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4장. 계륵(鷄肋).
“은혜도 모르는 배신자 새끼들! 세금으로 수백억을 지원해줬는데 뒤통수를 때려? 다 죽여버릴 거야!”
청와대 관저.
주순자가 씩씩거리며 열을 냈다.
“…….”
회의에 참석한 이들 모두 입을 다물었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졌다.
보통 이 정도 되면 서로 공격을 멈추고 협의를 시작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조국일보를 필두로 여러 언론들이 작정하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검찰은 물론 여러 기관을 통해 실제적 압박을 가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공무원들이 귀신같이 변화의 물살을 알아챘다.
청와대를 비롯해 내로라하는 윗선의 지시가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
정권 말기도 아닌데 레임덕 조짐이 보였다.
“조국일보에서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 때부터 도움을 많이 주고받았던 신문사인데 갑작스레 조카를 공격했는지 의문이 드네요.”
특유의 주관 없는 말투로 얘기를 꺼내는 조근영 대통령.
은근히 주순자의 눈치를 봤다.
조근영의 상식에서 조국일보는 애국을 위한 선봉장이었다.
빨갱이들이 아직도 설치는 세상에서 앞장서 그녀를 보호했다.
야당에서 자신의 치부를 꼬집어 공격할 때도 앞으로 나서서 반박했던 고마운 존재.
주순자와의 사이가 비틀어진 이유를 짐작도 못 했다.
“놈들이 우리를 배신했어요!”
주순자가 빽 소리 쳤다.
“배신요? 조국일보가 말입니까? 왜요?”
오늘따라 조근영이 말꼬리를 물며 의문을 강하게 표했다.
주순자의 지배를 받고 움직이는 것 같지만 조근영도 아주 바보는 아니었다.
내 편이라는 인식이 강한 만큼 조국일보의 배신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당연히 VIP의 힘을 빼고 차기 대선 주자를 세우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나를 왜…….”
“워낙 강직하게 국정을 운영하시니 조국일보와 몇몇 신문사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예요. 오직 애국충정으로 마음이 가득 채워진 VIP가 싫은 거죠.”
“나쁜 놈들이군요!”
조근영의 눈동자에서 그제야 의구심이 걷히고 분노가 차올랐다.
아직은 공주 놀이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긴 세월을 보낸 후에야 돌아온 고향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버지처럼 유신을 내세워 더 오래 집에 머물고 싶었다.
“대책들 내놔 봐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렇게 앉아만 있지 말고!”
주순자가 회의 참석자들을 돌아보며 닦달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여태껏 주순자가 시키는 대로 지시만 받아 일을 처리해 왔다.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으로 꿀을 빨며 지내다 갑자기 당한 된서리.
이들 역시 모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이것들 믿으면 안 돼!’
그 틈에도 주순자는 비상하게 머리를 굴렸다.
화려한 축제가 끝나가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제는 빠져야 할 때.
‘좀 더 계획을 앞당겨야겠어.’
주순자는 보통 여자가 아니다.
이런 날이 올 것을 진작부터 예견했다.
권력을 쥐고 영원할 것처럼 살던 조근영의 아버지도 측근 부하 총탄에 운명을 달리했다.
주순자의 아버지도 여러 번의 위기를 겪었다.
그들의 삶을 보며 때가 되면 몸을 사려야 한다는 걸 몸소 깨우친 주순자였다.
그만큼 지금의 삶을 누리기 위해 꽤 오랜 시간 대비를 해왔다.
“일단 그쪽 만나서 협상을 해봐요. 동시에 검찰과 우호적 언론을 통해서 지속적 압박을 가하는 것도 잊지 말고…….”
줄줄줄 나름의 대비책을 쏟아놓는 주순자.
사사삭.
멀뚱히 앉아 있던 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서둘러 수첩에 그녀의 지시 사항을 기록했다.
위기가 찾아왔지만 아직도 권력 실세가 분명한 주순자의 엄명.
누가 뭐라 해도 이 청와대 안에서는 그녀의 말이 왕명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게 다 그 자식 때문이야! 장태산……. 필요할 때 이용만 해먹고 날 버려? 넌 내가 반드시 지옥으로 끌고 걸 거야!’
주순자는 엉뚱한 방향으로 화풀이할 생각을 했다.
자신을 도와줄 능력이 충분히 되면서도 매몰차게 부탁을 거절한 장태산.
지금 이 상황에서도 장태산이 힘을 써준다면 충분히 돌파 가능했다.
대한민국 대통령보다 강력한 미국 정계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노골적으로 회피했다.
주순자의 눈동자에 원망이 넘쳐흘렀다.
각자에게 호의적인 관계는 아니었지만 배신감에 몸을 떠는 주순자.
그 틈에도 착착 운명의 시간 추는 멈추지 않고 거침없이 움직였다.
***
- 헛! 이분은……!
귀신도 그를 알아봤다.
TV에 자주 나오는 유명한 야당 정치인.
지난 대선에서 토착왜구들과 수구언론들, 그리고 국가 댓글부대의 공작으로 낙선했던 인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정광이 흐르는 눈동자는 검은 산초알처럼 빛났다.
입가에 걸린 미소 그대로, 보이는 그 자체가 진실인 정치인.
진심으로 국민을 위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대한민국에 몇 남지 않은 존재.
한 번쯤 조우할 줄은 예상했지만 그 날이 오늘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들어가도 되나요?”
앞으로 1년 뒤 한국을 이끌어갈 예비 대통령이 물었다.
“회장님…….”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보며 머뭇거리자 양우석 의원이 당황하며 나를 쳐다봤다.
“물론입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정신을 차리고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미워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민주투사들과 함께 투쟁하고 싸웠던 열사였다.
독재 정권 치하에서도 변절은 꿈도 꾸지 않았다.
당시 시대에는 변호사로서 떼돈을 벌 수 있었음에도 한사코 어려운 이들과 동행했다.
나이를 떠나 친구였던 주무형 대통령과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삶을 소진해 온 사내.
서슬 퍼런 정권 시절에도 친구와의 의리를 꿋꿋하게 지켰다.
조국의 미래를 위한 마음이 진심이었던 만큼 당시 정권에 고개 숙이지 않았다.
물론 타협하면 삶이 편해질 수 있음에도 예비 대통령 김현재는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었다.
친일파 언론에 선동된 어리석은 자들의 독설에서도 저 미소를 끝내 거두지 않았다.
토착왜구들과 언론들은 그의 DNA까지 탈탈 털어냈을 정도다.
잔인하고 냉혹한 심판 과정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인물.
마치 혹한 속에서 무심히 흔들리는 강직한 대나무 같은 남자였다.
내가 회귀하던 시점까지 한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국가를 경영했던 김현재.
쥐와 닭과 그의 부역자들이 곳간을 다 털어먹어 텅 비어 버린 나라를 떠안았으면서도 국가의 위신을 다시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주무형 대통령이 다져 놓았던 민주주의 시스템이 다 망가져 가고 있었지만 단숨에 회복시켰다.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그의 성정 때문에 내가 이 시점으로 다시 회귀하던 때까지도 무수히 공격을 받았다.
물론 사람이니 완벽할 수는 없었다.
그가 펼친 정책 중 주로 인사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계속해서 자리가 바뀌는 권력자 밑에서 자신의 실체를 감추고 살아남은 간신배들.
그런 자들이 알게 모르게 김현재의 주변에도 포진해 있었다.
보란 듯이 국민들과 대통령을 속이며 고위직에 올랐다.
하지만 그들의 치부가 속속 밝혀졌다.
세상은 넓고 그만큼 쓰레기들도 곳곳에 넘쳤다.
긴 시간 권력과 타협하며 연명해 온 부패한 영혼을 일거에 청산하는 건 불가능했다.
국가를 경영하다 보면 동료 일꾼들 틈에 분명 개인의 욕망을 숨긴 채 살아가는 이들이 천지다.
오죽했으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했겠는가.
영입한 인사들의 치부가 드러날 때마다 수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욕을 다 먹었다.
일국의 존경받는 수장인 동시에 또 가장 많은 원망을 듣는 존재이기도 했던 김현재.
그는 아직 그의 앞에 펼쳐질 운명을 알지 못하는 눈빛이다.
나를 보며 아이처럼 웃는다.
“워낙 유명한 분이고 소문을 들었습니다. 김현재입니다.”
김현재가 손을 내밀었다.
전혀 거만하거나 무례하지 않았다.
먼저 스스로를 낮추고 손을 내밀었다.
“소문은 언제나 과장되기 마련입니다. 장태산입니다.”
환히 웃으며 겸손하게 손을 맞잡았다.
그렇다고 괜히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인간 대 인간, 성인 대 성인이 처음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다.
갑과을의 관계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왼손이 마저 악수한 손을 덮어왔다.
꽉!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상대를 탐색하기 위한 손길은 아니다.
그의 진심이 담겨 있는 따듯한 손길이었다.
- 민족 수호자와 조우하셨습니다.
“!!!”
그 순간 들려온 알림음.
깜짝 놀랐다.
생각지 못한 거창한 멘트에 울림까지 전해졌다.
회귀 전에도 김현재 대통령이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의 메시지가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 태백산 할아버지가 좋아합니다!
- 지리산 할머니가 격려 포인트를 지급했습니다.
한민족 조상신들의 반응이었다.
김현재 예비 대통령을 다시 천천히 바라봤다.
“제가 너무 세게 잡았나요?”
내가 당황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오는 김현재 예비 대통령.
짧은 순간에도 배려를 잃지 않았다.
야비하고 속이 더러운 자들에게서 맡아지는 비릿한 냄새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아닙니다. 너무 따뜻한 손길이라 제가 놀랐습니다.”
“하하. 대표님이 따뜻한 분이시죠.”
양우석 의원이 옆에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도 많이 긴장하고 있었다.
과거 나국찬 의원과 마주할 때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앉으십시오.”
상석으로 자연스럽게 김현재 예비 대통령을 인도했다.
“그 자리는 비워놓도록 하죠.”
자연스럽게 입구 쪽 자리에 앉는 김현재 대표.
행동 하나하나가 몸에 밴 찐 겸손이었다.
“회장님도 앉으시죠.”
“알겠습니다.”
나도 자연스럽게 방석 위에 자리를 잡았다.
스윽.
상에 준비된 비닐장갑을 꼈다.
“제가 하겠습니다.”
“회장님 제가…….”
“인생 선배님들 앉아만 계십시오. 이런 자리는 나이 어린 제가 하는 게 맞습니다.”
지긋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는 김현재 대표.
눈빛에 나의 대한 호감이 넘쳤다.
“…….”
그에 반해 눈치를 보는 양우석 의원.
차기 대통령 후보와 나 사이에서 제법 긴장을 한 상태였다.
예고도 없는 만남을 주선했지만 그냥 놔뒀다.
수우욱.
큼지막한 토종닭 닭다리가 뜯어졌다.
능이를 비롯해 여러 한방 재료가 들어간 국물 속에서 푹 삶아진 육질 쫀쫀한 닭다리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드십시오.”
가장 연장자인 김현재 예비 대통령의 앞접시에 닭다리를 내려놓았다.
“장 회장님 먼저 드십시오.”
사양하는 김현재.
“대대로 내려오는 한민족 풍습에서는 연장자에 대한 예의로 가장 좋은 요리 부위를 대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요즘 세태가 많이 변했다 해도 기본 예의는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웃으며 대꾸했다.
“맞습니다. 기본 예의는 지켜져야 세상이 올바르게 돌아가는 법이죠. 닭다리는 대표님 먼저 드십시오.”
“삼고초려도 아니고 그럼 다리 한쪽은 제가 먹겠습니다.”
김현재 대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닭다리를 받았다.
“나머지 한쪽은 나라를 위해 큰일하시는 양 의원님이 드시고.”
“아니 이건 회장님이…….”
“몸보신하실 나이십니다. 사양하지 마십시오. 전 물만 마셔도 하루를 활기차게 살 수 있는 청춘입니다.”
“하하하하. 맞습니다. 장 회장님이 권할 때 그냥 드십시오. 몸이 건강해야 나랏일도 하는 법입니다.”
김현재 대표는 작은 일에도 껄껄껄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럼 받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몸보신이 절실하던 시점입니다.”
양우석 의원의 앞접시에도 나머지 닭다리를 내려놓았다.
“국물이 예술이네요.”
국자로 버섯과 야채 육수가 푹 우러난 국물을 떠담아 건넸다.
구수하고 담백한 백숙 육수가 방안에 진동했다.
“회장님 고기는 제가…….”
양우석 의원이 국자를 잡으려 했다.
“요즘은 셀프가 대세죠.”
“네???”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닭을 분해했다.
닭다리를 뜯어내자 남아 있는 부위는 크게 몇 개 없었다.
그중에서 내가 선택한 부위는.
“아니 그걸 왜 드십니까?”
양우석 의원이 내가 집어 든 닭고기 부위를 보고 물었다.
“문제 있나요?”
“날개 부위도 있고 살점 많은 분위도 많은데 하필 계륵은…….”
그랬다.
내가 선택한 닭고기 부위는 계륵(鷄肋).
계륵은 삼국지 조조편에 나오는 유명한 고사로 그 의미가 전해진다.
“저도 궁금하군요. 특별히 계륵을 택하신 이유가…….”
김현재 대표도 나의 의중이 궁금한 듯 접시 위 계륵을 보며 물었다.
씨이익.
나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 한 줄기.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나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계륵은 말입니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