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2장. 운명대로(2). (1,047/1,284)

1062장. 운명대로(2).

‘얼마?’

트럼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벙찐 시선으로 힐러리를 빤히 쳐다봤다.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자신이 힐러리보다 부자였다.

그녀는 대통령이었던 남편과 함께 책을 출간하고 강연으로 먹고살았다.

이것저것 감춰진 재산까지 다 합친다해도 수천만 달러 정도가 고작일 터였다.

그 정도 재산 가지고는 현재 누리고 있는 상류층 생활을 겨우 유지하기도 빠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힐러리가 무턱대고 얼마면 되냐고 물었다.

그것도 배짱 좋게 기세등등한 표정이었다.

“말해 봐요.”

힐러리는 본색을 감추지 않은 채 여우의 모습을 드러냈다.

강한 어조로 물었던 조금 전의 태도와 달리 지금은 활짝 웃었다.

백악관 주인으로 8년 동안 전 세계를 알게 모르게 통치했던 여인다웠다.

남편이 대통령을 역임하던 시절 중요한 의사 결정에 힐러리의 의견이 적극 반영됐다.

남편보다 정무 면에서 감각이 탁월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로 유효했다.

천하의 트럼프가 당황할 정도로 파격적인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트럼프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개운하게 터진 웃음과 달리 눈빛은 차가웠다.

‘날 엿 먹이겠다는 소리지?’

오바마 다음으로 싫어하는 인물이 힐러리였다.

“얼마나 줄 수 있는데?”

트럼프가 되물었다.

입가에 번진 승부사의 싸늘한 미소가 트럼프의 속내를 짐작하기 힘들게 했다.

파바바밧.

팽팽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갔다.

자칫 누군가의 눈에 이 모습이 띈다면 선거공작이 될 만한 장면이었다.

미국 대통령의 자리를 놓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판이다.

스윽.

“적어 봐요.”

힐러리가 탁자 위에 있던 메모지와 펜을 트럼프 앞으로 내밀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 장사꾼이야.”

“알아요.”

‘천박한 졸부 새끼.’

힐러리는 여유로 포장한 미소 가득한 얼굴과 달리 속은 저열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신이 날 천박한 부동산 졸부 정도로 생각하는 걸 알고 있어. 그런데 나도 마찬가지야. 당신은 워싱턴에 굴을 파고 사는 늙은 여우일 뿐이야.”

두 사람 사이에 눈빛과 말로 독설이 오갔다.

잘 벼른 창과 창이 서로의 심장을 쑤셨다.

하지만 지금까지 강심장으로 버텨온 이들답게 몇 마디 말에 꿈적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입가에 번지는 미소만 더 차가워졌다.

“고마워요. 칭찬으로 듣겠어요.”

힐러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싱긋 웃었다.

스스스스슥.

트럼프가 힐러리가 내민 종이에 숫자를 적었다.

숫자 1 뒤에 0이 계속 붙었다.

“이게 내 조건이야.”

트럼프가 시크하게 종이를 힐러리 앞으로 밀며 말했다.

‘이 새끼, 진짜 미친놈이야.’

힐러리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트럼프를 빤히 쳐다봤다.

1억 달러도 아니고 그 뒤에 0이 두 개 더 붙었다.

미국 IT 갑부들도 함부로 언급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몇억 달러 정도라면 힐러리도 융통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어차피 트럼프를 제외하고 다른 공화당 주자들은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돌풍을 일으키는 트럼프만 제치면 백악관에 들어가는 일은 수월해진다.

이후 재선까지 가능하다면 앞으로의 8년간 자신이 세계를 호령하는 대통령 자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숫자를 모르는 건 아니지?”

“적당한 금액이야. 내가 앞으로 8년 동안 빨아 먹을 금액이거든.”

트럼프가 사악한 눈빛을 하고 이를 드러냈다.

“이자는 뺐어.”

대놓고 미국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부를 챙기겠다고 말하는 트럼프.

그의 말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독한 놈!’

대담하게 자신의 포부를 거침없이 밝히는 트럼프를 힐러리는 다시 한 번 평가했다.

힐러리 부부도 백악관에 있으면서 알게 모르게 부를 쌓았다.

대통령직을 수행하다 보면 전쟁을 기획하거나 테러, 경제 문제를 주관하게 된다.

약소국들의 대통령들처럼 어리석게 국가 안위만 생각하지 않는다.

차명 계좌를 통해 여러 라인으로 자금을 운용했다.

아랍권 전쟁 때마다 오일값이 치솟았다.

월등한 정보력을 앞세워 선물 시장에 뛰어들기만 하면 말 그대로 앉아서도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

환율이나 주식 시장도 마찬가지.

대통령 연봉 가지고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

뒤를 봐주는 변호사나 조직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갔다.

정직하다는 현직 미국 대통령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정치판에 들어온 이상 혼자 깨끗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트럼프가 당당하게 먹겠다고 하는 금액은 상식선을 벗어난 엄청난 돈이다.

힐러리가 차명 계좌로 보유하고 있는 비자금과 비교할 수도 없었다.

스윽.

이번에는 트럼프가 다시 빈 종이를 내밀었다.

“당신이 적어봐. 날 밀어주고 사퇴하는 대가로 얼마면 되겠어?”

선택의 기회를 상대에게 넘기는 트럼프.

콰직.

힐러리가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사사삭.

빠르게 종이 위로 숫자가 나타났다.

트럼프가 제시했던 금액보다 1달러가 많은 숫자다.

“난 이 정도.”

힐러리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크크크크크크크. 100억 1달러라…….”

트럼프가 종이 위 숫자를 보고 비웃음을 터트렸다.

“당신 바보야?”

“뭐라고!!!”

트럼프의 무례한 물음에 힐러리가 발끈했다.

“장사의 기본도 모르는 여자가 무슨 대통령이야?”

“닥쳐!”

두 사람 사이에 언성이 높아졌다.

화가 난 힐러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망해가는 도시의 집들은 매물로 나와도 잘 안 팔려. 그런데 뜨겁게 뜨고 있는 시내 중심권 가격을 적어?”

힐러리를 신랄하게 비웃는 트럼프.

부동산 업자답게 집값을 비교해 지금의 그녀와 자신의 가치를 냉정하게 평가했다.

‘망해가는 도시의 집?’

분노가 힐러리의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게다가 나이도 많네. 누구도 다시 돌아보지 않을 만큼. 크크크.”

이죽거리는 데 천재적인 소질을 갖고 있는 트럼프의 조롱이 계속됐다.

나이가 든 힐러리의 주름진 얼굴을 노골적으로 뚫어져라 바라봤다.

“닥쳐 빌어먹을 졸부 새끼야!”

급기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터트리는 힐러리.

‘이겼다!’

트럼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무기 없이 치러진 작은 전투였지만 이번 판은 자신이 승기를 잡았음을 확신했다.

화를 내는 자는 이미 패배한 것이다.

이번 전투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암묵적인 룰이 존재했다.

화를 내는 힐러리를 보며 트럼프는 짜릿한 쾌감을 맛봤다.

승리를 확신한 트럼프와 힐러리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어느새 뒤에 나타나 두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던 다니엘.

그의 차가운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게 두 사람을 지켜봤다.

***

- 저 사람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상황을 같이 보고 있던 귀신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도 마찬가지 심정이다.

미국을 호령했던 전직 대통령의 부인이었으며 오바마 정부의 실세격인 힐러리가 짜증이 난 채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면전에서 조롱하며 앉아 있는 너구리 떡방 업자.

세계 최강국 미국을 호령하는 대통령이 되려는 주자들의 행동이 참으로 저열하고 치졸했다.

마음 같아서는 100억 달러따위 그냥 던져주고 두 사람 모두 꺼지라 말하고 싶다.

하지만 참는다.

어차피 정치판에 들어오는 순간 양심은 팔아치우고 흘러가야 했다.

저 두 사람이 사라진다고 해서 세상에 평화가 오지는 않는다.

내가 원하는 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차라리 저 정도는 타락한 자들이 나았다.

그런 점에서…….

“힐러리. 당신의 이런 진짜 모습이 더 매력적입니다. 하하하하하.”

감정적으로 승기를 잡은 트럼프가 조소를 더했다.

- 저 아저씨 보기보다 똑똑하고 무섭네요.

트럼프의 진면목을 이제야 알아본 장립.

난 진작 알고 있었다.

세상의 조롱을 다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미국 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한 자.

재임 중에도 이런 식의 막말을 서슴지 않으며 인간적인 면모를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같이 일했던 자들이 배신해도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키며 자신의 길을 갔다.

다른 인물들이었다면 언론의 집중포화와 조롱에 초반에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햄버거를 먹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버텼다.

그런 트럼프를 곱디곱게 정치엘리트로 성장해 온 힐러리가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잡초와 온실 속 화초와의 싸움과 같았다.

오늘의 만남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두 사람의 전투력이 어떻게 다르고 얼마나 대단한지 말이다.

결과는 예견된 운명대로였다.

힐러리는 과거와 같이 패배자가 될 것이다.

“닥쳐! 빌어먹을 호색한 변태 새끼야!”

힐러리의 입에서 욕 방언이 터진 듯 욕설이 다시 튀어나왔다.

미국에서 저런 욕을 내뱉으면 총알을 맞아도 무방할 정도다.

힐러리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힐러리가 조금 전 내뱉었던 멘트를 트럼프가 그대로 따라했다.

“이이이!!!”

힐러리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며 마귀할멈처럼 변했다.

- 야! 내가 알고 있던 힐러리의 본래 모습이 저 정도였다니…….

장립 귀신이 진짜 놀랐는지 기겁했다.

몇 겹으로 자신을 포장해 세상에 내보이는 정치인의 감춰진 진짜 모습은 보통 사람들의 모습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하물며 부부 사이를 밀착해 들여다보면 더 적나라했다.

세상에 성인군자 이미지가 강한 오바마도 그의 아내가 창문 밖으로 밀어버리고 싶었을 정도라고 하면 말 다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힐러리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욕을 내뱉는 말투가 한두 번 토해내본 솜씨가 아니다.

힐러리도 평범한 여자일 뿐이다.

남편의 바람기에 눈물로 시간을 보내다 인디언 예언자의 말을 따르며 인내했다고 했다.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 범위 안에서 움직였다.

속에 감추고 있는 병이 있는 것이다.

여자로서의 인생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지금의 대권을 위해 모든 걸 인내하며 참아 왔다.

그 점은 존경스러웠다.

“속이 탈 것 같은데 와인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여유만만 트럼프가 와인 병을 들었다.

승리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널…… 반드시 무너트려버리겠어!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거지로 만들어 버릴 거야!”

“와우! 그거 무서운 협박이네요.”

힐러리의 거친 협박에도 트럼프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 점에서 트럼프도 존경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 형님. 이제 말려야 할 것 같습니다. 힐러리 눈에서 레이저가 나옵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힐러리의 눈에 혈관이 터져 핏발이 섰다.

트럼프 같은 악동은 처음 만나봤을 것이다.

그녀가 지금까지 정치계에서 만나온 인사들은 모두 양반 그 자체다.

신사들의 세계에서 살다가 개싸움 전문가와 실전이 붙었으니 패배하는 건 당연했다.

으드득.

힐러리가 이를 갈았다.

이제는 말려야 할 때였다.

똑똑.

옆에 있던 나무를 가볍게 두들겼다.

“오! 다니엘!”

트럼프가 날 먼저 보고 반색했다.

찌리리리릿.

그에 반해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는 힐러리.

자신이 먼저 싸움을 걸어놓고 패하자 나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했다.

물론 받아 줄 생각은 없다.

힐러리는 앞으로 미국 정치권에서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될 인사였다.

“그만하시죠. 미국 시민들이 이런 모습을 보면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두 사람 사이로 다가가 싸움을 말렸다.

“난 상관없지만 힐러리 여사님은 타격을 받겠지. 흐흐흐.”

트럼프가 끝까지 힐러리를 조롱했다.

스윽!

힐러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노려봤다.

“오늘 일. 반드시 두 사람 모두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겁니다!”

힐러리가 한을 품었다.

아마 트럼프와 내가 짜고 이 상황을 만들었다고 오해한 것 같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또각 또각.

힐러리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나의 입이 열렸다.

“운명대로…….”

회귀의 전설 2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