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9장. 상남자.
‘얼마면 되겠냐니? 이게 지금 무슨…….’
로리아나는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갑작스럽게 영혼이 이탈하는 듯한 경험을 하며 다른 세상으로 이동했다.
과거 경전과 역사서에나 상세하게 언급되고 있는 솔로몬 대왕의 완벽한 궁전.
실로 아름다웠다.
오랜 세월을 거듭해 오며 부서지고 마모된 지금 실제의 궁전과는 달랐다.
이스라엘의 영광을 대변하는 완벽한 솔로몬 궁전의 모습은 로리아나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었다.
게다가 자신이 솔로몬 대왕의 직계 후손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야훼를 섬기는 것과 또 다른 감동이 밀려왔다.
그렇게 이어지고 있는 대화였다.
믿기 힘들지만 이미 다니엘과 솔로몬 대왕은 아는 사이였다.
그것도 보통 사이가 아닌 듯 무척 가까워 보였다.
마법에 이어 신성력도 남다른 다니엘이 보통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인간 같지 않았다.
인간의 탈을 쓰고 지상에 강림해 있던 신이 아닌가 싶었다.
그의 몸 주변에서는 오라도 일렁였다.
황금관을 쓴 솔로몬 대왕에 버금갈 정도로 화려하게 일렁이는 다니엘의 오라.
미국에서 봐왔던 다니엘의 모습과 달랐다.
솔로몬 대왕도 다니엘을 조심스럽게 대하는 게 느껴졌다.
“후훗.”
다니엘은 솔로몬 대왕의 파격적인 말에 소소한 웃음을 터트렸다.
“동생……. 좀 봐주게.”
솔로몬 대왕이 아쉬운 입장을 내비쳤다.
‘도대체 누구의 부탁을 받은 거야?’
중개자로 선정됐다는 솔로몬 대왕의 발언.
감히 신의 존재인 솔로몬 대왕을 중개자로 선택한 존재가 누구인지 로리아나는 궁금했다.
“!!!”
그 순간 로리아나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한 존재.
‘설마?’
“전 야훼를 믿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로리아나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녀가 모시는 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단호하게 부정하는 다니엘.
빈말이 아닌 것 같았다.
야훼의 성녀인 로리아나가 버젓이 앞에 있는데도 거침없이 자신의 뜻을 밝혔다.
심장이 파르르 아파 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
충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야훼를 위해 성전을 건설했던 솔로몬 대왕도 다니엘의 말에 동조했다.
“그런데 왜 야훼를 대리하는 중개자가 되셨습니까?”
‘중개자?’
로리아나에게는 계속 거슬리는 단어, ‘중개자’.
도대체 뭘 중개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 동생에게 가장 중요한 게 있지 않나. 흐흐.”
솔로몬 대왕이 마치 야비한 장사꾼처럼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웃었다.
“동생은 모르겠지만 신들 사이에 난처한 일이 발생하면 쌍방에 가장 가까운 이를 중개인으로 삼을 수 있지.”
“수수료를 받는 겁니까.”
“그렇지!”
‘꿈은 아닌 거지?’
로리아나는 사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둘의 대화를 통해 짐작해보면 야훼가 다니엘과의 거래를 위해 솔로몬을 중개자로 내세웠다는 소리였다.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쉽게 이해가 가는군요.”
“하하하하. 동생이 똑똑해서 좋아.”
솔로몬 대왕과 다니엘은 죽이 잘 맞았다.
“야훼가 직접 오는 겁니까?”
“대리인이 있지 않나.”
“대리인요?”
“바로 여기 야훼의 성녀가 바로 대리인일세.”
“네???”
“저요???”
***
신들의 세계에 진입하는 순간 과거 인간 세상에서의 평판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내가 알던 신들 상당수가 인간계에서 종교적으로 추앙을 받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신의 세계에 들고서야 깨닫게 된다.
인간 세상에 머물 때 누리고 들었던 명성과 칭송은 모두 부질없음을.
이곳 신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포인트!
그가 인간의 탈을 쓰고 살면서 진실하게 쌓아올린 기록물의 가치만이 중요했다.
솔로몬 대왕이 한때 섬겼던 야훼의 중개자가 됐다.
신계에 든 신은 그제서야 신의 허상을 면면이 깨닫게 된다.
조물주 앞에서는 모두가 다 평등하다.
거대한 우주 법칙 속에서 중시되는 건 오직 카르마뿐이다.
로리아나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자신이 신실하게 믿었던 야훼의 본 모습과 감춰진 신들의 비밀 이야기에 다소 실망한 눈치였다.
굳이 위로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허상은 관념을 깨고 바로 잡아야 실상이 되는 법이다.
포인트 하나 얻기 위해 신들도 서로를 속이고 또 속였다.
물론 악신들처럼 대놓고 무리한 수를 쓰지는 않는다.
대신 당하는 쪽이 바보 인증을 받는 거다.
조금 전 넥타를 팔아먹던 솔로몬 대왕에게 눈 뜨고 당한 나처럼 말이다.
사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
처음부터 솔로몬은 나를 작업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로리아나가 야훼의 대리인 자격으로 이곳에 소환돼 왔다는 말은 충격적이다.
야훼가 아주 영악했다.
자신과 로리아나를 위기에서 구해준 값이 청산하기 만만치 않다는 걸 알고 솔로몬을 투입시켰다.
중개인으로서 공정한 거래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야훼와 솔로몬이 짬짜미를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여지가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로리아나를 야훼 대신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 역시 나를 보며 큰 눈을 껌뻑였다.
“의외군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분이라면 가능한 일이지.”
야훼에 대해 어느 정도 간파한 솔로몬은 이 상황에 담담하게 임했다.
- 야훼가 정말 대단하네요.
귀신도 어이가 없는지 인정했다.
정상적인 계산법대로 지불하기 아까워 솔로몬과 로리아나를 대신 내세운 야훼.
쉽게 당해 줄 생각 없다.
“협상 대상은 뭡니까?”
“신성 저주를 해제한 비용. 여기 있는 야훼의 성녀를 구해준 값……. 그리고 자잘한 기타 등등이네.”
“포인트도 넘치는 분이 중개자가 왜 필요합니까?”
내가 아는 야훼는 조상신들 중에서도 상위 클래스다.
“이번에 적금 통장 털렸어.”
“네?”
“저주를 받으면 그냥 받는 줄 아나? 카르마 법칙은 냉정해. 야훼가 당할 정도라면 상대측에서 그만한 대가를 지불했다는 걸 의미해.”
“……그건 몰랐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악이 넘쳐나네. 인간들은 보편적 인류애와 선함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신에게 영혼을 팔고 있어. 자살자 수가 증가하는 이유가 그거야. 본인들은 모르지만 귀한 인간의 생을 다 살아보지도 못하고 떠나면 엄청난 어둠의 카르마를 짓게 되지. 그게 다 악신에게 올리는 공양물이 되는 셈이지.”
“…….”
신들이 정한 법칙은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
“야훼께서 밀린다는 건가요?”
로리아나가 놀라서 다급하게 물었다.
“대단한 조상신도 악신들 물량에는 장사가 없어.”
솔로몬의 설명은 이해가 쉬웠다.
아무리 야훼를 따르는 이들이 많다지만 세상에 넘쳐나는 악인들만 못하다는 소리였다.
일개 조상신으로 전락한 야훼가 이번에 아주 제대로 깨 털린 모양이다.
나에게까지 포인트를 넘기고 나면 상당 기간 종전의 기세를 회복하기 힘들 것 같았다.
- 느낌적으로 대박 향기가 납니다. 흐흐흐.
귀신이 나보다 더 음흉하게 웃었다.
느끼지 마 귀신아.
너에게 줄 포인트는 1도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안타깝지만 야훼를 비롯해 모든 신들이 고생하게 될 거다. 보란 듯이 내세울 만한 후손들이 세상에 태어난 라인의 신들만 버틸 수 있어.”
말과 함께 나를 은근히 바라보는 솔로몬.
지혜의 대명사답게 눈치도 빨랐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야훼도 기본적으로 양심은 존재해. 정해진 포인트는 당연히 지급할 거야.”
“그런데 뭐가 문젭니까?”
목소리에 힘을 담았다.
그동안 야훼의 쪼잔함에 얼마나 치를 떨었던가.
오늘은 그를 상대로 제대로 갑질하기 좋은 날이다.
“동생. 야박하게 그러면 안 돼.”
“오는 포인트가 고와야 가는 포인트도 고운 법입니다.”
“하하하. 그 말은 명언이야.”
솔로몬은 유쾌했다.
말 그대로 공인 중개사처럼 계약이 성사되면 양쪽에서 포인트를 받을 게 확실했다.
양쪽 손에 떡을 쥐고 벌이는 꽃놀이 패.
보아하니 이것저것 부수입도 짭짤하게 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로리아나가 마신 넥타 가격도 정가는 아니어도 할인가로 계산할 게 확실했다.
“명료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분께서 말씀하셨네.”
말을 살짝 끊으며 로리아나를 바라보는 솔로몬.
느낌이 팍 왔다.
“할부를 원하시는 겁니까?”
“오!!! 역시 동생이야!”
야훼가 머리 굴리는 게 다 보였다.
돈 없는 포인트 채무자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그중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은 할부로 분할상환하는 것이다.
“할부는 신용이 기본 전제 조건인데…….”
바로 수락하지 않았다.
로리아나를 대리인으로 세운 거리이지만 챙길 건 챙겨야 했다.
“미안하다고 전해달라는군.”
“직접 오셔서 말해야죠.”
“그건 불가능해.”
“왜요?”
“야훼 같은 큰 조상신들은 함부로 신계에도 강림하면 안 돼. 그리고 인간계 개입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그러니까 평소 잘했어야지.
푼 돈 포인트 아끼다 오늘 제대로 임자 만났다.
“아무리 그래도.”
“미안해요. 다니엘……. 내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할게요.”
- 헐…….
귀신이 로리아나의 사과에 대책 없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 심정은 나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로리아나가 중간에 나설 줄 몰랐다.
“내 후손이 저리 나오는데 안 받아 줄 텐가?”
솔로몬이 슬쩍 목소리를 깔았다.
연민을 자극하는 두 사람.
아예 로리아나는 슬퍼 보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말인가? 할부를 허락할 텐가?”
“네.”
고개를 끄덕였다.
- 형님! 정에 이끌리면 안 됩니다! 여기서 강하게 나가셔야 합니다!
귀신이 나의 말에 발끈했다.
“하하하하. 고맙네. 그렇게 알고 계약을…….”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몇 개월 할부면 됩니까?”
“길면 길수록 좋다고 했네.”
“저금리면 더 좋겠죠?”
“두말하면 잔소리지.”
“그 조건도 받아들이죠. 50년 분할 상환 어떻습니까?”
“50년이라…….”
잠시 머뭇거리며 야훼와 교신을 하는 듯한 솔로몬.
“고맙다고 하는군.”
“무이자로 책정하겠습니다.”
“동생은 역시 통이 커!”
중개자 신분인 솔로몬이 흡족해했다.
그리고 나는 로리아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로리아나 구출 비용은 따로 받지 않겠습니다.”
“다니엘님…….”
날 보는 로리아나의 두 눈이 촉촉해졌다.
“역시 상남자야!”
“그 대신…….”
천천히 로리아나에게 다가갔다.
“!”
나와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지자 로리아나가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스윽!
천천히 손을 그녀의 볼에 가져갔다.
그리고…….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