인간과 AI가 융화하는 5G 이상의 세계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가속도가 붙어 멈추면 바로 경쟁 구조에서 탈락하는 무시무시한 경쟁 체제가 구축될 겁니다.”

겁을 주는 게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

고전적인 제조 기술도 중시되지만 세상을 이끄는 건 AI가 대세.

“이해는 가지만 머리에 확 그려지지 않습니다.”

김현재 대표는 솔직했다.

똑똑한 학생은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

삽질과 함께 말로만 떠들어 대며 창조경제를 외치던 쥐와 닭과는 분명 달랐다.

“디지털 인프라를 전국적으로 구축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데이터를 수집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인프라가 강화되어야 합니다. 5G와 IT기술들이 AI를 통해 융복합된다면 전국 단위로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될 것입니다.”

“회장님. 디지털 인프라 구축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지금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양우석 의원이 아는 척하며 끼어들었다.

“의원님, 공부 더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냉정할 때는 냉정해져야 하는 법이다.

국가 정책을 보완하는 입법자들이 무지해서는 안 된다.

과거 시대에 머물며 대관이나 받으며 어른 놀이하려는 정치 꼰대들이 빨리 사라져야 대한민국에 복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똑똑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대학 진학률은 축복입니다. 국민이 잘 배워야 정치를 감시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위정자들은 알아서 고개 숙이고 좋은 정책을 펼 겁니다.”

과거부터 백성이나 국민이 똑똑해지는 걸 권력자들은 원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마음대로 전권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선동에 쉽게 빠져드는 이들이 필요했다.

인간은 자신이 아는 것만큼 진화한다.

그 점에서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보다 바르게 미래를 준비 중이다.

“지금 장 회장님 말씀대로라면 국가 지도자가 책임지고 미래 먹거리를 위해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하고 진화시키라는 말씀인데, 맞습니까?”

“네.”

“상당한 투자가 필요하겠군요.”

“돈이 문제겠습니까? 정치 의지가 문제지.”

“…….”

“사회간접자본의 디지털화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국가 곳곳을 잇는 도로는 어느 정도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디지털 물류 서비스에 치중할 시기입니다.”

최대한 쉽게 설명을 이어갔다.

“기업들이 공장에서 좋은 제품을 생산해도 물류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창고에서 썩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전국 단위로 거점 도시들을 스마트도시로 만들어 연결하면 굳이 인구가 수도권에 몰릴 이유가 없습니다. 인식을 바꾸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자연스럽게 인구는 분산될 것이고 집값은 안정화 될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국민들은 여유를 갖고 진정한 삶을 영위하고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청사진을 보여줬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보이지 않는 디지털 산업에 투자하면 쓸데없는 짓 한다고 아우성치는 이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고 쉽게 생각하면 쉬울 겁니다. 물고기를 잡아서 주는 것보다 잡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 당장 가시적 성과를 내기 어렵지만 뉴딜을 바탕으로 후손들은 다른 국가 국민들보다 더 빠르게 진화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미래는 진화가 경쟁력이다.

이제 인간의 힘으로 과학기술의 방향을 돌리기에는 늦었다.

산에서 굴려진 작은 눈덩이가 거대하게 커져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격이다.

같이 굴러가거나 깔려 묻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미래는 누구도 예견할 수 없다.

기꺼이 나는 전자를 택했다.

“당장 혜택을 원하는 국민들의 눈높이에는 맞추기 힘든 정책 같습니다.”

양우석 의원이 씁쓸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대표님이 추진하는 노후 원자력 폐쇄 공약과 비슷합니다. 원자력 발전이 깨끗하고 원가가 저렴하다고 말하지만 진정 원가가 저렴할까요? 수백 년을 운용 가능한 것도 아니고 겨우 수십 년입니다. 그다음에 감당해야 할 천문학적 처리 비용은 누가 감당합니까? 바로 우리 후손들입니다. 그것도 수천수만 년을 땅에 묻어 안전하게 폐기물을 보관해야 하는데 누가 책임집니까?”

절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매일 마시는 커피 한 잔 값은 쉽게 지불하면서 후손들을 위해 돈을 쓰는 걸 아까워하는 얌체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자신들이 누리는 것만 생각하지 미래 세대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 모자란 인간들.

그런 이들이 천지에 깔려 있다.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절대 원자력이 싸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체르노빌을 비롯해 일본 원전 사고 처리에 투입되는 막대한 비용은 전혀 계산해 보지 않는 이기주의자들.

기득권에 빌붙어 조삼모사 원숭이처럼 날뛰었다.

그들을 버리지 않고 설득해가며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할 대한민국의 미래.

눈앞의 김현재 미래 대통령의 양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솔직히 안타까웠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목소리에 진심을 담았다.

“……감사합니다.”

김현재 대표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대통령님 차명으로 쫙 깔아 들리겠습니다.”

“네?”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김현재 대표.

스윽.

손으로 창밖 하늘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내 손가락을 따라 창밖으로 향했다.

“앞으로 저 지구 궤도에 1조 원만큼 인공위성 쫙 깔아 드리겠습니다!”

“!!!”

회귀의 전설 3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