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3장. 운명대로(3).
“!!!”
힐러리는 다니엘이 무심히 내뱉은 ‘운명대로’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자신도 모르게 먼저 걸음이 멈췄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곳에 오기 전 낸시가 한 말이었다.
모든 일은 운명대로 흐를 것이라며 했던 말이다.
그 말을 다니엘이 그대로 내뱉었다.
지금 이 순간의 운명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말이다.
“무슨 운명?”
고개를 돌렸다.
발작적으로 힐러리가 다니엘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의 말끝이 개운하지 않았다.
낸시와 달리 다니엘이 내뱉은 ‘운명’이라는 단어에서는 불길함마저 느껴졌다.
대답 대신 뜻을 알 수 없는 모호한 미소를 짓는 다니엘.
‘처음부터 재수 없었어.’
잘생긴 동양 청년으로 충분히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외모지만 지금 힐러리에게는 재수 없는 놈에 불과했다.
만나 달라는 힐러리의 청을 수락했을 때만 해도 일말의 기대를 품었지만 결국 이런 판을 깔았다.
트럼프와 짜고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극도의 스트레스를 안긴 다니엘 장.
힐러리는 다시 한 번 독심을 품었다.
‘죽였어야 했어.’
다시 생각해도 후회가 밀려왔다.
오바마가 놈을 죽이려 할 때 적극 협조하지 못한 게 몹시 아쉬웠다.
“절 죽이지 못한 게 아쉬운 모양입니다.”
‘이 자식 독심술이라도 배운 거야?’
힐러리는 내심 화들짝 놀랐다.
나이도 어린놈이 눈치는 기가 막히게 빨랐다.
하긴 접수된 정보에 의하면 신비한 동양 무술에 대한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라 했다.
힐러리가 느끼는 경계심이 한층 높아졌다.
“웃으세요.”
“???”
“저희 할머니께서 어릴 적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뜬금없이 훈수를 놓는 다니엘.
“긴 세월 살아온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매일 웃지 못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갑자기 뭔 개소리야!’
적으로 간주한 청년의 훈계질에 힐러리의 인상이 더 굳어졌다.
평생을 거칠 것 없이 안하무인으로 살아온 그녀의 삶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났다.
가면이 벗겨진 뒤에 나타난 힐러리의 본 모습.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자가 아닙니다. 매일 매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매순간 웃을 수 있는 자가 진정한 인생 승리자입니다.”
“그 조언이 네 나이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인생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힐러리가 까칠하게 반응했다.
그녀에게도 매일 웃던 행복한 시절이 분명 있었다.
남편과의 첫 만남, 그리고 여러 선거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렀다.
그때가 힐러리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더 진했던 만큼 행복감은 기억에 오래 남지 않았다.
그래서 더 힐러리는 선거판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되면 자신의 기나긴 정치 인생이 보상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힐러리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정상에 서야 행복할 수 있는 여자였다.
“안타깝습니다.”
다니엘이 진심으로 안타까운 눈빛을 보였다.
“네까짓 게 뭔데 날 판단해! 난 내 인생의 길을 걷고 있어! 너나 똑바로 살아! 이 노란 원숭이야!”
힐러리는 극도의 적개심으로 이성적 사고가 마비되어 갔다.
이 순간 이미 완벽하게 다니엘과 틀어졌다.
돌아갈 수 있는 다리를 스스로 폭파해 버렸다.
인종 차별에 반대하던 평소 언행과 다른 태도를 보이는 힐러리의 모습.
다니엘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오! 노란 원숭이라니…….”
트럼프가 추임새를 넣었다.
“너희 둘 다 똑같아! 오늘의 이 수모…… 절대 잊지 않을 거야!”
힐러리가 온몸으로 독기를 내뿜었다.
자신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나자 가식에 가려져 있던 모든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운명대로!”
또다시 같은 말을 내뱉는 다니엘.
이번에는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됐어! 운명은 개척하는 거야!”
‘신이 정한 운명 따위는 없어!’
속으로 제 발목을 잡는 듯한 운명을 부정해 버리는 힐러리.
또각 또각.
발자국 소리에 힘을 주며 밖으로 나갔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트럼프가 통쾌한 듯 광소를 터트렸다.
으드득.
꼿꼿하게 걸음을 옮기며 이를 가는 힐러리.
서둘러 걸음을 움직였다.
오늘 이후 더 이상 다니엘이나 트럼프와는 타협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모든 건 내가 원하는 대로!’
지금껏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 경영해 왔던 힐러리는 끝까지 당당했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니엘과 힐러리의 날선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트럼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판은 내가 먹는다! 크크.’
그는 다니엘이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다.
이 순간을 기회라 여겼다.
평생 쌓았던 기술을 동원해 힐러리를 극도로 자극했다.
평소 듣지 못했던 교양 없는 공격에 힐러리가 흔들렸다.
틈을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졌다.
미끼를 문 힐러리는 정신줄까지 놓아 버렸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힐러리가 그렇게 돌지만 않았다면 반대로 다니엘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힐러리는 수완이 뛰어났다.
워싱턴 정가에서 그녀만큼 실력 좋은 정치인은 드물었다.
현직 대통령의 지원도 받고 있었다.
힐러리 쪽에서 파격적인 제안을 내걸면 다니엘이 흔드는 일도 가능했다.
하지만 힐러리는 이미 뚜껑이 열려 굴러들어온 복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다니엘에게 최악의 인종 차별 언행을 저질러 버렸다.
그 소리를 듣고도 화를 참은 다니엘은 성자 그 자체였다.
꿀꺽.
트럼프는 기분 좋게 와인을 마셨다.
승리자에게 허락된 한 잔의 붉은 와인.
오늘따라 더 꿀맛이었다.
***
- 와아아……. 성격 지립니다!
장립이 멀어져가는 힐러리의 뒷모습을 보며 질린 듯 고개를 저었다.
장립도 귀신이 됐지만 그 뿌리는 동양인이다.
동양인을 상대로 노란 원숭이라는 표현은 금기다.
- 앞으로 지지 철회입니다!
투표권도 없는 귀신이 할 말은 아니다.
세계를 쥐고 흔들었던 백악관 안주인다운 포스이긴 하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비난할 수만도 없었다.
저런 독한 구석이 있기에 패권국가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다만.
노란 원숭이라는 말을 하며 나를 격멸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 눈빛은 절대 잊을 수 없다.
꽁꽁 싸매어 놓았던 인종 차별 발언.
그녀의 본심이 확실했다.
어차피 백악관 주인들은 대한민국을 매번 이용하기만 했다.
무기를 팔아먹기 위한 호구 국가에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가장 알맞은 최전방 국가가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뻔했다.
그녀의 남편과 오바마가 해왔던 대로 일본 우대 정책은 계속될 것이다.
“다니엘, 자네가 참아. 힐러리가 요즘 독이 바짝 올랐어.”
트럼프가 빈 와인 잔을 들고 다가왔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오늘은 주저하지 않고 와인을 마셨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 이분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형님, 정말 힐러리가 아니라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겁니까?
천기는 누설하지 않았다.
과거에 트럼프가 될 거라 말한 적은 몇 번 있었다.
다들 믿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현실이 돼 가고 있다.
오늘 힐러리의 숨겨왔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났다.
독을 감추고 살아가는 화사(花蛇)와 같았다.
“형님이 제가 없는 동안 그녀를 화나게 한 것 아닙니까?”
웃으며 물었다.
“내가? 전혀.”
트럼프가 시치미를 뗐다.
이 정도 거짓말쯤은 트럼프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어제의 발언을 두고도 그런 적 없다며 우기는 일이 가능한 인물이 바로 트럼프였다.
- 진짜 뻔뻔 대마왕이네요.
같이 지켜봤던 귀신이 어이없이 바라봤다.
“오늘 선물 고마웠어. 동생 덕분에 스트레스 다 풀었어. 흐흐흐.”
“별말씀을요.”
역시 트럼프의 장점은 이런 것이었다.
힐러리는 처음부터 트럼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미국 정치판에 등장한 텍사스 무법자 트럼프.
앞으로 몇 년 동안 세상 사람들은 트럼프를 우러러보게 된다.
“안 보는 사이 더 멋있어진 것 같은데?”
트럼프가 화제를 돌리며 능청을 떨었다.
강한 자에게 아부할 줄도 알았다.
“공화당 예비 선거에서 압도적이라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모두 동생 덕분이야.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믿음직스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불리하거나 필요 없으면 하루아침에 안면 몰수하는 인물이 바로 트럼프였다.
“형님 능력입니다.”
순수하게 존경심도 들었다.
남들이 아니라고 할 때 불도저처럼 혼자 밀어붙이는 기질이 있었다.
배짱과 잔머리 기술도 대단했다.
“아니야. 동생 덕분이야.”
- 사이좋은 형제 동화 찍습니까?
나와 트럼프의 대화를 장립이 이해하지 못했다.
“도움이 필요한 건 없습니까?”
“도움? 없어. 동생 덕분에 선거 자금도 넉넉해.”
“본격 대선에 들어가면 로버트가 슈퍼팩을 본격적으로 가동할 겁니다.”
“고맙네.”
어차피 운명대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재선은 짐작 못 했다.
내가 회귀하던 시점에 세계 경기는 말 그대로 아우성이었다.
미국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지만 트럼프의 아성은 그때까지도 견고했다.
각종 여론 조사와 달리 보이지 않는 지지자들이 많았다.
그 또한 운명.
“다니엘…….”
트럼프가 조용히 날 불렀다.
“네.”
트럼프를 바라봤다.
“혹시 운명 말이야.”
트럼프가 운명이라는 말에 관심을 보였다.
시민 전체 지지율은 힐러리가 높았다.
트럼프가 곳곳에서 선전하고 있긴 했지만 미래가 불투명한 건 마찬가지 입장.
“어떤 운명 말입니까?”
“동생 진짜 미래 운명을 아나?”
트럼프가 예기치 못한 질문으로 훅 치고 들어왔다.
여러 가지 촉을 가진 무시 못 할 사나이.
- 이 아저씨 눈치 한 번 겁나 빠릅니다.
“설마요. 형님이 보시다시피 전 예언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운명대로라는 말은 뭔가?”
“말 그대로 운명대로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이 결과가 되어 나타난다는 걸 말합니다. 그걸 동양에서는 업 또는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무서운 말이군.”
트럼프가 찔리는 모양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인생을 막살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형님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다니엘, 나도 가끔 교회에 나간다네.”
여러 의미가 담겨 있는 트럼프의 뜬금없는 말.
그도 사후 세계가 두려운 것 같다.
“형님…….”
힘주어 그를 불렀다.
“응.”
트럼프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형님 하고 싶은 거 다 하십시오! 그게 신이 정한 형님의 운명입니다.”
어차피 말린다고 말려질 트럼프가 아니다.
트럼프는 영원히 죽음이 자신과는 관계없다고 강하게 믿는 자들 중 한 명.
“그렇지? 사실 동생에게 하는 말이지만 난 지옥도 두렵지 않아. 그곳도 어차피 영혼들이 살아가는 곳 아닌가? 난 지옥에서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네! 크크크.”
- 미친놈……!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