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8장. 중개업자.
“아…….”
로리아나는 꾹꾹 눌러 참았던 긴 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멈추지 않고 벌어졌던 환란의 장.
신심을 다해 믿었던 야훼가 저주를 받고 힘을 상실했다.
받아들이기 힘든 가장 견딜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감히 야훼가 어떤 존재인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보증하는 유일한 신이었다.
그런 존재가 아사신의 저주에 고귀했던 힘을 상실했다.
아사신이 이렇게 강한 존재로 급부상했다는 사실을 문제가 닥치고 난 뒤에야 파악했다.
점점 그 기세가 강해지고 있었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할 줄 생각도 못 했다.
하물며 보통의 인간들의 정신을 파고들어 조종하고 악의 씨앗을 심은 후 악마의 힘을 드러냈다.
로리아나의 선에서도 감히 어떻게 대처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진 아사신의 파괴적인 힘.
그 틈에 뼈아픈 배신도 경험했다.
그것도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었던 가문의 장로가 배신했다.
차일드 가문의 장로 직분은 아무나 맡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들이 행사할 수 있는 힘은 가히 중소 국가와 맞먹을 정도다.
특히 마가 장로가 굴리는 자금은 일반인들이 결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초월적인 수준이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세상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모든 걸 조종한다고 자부해 왔지만 착각이었다.
엄연히 자신을 겨냥하고 날아온 총탄과 급습.
평소 움직이는 패턴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꿈이라면 좋겠다…….”
옆에 있던 사라가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절대 꿈일 수 없었다.
사방은 아사신의 시체로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성스럽고 거룩했던 성전은 달빛 아래서 낱낱이 오염됐다.
“야훼시여…….”
로리아나는 자신이 붙들고 살았던 신을 찾았다.
며칠 동안 어떤 형태로든 전혀 응답이 없었던 야훼.
모든 경로의 응답이 차단됐다.
무기력함을 제대로 느꼈다.
지금까지는 야훼의 힘을 받는 자신의 한마디면 세상이 하루아침에 망할 수도 있다고 믿었다.
착각이었다.
그 의식의 빈틈을 노리고 아사신이 치고 들어왔다.
모멸, 치욕, 좌절, 그리고 분노가 대책없이 뒤섞여 몰아쳤다.
할 수 있다면 복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직접 경험한 아사신의 힘은 로리아나가 대적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다니엘이 아니었다면 너와 나 둘 다 죽었겠지.”
사라가 다니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가 장로의 육체를 빼앗은 직후 모습을 감춘 무함마드.
무함마드가 사라진 이후 다니엘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성전기사단원들은 그런 다니엘의 눈치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들 또한 다니엘이 함께 있지 않았다면 아사신의 손에 흉한 제물이 되었을 것이다.
“큰 빚을 졌어.”
“맞아. 목숨값은 무엇보다 소중하니까.”
‘야훼시여. 이 빚을 어찌 갚아야 하나요.’
사라가 동조한 수준의 것보다 로리아나가 체감하는 대가는 무척 컸다.
자칫 야훼의 모든 힘이 소멸될 뻔했다.
현시대의 이스라엘 민족 역시 과거처럼 야훼를 맹신하지만은 않았다.
기계화 문명이 발달하며 인간들 안에 잠재돼 있던 본연의 신의 형상이 깨어나고 있었다.
의식주와 같은 물리적 부분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역에서도 인간들의 각성이 시작된 것이다.
과거 오랜 세월 동안 일정 수준 각성한 선지자들만이 깨달아온 진리.
그러나 이제는 그 진리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보통사람들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보이지 않는 신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 변화가 동반됐다.
그런 부분에서 야훼의 영향력도 과거와 같지 않았다.
자연의 변화를 이용해 신의 힘을 강화하고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던 시절이 다 지나가 버렸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터져 버린 신성 저주.
이제는 아사신의 악신들에게도 신성력이 밀렸다.
천만다행으로 다니엘이 함께해주어 겨우 야훼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에 따른 대가가 가볍지 않을 터였다.
파앗!
그 순간 로리아나가 빛에 휩싸였다.
“!!!”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었다.
너무 눈이 부셔 잠깐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그 순간 눈앞에 보이는 광경.
“여기는…….”
***
- 이, 이곳은 어딥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귀신도 함께 점핑했다.
온전하고 깨끗한 신전이 눈앞에 보였다.
예전에 봤을 때보다 더 웅장해진 건축물.
“솔로몬 대왕 시절의 이스라엘 왕궁.”
- 전설의 솔로몬 대왕요???
귀신도 놀라워했다.
성전산의 신전을 건축했던 솔로몬 대왕.
야훼와 여러 가지로 얽혀 있는 그가 날 소환한 것이다.
“하하하. 동생 어서 오시게.”
공간을 열고 그가 나타났다.
과거보다 더 큼지막한 황금관을 머리에 썼다.
입고 있는 고급진 옷도 광채가 더했다.
뒤로 그를 호위하는 신하들과 시녀들이 수십 명 붙었다.
- 진짜 솔로몬 대왕입니까…….
귀신이 당황해하며 솔로몬 일행을 힐끔힐끔 봤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신하들과 시녀들 역시 환영 상태가 아니다.
나에게 착실하게 5%씩 포인트를 받아가는 빨대 솔로몬 왕이 그동안 무수히 레벨 업을 거듭한 듯했다.
풍기는 위세가 언뜻 봐도 강렬했다.
중급신에 불과했던 그에게서 상급신의 아우라가 오롯이 느껴졌다.
“갑자기 어인 일입니까?”
솔로몬 왕에게 사기를 당한 게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나였다.
씨익.
아니나 다를까 솔로몬 대왕이 속을 알 수 없게 묘한 미소를 띠며 웃었다.
“다니엘!”
그뿐만이 아니다.
로리아나도 같은 공간으로 소환됐다.
인간이지만 야훼의 성녀이니 공간 이동이 가능한 것 같았다.
“로리아나…….”
“이게 무슨 일인가요?”
로리아나가 무척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널 불렀다. 성녀여.”
“……누구십니까?”
한없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는 솔로몬을 향해 로리아나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 솔로몬 대왕님이라고 하네요.
귀신이 나서며 먼저 답했다.
“네…… 솔로몬 대왕님요?”
로리아나가 멍한 눈으로 솔로몬 신을 쳐다봤다.
“넌 나의 직계 피를 이은 후손이다.”
솔로몬이 로리아나를 흐뭇하게 바라본 이유가 있었다.
몇천 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임에도 직계라는 족보를 따지는 솔로몬.
하긴 둘이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것도 같았다.
“다니엘…….”
로리아나가 나를 돌아보며 추가 설명을 원했다.
“맞습니다. 솔로몬 대왕님.”
“아!”
진심으로 놀라는 로리아나.
“이곳은 신들의 공간입니다. 바깥 시간과 다릅니다.”
“…….”
로리아나는 말을 들으며 눈만 껌벅였다.
아무리 성녀로서 살아온 삶이라 해도 이런 식의 신의 소환은 처음 경험할 것이다.
“저쪽으로 가지. 최근 건축한 정원이 볼만하네.”
솔로몬이 의기양양하게 앞장섰다.
역시 처음 만났을 때와 아주 많이 다르다.
환상으로만 보였던 모든 곳들이 이제는 실재하고 있었다.
괜히 배가 아팠다.
내가 번 포인트로 호의호식하고 있었던 솔로몬 대왕.
그에게서 허접한 마법을 배우고 대가로 빼앗긴 포인트.
지금 와서 정산비율을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 멋있네요. 엘프 여왕님 왕궁보다는 못하지만.
이계에서 신전 구경 좀 하고 다녔다던 귀신이 비교질을 시작했다.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기묘한 존재군.”
솔로몬이 장립의 영혼체를 보며 한마디 했다.
“인연으로 얽힌 잡귀입니다.”
- 자, 잡귀라뇨! 형님 동생 장립입니다! 장립!
“그를 잘 섬기게. 인정이 많은 친구야.”
솔로몬 대왕이 장립에게 팁을 주었다.
- 형님이 온정이 넘치기는 하죠. 흐흐흐.
솔로몬과 장립이 나를 두고 서로 통했다.
저벅저벅.
솔로몬을 따라 정원으로 이동했다.
“아…….”
로리아나가 먼저 감탄을 터트렸다.
폐허가 된 성전산 주변에 건축된 진짜 솔로몬 대왕의 옛 왕성.
신의 힘이 가미되어서인지 번쩍번쩍 광채가 달랐다.
“목이 마를 텐데 한잔하게. 넥타라 불리는 신의 음료수야.”
솔로몬이 정원에 흐르는 샘에서 황금 바가지로 물을 한 바가지 떠 건넸다.
“감사합니다. 대왕님.”
“할아버지라 생각하고 편하게 대하라.”
솔로몬이 핏줄을 만나서 그런지 말투도 부드럽게 건넸다.
“동생도 한잔하고.”
다시 물을 떠서 나에게도 권하는 솔로몬.
그렇지 않아도 목이 탔던 터였다.
아사신들을 불태우고 후려 패는 사이 심력이 제법 소모됐다.
“자네도 마실 텐가?”
-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존경하옵는 대왕님!
빠뜨리지 않고 귀신에게도 넥타를 권하는 솔로몬.
꿀꺽꿀꺽.
시원하게 한 사발을 마셨다.
복숭아맛 아이스티 같은 맛이 났다.
곧 몸에 힘이 돌고 정신이 명료해지는 게 느껴졌다.
신들이 마시는 귀한 음료다웠다.
- 캬아! 개꿀맛입니다! 한 잔 더 마셔도 됩니까?
아니나 다를까 귀신이 환장했다.
“물론이네. 듬뿍 떠서 한 잔 더 하게.”
솔로몬 대왕이 귀신을 보고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이상한 기시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언젠가 경험한 듯한 이 더러운 기분…….
- 음료수 값이 포인트로 정산됐습니다.
“!!!”
딱 그 순간 들려온 알림음.
“이런! 동생에게 미리 말하지 못했네. 친족을 제외하고 넥타는 모두에게 정가로 제공되네.”
씨바…… 솔로몬!
- 그래야죠! 친한 사이라도 계산은 정확해야 서로 편한 겁니다.
계산 정확?
확 저걸!
“하하. 그렇지. 장립 자네는 나중에 큰 신이 될 것 같네.”
솔로몬이 귀신과 죽이 맞는지 호탕하게 웃었다.
- 지혜의 대명사이신 대왕님이 보셔도 그렇죠?
“물론이야. 나중에 찾아오게. 내가 좋은 곳도 보여주겠네.”
솔로몬이 장립을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 좋은 곳이라면…….
잡귀가 또 귀를 쫑긋 세웠다.
“큼큼.”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잠깐 큼큼거리는 솔로몬.
직계 후손이라는 로리아나의 눈치를 보는 것 같다.
- 기, 기대하겠습니다! 대왕님!
상황을 바로 눈치 채고 꼬리를 살랑거리는 귀신.
골치가 지끈거렸다.
“그런데 저를 왜 소환하셨습니까?”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니고 알 것 다 아는 사이이니 본론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원 관람료까지 뜯어갈 판이다.
“……부탁을 받았네.”
“부탁요?”
“그분께서 중개인으로 날 내세웠네.”
“중개인이라면…….”
“동생, 얼마면 되겠나?”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