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4장. 전설의 힘.
“낸시…….”
힐러리는 크게 당황했다.
그녀를 기다리겠다고 말했던 낸시가 사라져 버렸다.
대신 방 안에 놓여 있는 짧은 편지 한 장.
- 내 작고 귀여웠던 꼬마 아가씨 힐러리에게…….
낸시와 힐러리의 인연은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됐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자원봉사를 다녔던 힐러리.
힐러리는 그곳에서 주술사 낸시를 만났다.
그녀와 함께 인디언 보호구역 곳곳을 둘러보고 산책하는 일이 그 시절의 즐거움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름다운 동화 한 편 같은 추억이었다.
하지만 인디언 보호구역 봉사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동안 낸시를 잊고 살았다.
세월이 흘러 정치에 입문하고 난 뒤 우연히 다시 조우하게 된 낸시.
- 난 내가 태어난 대지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서운해하거나 슬퍼하지 말아요. 인연이 다하면 우리는 바람과 흙으로 다시 돌아감이 대자연이 정한 이치랍니다.
“흐윽!”
이곳에 오기 전까지 화가 잔뜩 나 있던 힐러리였다.
그러나 이미 가슴을 가득 채웠던 화는 사라진 뒤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고에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 진한 감정.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별의 아픔이었다.
남편을 비롯해 주변 누구보다 크게 힐러리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던 낸시였다.
- 이 또한 운명입니다. 힐러리……. 나의 사랑스런 친구. 마음을 내려놓으세요. 신들의 공평한 추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 옛날 우리가 같이 보았던 풍요로운 대지의 마른 흙이 되어야 합니다. 주어진 시간은 독수리 부리에서 꼬리까지만큼 짧습니다.
낸시의 편지는 성자들의 중얼거림처럼 담백했다.
또로록.
힐러리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 치열하게 싸우되 정정당당하게 나아가세요. 패배하더라도 깨끗이 승복하세요. 내가 아는 당신은 충분히 강한 전사입니다.
낸시의 편지에는 미래를 예견하는 듯 위로가 넘치고 있었다.
자신이 사라진 후 홀로 버텨내야 할 힐러리를 위로했다.
- 창밖으로 구름이 흘러가네요. 봄이에요……. 당신과 내가 마셨던 작은 샘물의 달콤함을 잊지 말아요. 내 친애하는 친구 힐러리……. 당신에게 내 마지막 힘을 다해 축복합니다. 운명대로……. 그냥 흐르세요. 결코 그 무엇도 거스르지 말고.
편지는 그렇게 끝났다.
마지막까지 강조하고 있는 ‘운명대로’.
낸시는 시작되지 않은 선거에서 힐러리의 패배를 암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밉거나 원망스럽지 않았다.
짧지만 함축되어 있는 두 사람만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래요 낸시……. 운명대로 흐르게 놔둘게요. 단, 마지막까지 내 스타일대로 최선을 다해 돌진할 겁니다.”
분노로 가득차 있던 조금 전과 달리 이제는 힐러리에게서는 평안이 보였다.
영혼의 친구가 전해주는 편지글에서 위로를 듬뿍 느꼈다.
죽음 뒤에 찾아올 영광을 생각하는 인디언 전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힐러리.
눈에 생기가 돌며 강렬한 신념이 반짝였다.
“트럼프……. 후회 없이 싸워보자!!!”
***
- 이 땅의 신들이 당신을 축복합니다!
- 이 땅의 영혼들이 당신을 위해 축제를 준비 중입니다.
- 이 땅의 신들이 내린 축복에 의해 이곳에서 벌어들이는 카르마 포인트 20% 가산이 들어갑니다.
- 이 땅의 정령들이 축복합니다. 농사를 지으면 소출이 대폭 늘어납니다.
- 이 땅의…….
연달아 들려오는 격한 알림음에 마음이 절로 흐뭇해졌다.
트럼프는 곧바로 떠났다.
힐러리를 상대로 정신적 승리를 맛본 뒤 그 기세를 몰아 선거운동에 박차를 가하러 간 것이다.
낸시의 청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손해날 일이 없었다.
머물 자리가 없어 갈 곳을 잃은 인디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했다.
당연히 계산이 깔렸다.
인디언들은 산 자보다 죽은 영혼들이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많았다.
착하게 살았던 이들이 많은 만큼 포인트가 대부분 빵빵하리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상부상조가 필요한 순간.
어려울 때 이웃을 돕는 두레의 전통이 우리 민족에게 있었다.
과거 먼 조상들이 한핏줄이었을 가능성도 크다.
같은 DNA를 소유한 이들끼리 잘먹고 잘살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연달아 울리던 알림음이 마지막을 향해 달렸다.
- 형님, 표정이 왜 그렇습니까? 누가 보면…….
미친놈 같지?
기분 째진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업된 상태다.
신들의 버프가 쩔었다.
좋은 건 넘칠수록 더 좋은 법이다.
- 이 땅의 신들이 당신에게 계약의 대가로 엄청난 카르마 포인트를 지급합니다!
파아아아앗!
알림음과 함께 흠뻑 느껴지는 엄청난 카르마 포인트의 힘.
눈이 부셔서 나도 눈을 감아야 할 정도가 됐다.
- 신성이 레벨 업 하셨습니다!
신성 레벨 업!
생각지도 못한 특혜까지 받았다.
중금리로 떼이고 이것저것 요즘 지출이 많았던 상황이다.
장립의 영혼까지 다시 세팅하느라 통장이 거의 비었을 판이다.
그 와중에 터진 신성 레벨 업!
엄청난 유산을 하루아침에 상속받은 졸부 아들 수준이 됐다.
- 혀, 형님.……. 아우라가!
장립이 나를 보며 덜덜 떨었다.
이제 나도 나의 신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 신선이 되시겠습니까? 럭셔리 우화등선이 가능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바로 알림음이 미끼를 던졌다.
꿈쩍하지 않았다.
날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게 분명했다.
- 나바로의 수호신이 될 수 있습니다.
- 대표 조상신 지위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대표 조상신?
순간 퍼뜩 회귀 인생을 예견했던 꿈속 할배가 떠올랐다.
나를 이렇게 회귀시켰던 이도 조상신이라고 했다.
그것도 상당히 레벨이 높은 조상신.
이번엔 나도 기분이 얼떨떨해졌다.
인디언 혼혈 영매를 통해 얻게 된 이득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어느 정도 기대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 마지막으로…….
연속 터지던 혜택이 어느새 마지막에 당도했다.
뭔가 큰 게 나올 것 같아 기대감이 급상승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다음 멘트를 기다렸다.
그 순간.
- 대추장들의 전설의 힘이 전승되었습니다.
대추장들의 전설의 힘?
대박 느낌이 왔다.
인디언들을 이끌던 이 동네 맹주들의 힘이 나에게 전달되는 모양이었다.
겸손한 자세로 두 손을 모았다.
- 이 땅에서 씨앗을 뿌리면 회임 가능성이 대폭 늘어납니다!
응? 회임???
갑자기 이해 불가능한 말이 들렸다.
씨앗을 뿌리면 회임 가능성이…….
“헛!!!”
눈이 번쩍 떠졌다.
- 형님! 뭔가요? 지금 큰일 터진 것 맞죠? 궁금해 죽겠습니다! 정보 좀 같이 공유합시다!
대추장들, 도대체 당신들 뭐 했던 거야!
전설의 힘이 그 힘이었어?
한순간 기대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며 실망감이 확 밀려왔다.
이것은 절대 바라지 않는 힘이다.
아직 할 일 많은 청춘이다.
그런데 일이 터지면…….
“으으.”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거칠게 내저으며 부정했다.
- 형님, 왜 그러십니까? 저주라도 걸렸습니까?
그래 이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앞으로 몸과 마음을 좀 더 청정하게 관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 형님! 형니이이이이임!!!
귀신이 내용을 알고 싶어 발광했다.
“애들은 몰라도 돼.”
- 제가 왜 애입니까! 저도 알 것 다 아는 나이입니다! 몸뚱이만 없지 제 영혼은 이미 타락했습니다!
뻔뻔한 귀신이 스스로 타락했음을 고백했다.
“억울하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든가.”
갑질을 부렸다.
또로록.
허탈감으로 잔에 와인을 가득 채웠다.
트럼프와 힐러리와 함께 마시기 위해 준비해 놓았던 와인.
펜트하우스에서 바라보는 LA 전경이 봐줄 만했다.
- 와아아아! 진짜 씨…….
귀신이 말을 하다 뒷말을 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불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어느 해보다 뜨거울 여름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한국에서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을 냄비.
곳곳에서 낌새가 감지됐다.
주순자가 벌인 권력 패악질에 같이 숟가락을 올리고 퍼먹던 놈들이 짜증을 냈다.
적정 수위를 넘으면 무조건 사고가 나는 법이다.
특히 특혜와 갑질로 무장해온 이들에게 주순자는 이미 뿌리째 뽑아야 할 잡초로 전락했다.
꿀꺽.
와인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내가 회귀했던 시점인 2020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나비 효과를 차단하기 위해 최대한 조심했지만 비틀어진 부분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좀 더 치밀하게 판을 짤 시기였다.
내가 이미 겪은 바 있는 미래를 비틀지 않고 나 또한 그 미래를 대비할 시점이다.
리장창과의 휴전 협정이 끝나면 놈들은 무지막지하게 다시 공격해 올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중국 공산당의 힘은 강해졌다.
견제해야 할 미국은 누구보다 위대한 부동산 대통령을 맞이한다.
러시아의 차르를 비롯해 세계 지도자들 상당수가 보수 강경론자들로 채워진다.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 같은 미래.
“IMF는 일단 막은 것 같고…….”
제2의 IMF 시발점이었던 부실기업들을 떠안았다.
그것만으로 불이 붙을 심지는 제거됐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세계 경제 상황.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어딘가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전혀 예상되지 않는 그 무엇.
타다닷.
그때 창밖으로 일련의 그림자들이 바삐 움직이는 게 보였다.
주변 건물 옥상에 포진하는 저격수들.
그리고.
- 어? 형님…… 이건 또 뭡니까?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