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9장. 리더(Leader)(6).
“도착했습니다. 바트시여.”
비서를 담당하고 있는 장로가 바트의 전용 공간 앞에서 공손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대형 기체 반절 이상이 로리아나 한 사람을 위한 공간이었다.
잠을 잘 수 있는 침실과 기도실, 샤워실이 구비되어 있었다.
1년에 한 번 움직일까 말까 한 그녀였지만 전용기는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했다.
기체도 3년에 한 번씩 바꿨다.
“잠시 후에 내려가도록 하죠.”
“준비하겠습니다.”
스으으윽.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공손한 예를 보이며 뒷걸음으로 물러나는 장로.
타다닷.
주기장에 도착한 비행기 주변으로 블랙 슈트의 인물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로리아나 한 명을 위해 LA공항 전체가 분주했다.
최고급 특별 경계령이 내려졌다.
전용 공항 활주로와 게이트가 배당됐다.
미국 비밀 보안국을 비롯해 로리아나 개인 경호원들이 사방을 물샐 틈 없이 방어했다.
대통령보다 더한 예우였다.
이런 번거로움 때문에 특별한 일이 아니면 로리아나는 국외로 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나의 예외가 있었다.
‘다니엘…….’
새벽 어스름한 동이 트고 있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이동해 왔다.
출발하기 전까지 장로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로리아나를 만류했다.
게다가 기사단에서 주의 경보가 들어온 상황이었다.
아사신이 로리아나의 뒤를 따라 움직일 거라는 첩보였다.
그럼에도 로리아나는 위험을 감수하고 이동했다.
“어느새 리더가 됐군요…….”
좋은 말 같지만 로리아나의 표정은 더없이 씁쓰름했다.
세계를 경영하는 보이지 않는 리더의 무게감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났다.
리더의 말 한마디로 무고히 많은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었다.
그 무게를 로리아나는 몸소 경험하며 살고 있었다.
신의 말씀에 따라 최대한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려 했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다양하게 분출되는 인간의 욕망이 곳곳에서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때로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될 정보들까지 공개됐다.
그로 인해 예기치 않은 일들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로리아나가 아는 세상에서 ‘공평’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무역이라는 개념마저도 한쪽이 이익을 보면 또 어느 한쪽은 손해를 입어야 균형추가 잡혔다.
서로 더 많은 이익을 취하기 위해 전쟁이 벌어지고 무고한 희생이 뒤따랐다.
리더들이 암중에서 각자 속한 집단이나 국가를 위해 움직이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보이지 않는 리더들간의 전쟁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치열했다.
패배하는 쪽 집단이나 국가의 리더가 치러야 하는 대가와 그에 따른 비용은 상당했다.
그나마 로리아나는 균형추의 중심에 속한 리더였다.
방계들의 견제가 늘 있어 왔지만 그 정도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다.
“다니엘, 당신에게는 어떤 시련이 닥칠지 모르겠군요.”
기존 리더들은 새로운 리더의 탄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의 자리는 한정되어 있었다.
자신들의 자리나 파이를 기꺼이 나눠줄 만한 선한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로리아나 역시 다니엘이 차일드가에 위해를 가한다면 기꺼이 싸워야 할 운명이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무엇보다 야훼가 다니엘에게 많은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다니엘도 일정 경계를 넘지 않았다.
하지만 다니엘의 힘이 강해질수록 부딪칠 여지는 많아진다.
“하아.”
로리아나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 양쪽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신의 첫 번째 가는 종 야훼바트로서 살아가는 동시에 여성으로서 사랑을 알아버린 로리아나의 삶.
야훼는 얼마 전부터 말이 없었다.
모든 걸 로리아나에게 맡기겠다는 뜻 같지만 그럴수록 조심스러웠다.
야훼의 침묵은 항상 대가가 따랐다.
차라리 엄한 꾸중을 들을 때 안심이 되었다.
뚜우우우우우우 뚜우우우우우우.
위치 정보가 차단되는 로리아나의 특수 스마트폰이 울렸다.
벨소리는 담백했다.
아는 번호다.
실망감이 잠시 로리아나 눈가를 스쳤다.
기다리던 다니엘의 전화가 아닌 게 서운했다.
틱.
가볍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오늘 날이 좋네.
뜬금없이 날이 좋다고 말해오는 전화 상대.
“그런 것 같아.”
- 아침 먹자. 기다리고 있었어.
“……그래.”
다니엘 덕분에 과거의 돈독한 관계를 회복한 상대.
꼬로록.
그렇지 않아도 로리아나의 배에서 신호가 왔다.
제아무리 성녀라 해도 인간의 육신을 부여받은 이상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아침 먹자는 말에 입맛이 돌았다.
멀고 먼 한국이나 움직임에 한계가 있는 이스라엘이 아니었다.
이제 곧 만나게 될 다니엘.
그와의 만남을 위해 로리아나는 바짝 힘을 냈다.
***
- 제가 이런 말씀을 자주 드리지만……. 정말 진심으로 형님을 존경합니다!
커피를 마셨다.
나갈 준비는 모두 끝냈다.
새벽의 먼동이 터올 즈음 그녀는 떠났다.
나도 그녀도 인사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 같은 건 둘 사이에 무의미했다.
러시아의 비밀 첩보원은 생사를 장담 못 할 직업을 가진 존재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타샤의 관상은…….
룸에 남겨진 타샤의 체취와 격정적인 지난밤의 추억은 이미 시간의 저편으로 흘러가버렸다.
- 러시아 미녀 첩보원과의 사랑이라니……. 진짜 영화 같은 삶입니다. 형님, 이번 생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가십시오! 하하하하하하하
장립이 제 일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어젯밤 와이파이를 끄자 지박령이 된 듯 그 자리에서 꼼짝 못 하던 귀신.
타샤가 떠나고 와이파이를 다시 연결했다.
그 즉시 방에 찾아와 호들갑을 떨었다.
밑밥을 까는 게 눈에 보였다.
말과 달리 억울함이 눈동자에 가득 담겨 있었다.
“착하게 살아. 그래야 다음 생에 나처럼 복 받아.”
- ……네.
긴장감이 주변을 맴돌았다.
최근 들어 부쩍 자주 듣게 되는 리더라는 말.
회귀한 뒤 감당하기 벅찰 만큼 스펙타클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 결과 이제는 세계를 조종하는 리더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감당하기 쉽지 않은 자리다.
수십 번씩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죽을 뻔했다.
가족이나 지인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위기 또한 반복됐다.
귀신이 말하는 영화 같은 삶은 모두 다 허상에 불과했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 물속에서 발버둥 치는 백조와 다를 게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려한 내 겉모습만 보려고 했다.
감춰진 삶의 진면목은 누구보다 처절하고 고단했다.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과 달리 팽팽한 고무줄처럼 당겨져 긴장의 연속인 인생.
장립 귀신은 잠시나마 날 웃게 만드는 웃음 비타민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귀찮지만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과 달리 귀신은 대놓고 나를 배신할 수 없었다.
“내가 동생 좋아하는 거 알지?”
- 헤헤. 그럼요! 한번 형님은 영원한 형님 아니겠습니까.
나의 진심이 담긴 말을 귀신도 알았다.
“오늘도 바쁠 거야. 옆에서 잘 보고 배워.”
- 임 회장님도 함께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애 키워야지. 육아 사업도 힘든 일이야.”
임성철 회장에게 잠깐의 휴식을 선물했다.
그와 약조했던 생명 부여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름 심각한 문제지만 마음은 더없이 편안했다.
닥치지 않은 일인 만큼 뭔가 해결책이 있을 것 같았다.
삼신 할매까지 입장해 쌍둥이를 보호하고 있다.
신들이 저 스스로 계획을 짜고 필요한 신들이 적재적소에 접근하는 게 느껴졌다.
- 그러게 말입니다. 옆에서 잠깐 지켜봤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더군요.
부모가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의 뼈와 살을 녹여 자식을 키워 세상에 내보내는 일.
인간에게 가장 고되고 수고로움을 주는 큰일이었다.
띠리리리리리리리.
이른 아침부터 스마트폰이 울렸다.
오늘 만나야 할 첫 번째 월척.
통화 버튼을 눌렀다.
- 하하하하하하. 다니엘! 내 사랑하는 친구!
호탕한 웃음으로 인사를 해오는 남자.
“목소리에 힘이 넘칩니다.”
- 당연하지! 여론조사로 내가 몇 개 경합주에서 불여우를 잡았어.
트럼프는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변방에 떠돌던 대선 주자가 이제는 공화당 핵심 주자로 부상했다.
거기에 대세를 보이던 힐러리를 맹추격했다.
“축하드립니다.”
트럼프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쓴소리는 싫어하고 꿀 바른 아부를 사랑하는 남자였다.
괜히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 오바마가 다녀갔다는데……. 괜찮은 거지?
여러 의미를 담고 트럼프가 은밀하게 물어왔다.
대선주자로 급부상하며 트럼프에게 한참 힘이 쏠리고 있다.
극비인 대통령 이동 동선까지 트럼프가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제 마음은 언제나 확고합니다.”
트럼프가 원하는 대답을 해줬다.
- 푸하하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군. 오바마가 어떤 표정으로 백악관에 돌아갔을지 안 봐도 다 그려져.
진심으로 좋아하는 트럼프의 속내가 호탕한 웃음에서 전해졌다.
“어디십니까?”
- 별장에 있네.
어제부터 날 기다렸을 것이다.
오바마를 비롯해 여러 중요 인사들이 나를 만나기 위해 온다는 걸 알고 기다렸다.
목적을 위해서는 인내할 줄도 아는 노련한 사업가다.
그러니 더더욱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것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을 어떻게 선동하면 되는지 그 방법을 아주 잘 아는 자다.
“점심은 같이 먹죠.”
-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네.
“손님도 초대했습니다. 기대하셔도 될 겁니다.”
트럼프가 보면 깜짝 놀랄 만한 초대 손님.
- 오우! 기대감에 마음이 설레는군.
실제 만나면 깜짝 놀랄 것이다.
제대로 판을 짰다.
“그럼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 이 고마움은 언젠가 반드시 갚도록 하지.
부도 수표 같은 공언 남발자의 말은 애초에 믿지 않는다.
나 역시 목적이 있어서 트럼프에게 접근한 사람이다.
주고받게 될 이익이 맞아떨어져 서로 통했고 그래서 인연이 닿은 것뿐이다.
따릭.
통화가 끝났다.
- 그런데 진짜 트럼프가 다음 대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겁니까?
귀신이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같이 트럼프 파티에 참석하기도 했는데 아직도 의심이 많다.
“천기누설.”
- 귀신인 제가 어디 가서 말할 것도 아니고…….
귀신, 특히 장립의 말은 안 믿는다.
귀신이 뱉는 소리를 인간 모두가 듣지 못하는 건 아니다.
- 그런데 초대 손님이 누굽니까? 혹시 이번에도…….
그 틈에도 일말의 호기심을 드러내는 귀신.
말끝을 흐렸지만 그 뒷말은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기대해도 좋아.”
씨익.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펼쳐질 세기적인 만남.
그 말 많은 리더로서 내가 직접 주최하는 화끈한 파티.
그 시작이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