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1장. 운명대로.
- 이 인디언 할머니가 도대체 뭐라고 하는 겁니까?
귀신이 물었다.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오늘 만나기로 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느끼게 된 정신적 감응.
처음에는 나한테 신이 내려온 줄 알았다.
하지만 감응에 집중해 보니 간절한 정신계 파장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마법을 써서 감응을 보내는 존재를 찾아내 지켜봤다.
힐러리와 함께 나타난 낸시라는 여인이었다.
인디언 혼혈이면서 영매였다.
진갈색 눈동자에는 간절함과 열정이 담겨 있었다. 나를 일러 바람과 영혼과 속삭임의 수호자라 칭했다.
그녀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난 수호자가 아니다.”
왜 이런 태도로 그녀를 대하게 되는지 몰라도 낸시에게 저절로 반말이 나왔다.
“아직 완벽하게 각성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낸시는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었다.
- 이 할머니, 형님이 신에 근접한 사람인 걸 아는 것 같습니다.
귀신이 조심스럽게 귓속말을 해왔다.
“떠도는 영혼이시여. 다니엘님은 이미 신이십니다.”
낸시가 보이지 않는 허공에 떠 있는 장립 귀신에게 말을 건넸다.
- 내, 내가 보여요?
인디언들은 대대로 자연을 숭배하는 민족이다.
이 넓은 아메리카 땅의 진정한 주인인 셈이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영매는 영적 각성 능력이 뛰어났다.
“당연히 보입니다.”
낸시가 부드럽게 웃었다.
“땅의 뿌리로 거둬달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낸시를 보며 물었다.
“제 이름은 땅의 뿌리에서 태어난 귀가 큰 가지입니다.”
인디언식 이름은 언제 들어도 신선했다.
“그래서?”
“과거 인디언들은 신으로부터 죽음의 때를 계시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계시를 내려줄 존재가 거의 없습니다. 이 땅이 오염되었듯 인디언들 또한 그렇습니다.”
- 지금 자신을 죽여 달라는 건가요?
각 대륙과 인종마다 임종 방식이 달랐다.
임종을 기다리는 이를 찾아가는 저승사자들도 민족 고유의 특색이 존재했다.
인디언들도 마찬가지다.
“난 죽음을 관장하는 신의 사자가 아니다.”
하지만 낸시의 얼굴에서 평화로운 죽음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들꽃이 말라갈 때 나는 자연스런 생멸의 기운 같은 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지고 있는 낸시에게 굳이 죽음을 직접 선사하고 싶지는 않았다.
“계시를 받았습니다. 이 땅의 신들께서 당신을 주시하고 보호하고 계십니다. 멀고 먼 시대에 우리는 같은 뿌리였습니다.”
한민족과 인디언들은 유전적으로 뿌리가 비슷하긴 했다.
낸시가 진지한 시선으로 나를 직시했다.
“당신께서는 땅의 수호자로 선택받으셨습니다.”
“선택?”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 땅의 뿌리가 된 머나먼 조상들로부터 인정받은 자. 이 땅의 끝에서 저 끝까지 부는 바람이 당신을 수호해 줄 것입니다.”
- 이 땅의 수호자로 선택되었습니다. 수호자가 되시겠습니까?
낸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울린 알림음.
당혹스러웠다.
갑작스러운 만남 요청, 곧이어 이 땅의 수호자가 돼 달라는 부탁과 그것을 알리는 알림음.
- 이거 좋은 거 아닌가요? 대박 느낌이 나는데. 흐흐.
당사자가 아님에도 탐이 나는지 귀신이 입맛을 다셨다.
나 역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 거절하시겠습니까?
알림음이 성격 급하게 바로 떡밥을 던졌다.
내가 불리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재촉해 왔던 녀석.
낸시가 날 열망에 찬 눈으로 지그시 바라봤다.
인디언식의 전통적 죽음을 맞이하고자 하는 낸시.
“난…….”
***
“뭐야? 어디 간 거야?”
트럼프는 호텔 펜트하우스에 들어서며 실망감을 표출했다.
오늘 이곳에서 그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한껏 기대를 품고 온 자리였다.
새롭게 소개시켜 줄 친구가 있다고 했던 다니엘.
소개받을 친구가 돈 많은 부자이기를 은근히 소망했다.
트럼프는 러시아 차르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민주화가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거대한 땅과 그 안에 사는 인간들 위에 우뚝 선 푸틴.
러시아 연방은행 모두가 차르의 것이었다.
트럼프가 생각할 때 세상에 그보다 멋진 사업은 없었다.
트럼프도 욕심이 났다.
죽기 전에 꼭 세계 대통령에 오르고 싶었다.
그리고 연방은행 금고를 자기 재산처럼 마음껏 사용해 보는 게 소원이었다.
미국의 대통령이 가진 권한은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막강했다.
상원만 잡고 있어도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었다.
그 거대한 욕망의 덩치를 점점 키우며 살아가고 있는 트럼프.
그의 또 다른 부러움의 대상이 바로 다니엘 장이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재산을 갖고 있다.
“전망은 좋군.”
리모델링을 거쳐 자신이 소유한 호텔보다 더 멋지게 단장한 팰튼 호텔 펜트하우스.
돈이 있다고 해서 원하는 객실을 빌릴 수 없었다.
대신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공간은 예비적으로 남겨졌다.
팰튼 호텔의 실제 경영자들도 사용 못 한다는 LA 팰튼 호텔 펜트하우스.
그런 곳으로 다니엘이 자신을 불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모두를 내 발아래 깔 것이야!”
주변 건물 중 가장 높은 펜트하우스에 서서 창밖을 향해 거침없이 야망을 드러내는 트럼프.
속으로만 품어 왔던 꿈이 점점 현실이 되어 갔다.
자식들도 말렸던 대통령 출마.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이뤄내고 있는 멋진 승부였다.
또각또각.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하이힐 소리.
‘뭐야? 설마 여자야?’
트럼프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흘렀다.
다니엘이 여색을 멀리하는 건 정평이 나 있었다.
파티 당시 다니엘의 주변에 몰려들었던 멋진 파트너들.
‘다니엘, 이런 선물도 할 줄 아는군. 흐흐흐.’
가까이 다가온 하이힐 소리에 잔뜩 기대감이 생긴 트럼프.
어깨를 쫙 펴고 복부에 힘을 주며 튀어나온 배를 당겼다.
남녀 간에 무엇보다 중요한 건 첫만남 때의 첫인상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뚝.
등 뒤에서 여자의 걸음이 멈췄다.
훅 밀려오는 여인의 향기.
그럼 이제 멋지게 인사할 순간.
트럼프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정중하고 예의 있는 신사답게 조용히 등을 돌렸다.
아직도 피가 뜨거운 트럼프를 여인의 달콤한 향기가 이미 자극하고 있었다.
하지만!
“!!!”
트럼프의 큼지막한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파르르르.
의지력을 상실한 듯 온몸도 떨렸다.
“역시 당신이었군요. 레오날드 존 트럼프.”
곱게 나이를 먹어가는 중년 여인이 눈앞에서 활짝 웃었다.
“젠장! 힐러리 당신이 왜 여기 있어!”
감출 줄 모르고 그대로 속마음을 드러내는 다혈질의 트럼프.
자신이 원수로 여기고 있는 오마바의 장기판 말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건 제가 묻고 싶네요. 트럼프 당신이 왜 여기에 있나요?”
트럼프보다 여유가 넘치는 정계의 여우 힐러리.
“난…… 내 동생이 친구를 소개시켜준다고……!”
말을 하다 말고 트럼프가 입을 다물었다.
다니엘이 말했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는 친구가 바로 힐러리였음을 깨달았다.
“그 동생이 다니엘인가요?”
“끄응.”
트럼프가 앓는 듯 신음 소리를 흘렸다.
그는 가리지 않고 여자를 좋아했지만 힐러리 같은 스타일은 원하지 않았다.
나이 어린 모델이나 배우들을 주로 만나왔던 그였다.
힐러리는 여성으로서 전혀 매력도 없고 관심도 없는, 오로지 대통령이 되기 위한 경쟁 상대일 뿐이었다.
“맞군요.”
힐러리가 웃으며 말했다.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트럼프와 달리 힐러리는 수십 년 동안 정치판에서 단련돼 온 인물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사실 힐러리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다니엘과 결판 지으려 했는데 난데없이 트럼프가 사이에 끼었다.
트럼프를 내놓은 다니엘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힐러리는 머리를 굴렸다.
쉽사리 그의 의도가 짐작되지 않았다.
다만.
‘이게 바로 낸시가 말하던 운명대로?’
뭔지 몰라도 이 자리는 신들이 안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니엘보다 차라리 트럼프와 결판을 내는 것도 나쁜 수는 아니란 생각마저 스쳤다.
힐러리가 생각하는 트럼프는 돈과 여자에 굶주린 욕망의 화신이다.
그 조건을 충족시켜 줄 수 있다면 트럼프는 공화당 대선 주자 선거에서 물러날지도 몰랐다.
“우리 앉죠. 마침 와인도 있네요.”
힐러리가 마치 주인처럼 행세했다.
뚜벅뚜벅.
별 대답 없이 자리에 앉는 트럼프.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여과 없이 속내를 드러냈다.
‘다니엘은 이 늙은 여우를 왜 부른 거야?’
트럼프도 계산이 복잡해졌다.
다니엘이 싸워야 할 적이나 진배없는 힐러리를 왜 이 자리에 함께 불렀는지 그 이유가 짐작되지 않았다.
“한 잔 마실 건가요?”
누군가 마신 듯 와인 병은 이미 개봉된 상태였다.
심리적 우위를 차지한 힐러리가 병을 들고 웃었다.
‘어디서 수작질이야!’
트럼프가 정신을 가다듬고 의식을 차렸다.
“그럴까요?”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잔을 들었다.
상대가 미녀였다면 벌써 잔을 권했겠지만 트럼프는 힐러리를 여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꿈틀.
트럼프의 비매너를 익히 알고 있던 힐러리는 잠시 눈썹을 찌푸렸지만 미소는 지우지 않았다.
‘무식한 졸부 새끼.’
트럼프가 명문 사립 고등학교와 대학교 출신이라는 걸 힐러리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그 학교 출신 중에 트럼프만큼 엉망인 남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쪼로록.
힐러리가 잔을 채웠다.
“흐음……. 향이 좋군요.”
잔을 부딪치지도 않고 향을 음미하는 트럼프.
“우리의 치열한 승부를 위해.”
힐러리가 잔을 들고 건배사를 내뱉었다.
“아니죠. 이 잔은…… 당신의 패배를 미리 위로하며!”
트럼프가 악동처럼 굴었다.
“자신만만하군요.”
“난 이기는 싸움만 해요.”
트럼프가 비열하게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재주만큼은 특출나게 타고났다.
“나도 패배를 모르고 살아왔어요.”
“아니죠. 당신은 패배자입니다.”
“뭐라고요?”
“당신의 남편을 백악관에서 사로잡은 그녀가 있지 않습니까.”
“!!!”
힐러리의 눈썹이 거칠게 휘어졌다.
여자의 자존심을 가차 없이 건드는 트럼프 화법은 힐러리를 화나게 만들었다.
‘이놈은 짐승이야. 대화가 통하지 않는 짐승.’
힐러리는 눈앞의 트럼프를 보며 짐승을 상대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그때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쳇. 이 할망구 심지가 대단해.’
트럼프는 아쉬웠다.
내심 힐러리가 자신의 멘트에 폭주하기를 바랐다.
상대의 작은 실수 하나가 현재로서는 트럼프에게 큰 호재로 작용할 수 있었다.
“트럼프,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어요.”
와인을 단숨에 비워낸 힐러리가 트럼프를 똑바로 바라봤다.
“물어봐요.”
술을 좋아하지 않는 트럼프는 잔을 들고 시큰둥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힐러리가 할 다음 멘트를 예상하기 바빴다.
‘공화당 대선 포기를 하라고 하겠지.’
트럼프가 힐러리를 무표정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 순간.
“얼마면 되겠니?”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