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1장. 뉴딜.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시끄러워? 서로 협력해도 모자랄 판에 싸움질이라니.”
“주순자가 저질러 놓은 사고에 다들 열받은 것 같습니다.”
“쯧쯧. 내가 그래서 그 여자는 안 된다고 했는데.”
한 남자가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70이 넘은 나이임에도 매일같이 운동을 해 기운이 정정했다.
하루 세끼 좋은 음식을 챙겨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울 시장을 거쳐 대통령 임기까지 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을 때 쌓은 자산이 상당했다.
연대 재직 시절부터 몸에 익혀 왔던 비자금 조성 관리 능력.
서울 시장과 대통령을 거치면서 농익은 능력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해외 탈세가 용이한 지역에 페이퍼 컴퍼니와 계좌를 개설했다.
안정적 해외 자원 획득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어렵지 않게 국가 기관을 동원했다.
행정부의 관리감독을 받는 각종 공사를 통해 공공연하게 수십조에 달하는 자금을 축적했다.
가치가 없는 투자 대상을 골라 장부가의 100배 이상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처리된 일이 부지기수였다.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30% 이상의 뒷돈이 자연스럽게 손에 쥐어졌다.
공사뿐만 아니라 외교부와 국정원까지 심심치 않게 이용했다.
몇 개의 페이퍼 컴퍼니를 거치면서 자금은 완벽하게 세탁됐다.
자신이 다 쓰고 죽지 못해도 자손들 몇 대는 먹고 살 만큼의 엄청난 돈을 쟁였다.
대한민국의 국부 손실 걱정 따위는 애초 생각하지도 않았다.
최병박에게 있어 회사금고나 국고는 모두 눈먼 돈으로 똑똑한 자가 빼먹을 대상에 불과했다.
“조국일보에서 조만간 크게 터트릴 것 같습니다.”
최병박은 우매하고 멍청한 정치가가 아니다.
조근영을 당선시킨 뒤 여러 방향의 딜을 통해 안전을 보장받아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에 아주 쓸 만한 고급 정보를 손에 쥐고 있다.
특히나 조근영의 치부에 해당하는 은밀하고 사적인 정보를 쥐고 있어 무척 안전한 입장이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 때 자신을 따르던 의원들이 대거 정리됐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엄연히 살아 있는 권력을 건들 자신은 없었다.
워낙 거미줄처럼 걸리는 사건이 많았다.
앞서 주순자를 만나 직접 딜을 하지 않았다면 전직 대통령 꼴처럼 영여의 몸이 되었을 것이다.
숨을 죽이고 몇 년만 버티면 잊혀지게 될 것이다.
공소시효만 채워지게 된다면 두려울 게 없었다.
정권 당시 알게 모르게 곳곳에 심어 놓은 세력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
직접 임명한 오승택 대법원장도 그중 한 명이다.
검찰 쪽도 상황은 마찬가지.
조근영이 정권을 잡은 뒤 한직으로 밀려난 특수부 검사들 상당수가 최병박 라인 사람이었다.
잠시 윤병운 때문에 지방으로 좌천되었지만 모두가 한 칼 하는 성격의 인사들이다.
비자금을 통해 그들을 관리하며 최대한의 안전을 보장받고 있던 최병박.
갑작스런 정권 혼란에 심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최소 이번 정권까지는 무사히 버텨야 탈이 없을 터였다.
다선의원이었던 친형을 감옥에 보내는 것으로 비난 여론을 잠시 잠재웠다.
“반 회장님이 이 정도로 나갈 태세라면 화가 많이 났다는 의미인데…….”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조국일보 회장에게 가장 먼저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던 최병박.
그때 그 이후로도 반 회장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민심에 끓어오른 촛불에 활활 타 관좌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동계 올림픽을 핑계로 무리하게 자금을 끌어모은 것 같습니다.”
“그게 몇 푼이나 된다고……. 주순자가 통 머리가 작아.”
“그래도 제법 빼돌렸습니다.”
“얼마나?”
“대충 3000억 정도 됩니다.”
“겨우 그거야?”
“사람들을 잘 믿지 않는 독불장군 스타일이라…….”
“간댕이가 작아도 너무 작아. 그걸로 퇴직 후에 빵이나 사먹으면 되겠네.”
최병박이 눈살을 찌푸렸다.
주순자의 독자적 행보로 인해 뭔가 분위기가 불안해지고 있었다.
“여론이 심상치 않습니다.”
“촛불 그 빨갱이들?”
“네.”
“요즘 같은 세상에도 북한 사상에 세뇌당한 것들이 있다니까. 확 버르장머리를 잡았어야 했는데!”
최병박이 지난 시간이 떠오른 듯 이를 갈았다.
촛불만 아니었어도 계획했던 오대강 사업은 더 크게 확대됐을 것이다.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대운하 사업.
사업이 성공만 했다면 초대박이 났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어차피 물동량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고속도로가 뻥뻥 뚫려 있는 대한민국에서 한반도 대운하 사업은 처음부터 사기였다.
물길을 따라가도 낙차가 심한 곳이 많았다.
물건을 싣고 내리는 데 예상외로 엄청난 시간이 소모됐다.
심지어 장마철인 여름과 얼음이 어는 겨울에는 가동이 불가능했다.
갈수기인 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용 교수들과 언론을 이용해 사업을 밀어붙였다.
자연훼손이 뒤따르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국토를 양분하는 만큼 국가의 기운이 확 기우는 것은 물론 국운까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외면한 채 최병박은 끝까지 밀어붙였다.
일본에서도 최병박이 계획한 사업을 적극 추진하기를 원했다.
항상 한국의 국운 상승을 두려워하던 일본에게는 절호의 호재였다.
동조하는 데는 조중동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일신을 위해 언제든 나라를 등질 수도 있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찍어준 국민들의 응원도 적지 않았다.
어리석게 이런저런 깊은 생각 없이 부동산을 띄워준다는 말에 표를 아끼지 않은 부류였다.
그들은 매번 언론을 통해 선동 가능했다.
당시 촛불만 타오르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자산을 챙길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삽질에는 자신 있던 최병박.
고작 몇 푼 되지도 않는 뒷돈 챙기는 일도 어설픈 주순자가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대한 몸을 사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도 숨만 쉬고 사는데……. 에잉!”
대통령 당선 당시 거짓말한 게 너무 많았다.
그때 주순자가 끝까지 물고 늘어졌던 최병박에 관련한 험담은 모두 사실이었다.
당선 직후 서둘러 검찰을 이용해 입을 봉했다.
언론사 사주들 중심으로 물심양면으로 뒤를 밀어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5년 동안 국가 예산을 사용해 조국과 중보, 동서 일보 등은 알짜 사업을 많이 챙겼다.
그중의 핵심이 종편방송권 획득.
종이 신문 시장이 사장되어 가는 기로에서 조중동을 위해 직접 나서서 활로를 열어줬다.
물론 불법이 난무했지만 철저하게 눈을 감았다.
그 덕분에 퇴임 후에도 임기 동안 저지른 정치 행보에 관해 언론에 최소한 언급되었다.
반공에 뼛속까지 젖어 있던 보수 교회들도 최병박의 큰 후원자였다.
십알단은 보수 교회가 나서서 운영해 주었던 최병박의 홍위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불길한 조짐이 예사롭지 않게 감지되고 있다.
주순자와 조근영의 국정 운영 때문에 좌불안석 신세가 됐다.
지금 사태로 여론이 들불처럼 일어나면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 게 빤했다.
“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뭘?”
“언론사 사주들을 만나보시고 검찰 쪽에도…….”
보고 중에 말끝을 아끼는 비서.
최병박이 돈 얘기에 얼마나 민감한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본인 가족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믿지 않고 모두 다 계산적으로 상대하는 최병박.
“아까운 쌩돈 깨지게 생겼네. 연금 그게 몇 푼이나 된다고 내 돈을 털어가!”
예상대로 최병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최측근인 운전기사에게도 떡값 한 번 준 적이 없는 인물이니 말할 것도 없었다.
“친분 있는 야당 의원들도 관리하셔야 합니다.”
그나마 몇 개 챙겨 먹은 비서만이 최병박과 한배를 탔다.
“우리 쪽 의원들한테 연락해. 조용히 떡값 좀 돌리라고 말이야.”
“넵!”
‘이렇게 판이 돌아가면 다음 대 대선이 문제인데……. 여당에는 마땅한 인재가 없어. 이러다 김현재가 당선이라도 되면…….’
최병박의 작은 눈이 더 가늘어졌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자 걱정이 됐다.
정권 이양 시점에 서로 건들지 않기로 약조를 맺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주무형도 최병박의 비리를 낱낱이 알고 있었지만 눈을 감았다.
민심이 그에게서 떠나고 있음을 알았기에 애써 붙잡지 않았던 것이다.
그 대가로 주무형이 겪게 된 온갖 공작과 치졸한 협박들.
이후 벌어진 모든 사태 뒤에 최병박이 버티고 있었다.
“김현재는 지금 뭐 하고 있어?”
“여러 인사들을 접촉 중인 것 같습니다.”
“벌써?”
“보기보다 눈치가 빠른 자입니다.”
‘대선까지는 시간이 남았는데……. 이거 냄새가 나! 냄새가!’
불안감의 정체를 귀신같이 알아 챈 최병박.
김현재에게 자신은 누구보다 철천지원수였다.
약속을 저버리고 웃으면서 정권을 이양받은 후 뒤통수를 제대로 쳐 목을 날려 버렸다.
그 일로 김현재의 친구 주무형이 운명을 달리했다.
“우리 쪽 애들 통해서 정보를 캐봐. 김현재……. 그놈이 대통령이 되는 건 반드시 막아야 해!”
“넵!”
“그리고 조국일보 쪽에 연락해 봐. 회장님 한번 뵙고 싶다고 말이야.”
“바로 추진하겠습니다.”
‘더 바랄 것도 없다. 이대로만 가자……. 이대로!’
교회 내에서 인심 좋은 장로님으로 살아가고 있는 최병박.
한평생 이루고 싶었던 모든 걸 이루고 쥘 수 있는 모든 걸 손에 쥐었다.
여자면 여자, 돈이면 돈, 권력의 정점까지 올라서 봤다.
아직 써보지도 못한 엄청난 돈이 해외 비밀 계좌에 고스란히 묶여 있다.
이제 남은 소원이 있다면
호의호식하며 지금처럼만 살다 가는 것이다.
그 단 한 가지의 소원을 위해 최병박은 열심히 잔머리를 굴렸다.
지금은 누구도 찾지 않는 전직 대통령에 불과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대한민국 국민은 최병박에게 있어 먹을 것만 던져주면 되는 개돼지일 뿐이다.
***
‘뉴딜?’
김현재는 뉴딜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만남은 누가 봐도 비정상적이다.
장태산이라는 청년은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남달랐다.
나름 테스트를 해보기 위해 만남의 자리를 만들었지만 도리어 시험을 당했다.
젊은 시절에나 심심할 때 쳐봤던 고스톱에 깊이 빠져들게 만들었다.
점당 10억.
거액의 투자금을 내놓겠다는 소리를 다른 이가 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장태산이 내뱉은 말은 처음부터 진심으로 들렸다.
무슨 마음에서인지 혼신의 힘을 다했고, 그 결과 1조를 벌었다.
장태산은 부자 수준을 넘어 거부였다.
수조에 이르는 개인 자산은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 불가능하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 장태산과 인연을 맺고 싶었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서 모범이 되는 자랑스런 코리아를 만드는 게 죽은 친구와 자신이 품은 오랜 염원이었다.
이생이 다 하기 전에 반드시 이뤄야 할 숙명.
장태산은 도움을 요청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뉴딜 정책을 언급했다.
“안타깝지만 대한민국은 늙어가고 있습니다.”
맥주를 한 잔 비운 뒤 장태산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안타깝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다.
생산에 투입할 수 있는 핵심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앞으로 몇 년 뒤면 초고령 사회로 본격 진입하게 된다.
국가 성장에 투자할 수 있는 세대의 여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전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개발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선진국 문턱에서 퇴보하게 될 것이다.
생산 인구가 노령 인구를 부양하는 데에는 엄연히 한계가 존재했다.
의료기술과 복지 지출의 증가로 기대수명이 늘어났다.
상황이 이런데 서둘러 경제 체질 개선을 하지 못하면 미래는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알고 있습니다…….”
김현재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대선 당시에도 선거 브레인들이 미래 먹거리를 강조했다.
노인과 출산은 각 선진국에서도 중요시하는 첫 번째 문제였다.
“대한민국은 인구에 비해 국토가 넓지 않습니다. 그게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국가 정책이 빠르게 시행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잘못된 행정은 부작용으로 바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까닭에 뉴딜의 첫 번째 순위는 지역 균형 발전입니다.”
“지역 균형 발전은 국가 기관의 지방 이전으로 어느 정도 완성됐다고 생각되는데 아닌가요?”
김현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수도권에 집중된 인구를 분산시키고자 공기업들을 각 지역으로 분산시켰다.
과밀화된 수도권은 집값 폭등과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시켰다.
공무원들의 반발과 언론의 협작질이 만만치 않았지만 강하게 밀어붙였던 지역 균형 발전.
장태산이 뜬금없이 다 지난 정책을 언급했다.
“대표님 지금은 AI시대입니다.”
짧게 추가 설명을 잇는 장태산.
“그것과 지역 균형 발전과 무슨 연관이…….”
“공기업 이전은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습니다만 한계가 명확합니다. 세종시를 비롯해 각 도시에 파견된 공무원들은 자식 교육과 여러 여건상 수도권 생활을 포기하지 못할 겁니다. 주말부부를 대거 양산할 게 뻔합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지역 균형 발전이 필요한 겁니다.”
“!!!”
장태산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김현재는 그제야 이해했다.
‘AI와 연관된 지역 균형 발전이라면…….’
김현재는 AI라는 말을 곱씹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고 싶은지 알고 싶습니다. 특히 회장님이 구상하시는 바를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면 경청하겠습니다.”
김현재는 현명하게 처신했다.
이쯤 되자 장태산이 더욱 더 빛나 보였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판을 그리고 있는 듯한 인물이었다.
한결 더 머리가 맑아지며 귀가 총총하게 열렸다.
‘역시 회장님!’
그런 김현재 대표의 모습을 보며 양우석은 내심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모든 게 계획이 있었어.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던 거야!’
듣고 있던 양우석 의원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장태산을 향해 무한한 존경심이 일었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살아 있는 정책 얘기였다.
국회의원이 된 이후로도 답답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각종 이권이 걸려있는 말도 안 되는 잡스러운 법안 논의 때보다 피부에 확 와닿는 뉴딜 정책.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청사진이 확실했다.
“빅 데이터, 인공지능, 정보통신기술을 완벽하게 전국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전국 적용이라 함은…….”
“과거 영화에서 보았던 공상을 현실화시키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공상을 말합니까?”
대화는 한결 진지해졌다.
똘똘한 학생처럼 설명을 듣고 다시 질문하는 김현재.
그 모습을 빙긋 웃으며 바라보는 장태산.
“전국 모든 도시들을…… 스마트시티로 만드는 겁니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