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8장. 리더(Leader)(5).
“입국 목적은?”
자국민이 아니면 불친절하기로 유명한 LA공항 입국심사장.
“여행입니다.”
“그래 여행이겠지…….”
LA는 세계적인 여행지였다.
할리우드를 비롯해 가까운 라스베이거스까지 모든 곳이 다 관광 상품이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개방되지 않았다.
입국심사관 톰은 손에 여권을 든 채 입국게이트를 통과하는 남자를 유심히 지켜봤다.
이민자가 많은 프랑스 출신의 아랍권 남자.
프랑스 백인이라면 묻지도 않고 입국도장을 찍어주었겠지만 아랍인들에 대해서는 색안경을 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인들에게 있어 아랍인들은 준 테러리스트와도 같았다.
오래전부터 보편적인 사고로 자리 잡힌 생각이자 편견이었다.
9.11사태와 IS준동 이후 그 관념은 더 확고해졌다.
“문제 있습니까?”
압둘라 하디스라는 남자는 발음이 정확한 영어로 물었다.
옷차림도 나무랄 곳 없이 깔끔했다.
누가 봐도 문제가 없어 보였다.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하지만 이 자리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베테랑 입국심사관 톰에게는 불길한 느낌이 전해졌다.
과거와 달리 현재 유럽은 아랍 난민 2세가 성장해 본격적으로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이름과 얼굴만으로 차별할 수가 없었다.
자칫 국가간 분쟁 사유가 될 수 있었다.
압둘라 하디스도 명백히 프랑스 시민이었다.
그러나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와 있는 상황.
이슬람국가에서 IS 테러리스트들이 입국할 수 있기에 보다 정확하고 꼼꼼하게 입국 심사를 진행하라는 지시였다.
자칫 조용한 시국에 테러라도 발생하면 그 여파가 미국 경제에 불똥이 될 수 있었다.
“밖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압둘라 하디스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명품 시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스위스 금장 명품 시계가 눈에 띄었다.
최소 1만 달러가 족히 나가는 시계였다.
탕!
입국 승인 칸에 톰이 도장을 찍었다.
공항 보안 시스템을 통과하는 데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인물이었다.
최근 설치된 최첨단 감시 시스템에서도 의심할 만한 요소가 전혀 없어 패스로 나왔다.
자신의 불길한 육감만으로 그의 입국을 막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다.
“수고하십시오.”
여권을 들고 입국장을 벗어나는 압둘라 하디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이 군인의 자태처럼 유난히 단단해 보였다.
‘에이, 설마 무슨 일 있겠어?’
조금 전 도착한 프랑스발 대형 여객기에서 내리는 이들 중 압둘라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10명이 넘었다.
“다음.”
톰은 애써 압둘라 하디스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멍청한 새끼들. 흐흐흐.’
압둘라 하디스는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비웃음을 날렸다.
이런 날을 대비해 진작부터 작업에 들어갔다.
아사신은 더 이상 과거처럼 칼이나 들고 무작정 암살을 감행하는 조직이 아니었다.
조직 관리도 IT로 무장했다.
신분 세탁 따위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완벽하게 준비됐다.
가볍게는 옷차림부터 말투까지 세밀하게 교육받는다.
적의 본진에 들어가 심장을 찔러야 할 아사신의 전사들은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물질적인 지원도 풍족하게 이루어졌다.
“압둘라.”
“이브라임.”
출국장에서 대기 중인 동료 전사가 만족스러운 듯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압둘라를 맞았다.
순교자로 선택된 만큼 그 어느 때보다 기뻤다.
신의 이름으로 떨어진 명령.
“더러운 성녀는?”
“곧 연락이 오겠지.”
아직 정보는 완벽하게 제공되지 않았다.
“곧 기도할 시간이군.”
“가자.”
이브라임이 앞장을 섰다.
“휘이이이~.”
휘파람을 불며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압둘라.
그들 뒤로 암흑 후광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
- 혀, 형님 이 여성도 아시는 분입니까?
돌아가는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귀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동하는 동안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고 왔다.
태평양이 훤히 보이는 그림 같은 작은 호텔이 딸려 있는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오랜만에 블랙 카드를 이용해 통으로 대여했다.
웨이터들도 필요한 인원들을 제외하고 모두 퇴근시켰다.
온전히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타샤. 내 삶이 벼랑에서 줄을 타고 사는 당신보다 위험할까?”
“만만치 않잖아. 내가 서울에 있었을 때도 몇 번이나 위기를 넘겼어.”
타샤의 걱정 어린 시선은 온전히 나를 향한 마음이었다.
- 타샤! 오! 이번에는 러시아 미녀입니까?
미국에서 만남이 이루어진 만큼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특수 첩보 요원답게 언어에 특출한 재능을 보이는 타샤.
“홍콩만큼은 아니야.”
“호호. 맞아. 작은 아빠.”
타샤가 과거에 나를 부르던 호칭을 꺼내며 활짝 웃었다.
- 홍콩? 작은 아빠?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겁니까!
내 지난 과거를 알 리 없는 귀신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 와중에도 눈알은 타샤를 자세히 관찰하느라 바빴다.
- 눈빛은 연륜이 있어 보이는데 무슨 피부가 이렇게나 좋습니까? 러시아 여자들은 30대가 넘어가면 피부 노화 현상이 심해지는데.
귀신, 예리하다.
생명의 은인인 타샤에게도 가끔 성수를 먹였다.
내가 아는 이들의 노화 현상을 자연의 흐름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성수는 부족함 없이 풍족하다.
저쪽 세상에서 공작 신분이 된 만큼 신전에서 때때로 알아서 바쳤다.
“그래도 이번에는 조심해야 할 것 같아. 다니엘은 현재 세상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리더가 됐잖아. 그 덕에 적들도 많아졌어.”
타샤의 표정이 심각할 정도로 어두워졌다.
이건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걸 의미했다.
“정보라도 있어?”
“일단…… 당신과 만났던 오바마가 고위급 인사들을 소집했어. 그리고 한국에 있는 대사관 인물들도 덩달아 바쁘게 움직여.”
역시 러시아 정보국이다.
나와 오바마가 만난 사실을 속속 알아냈다.
그리고 백악관의 최근 동정까지 다 파악했다.
“짐작한 일이야.”
“정말?”
“오바마가 쉽게 물러날 인물이었다면 흑인으로서 미국 대통령까지 되지 않았을 거야.”
“그건 맞아. 우리 대장도 오바마라면 골치 아파해.”
러시아와 오바마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냉전시대만큼은 아니었지만 오바마는 러시아의 약점을 수시로 자극했다.
그걸 깡으로 버텨내고 있는 러시아 차르.
“그 건은 패스. 또 다른 위험 요수는?”
또로로록.
잔에 보드카를 채웠다.
무향이라던 보드카에서 미약하게 고농도 알코올의 진한 향기가 맡아졌다.
“극비 정보인데…….”
타샤가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뭔데?”
“……아사신이 움직였어.”
“아사신? 왜?”
- 리더가 되니 사방에 적입니까? 오! 세상에……. 형님 인생 진짜 스펙터클합니다!
“이스라엘의…… 그녀가 오고 있잖아.”
“그녀를 노리고?”
“아마도 그럴 거야.”
“죽으려고 작정을 했군.”
야훼바트는 야훼가 사랑하는 성녀다.
고위급 신의 사랑을 듬뿍 받는 로리아나를 아사신 따위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진화했어.”
“진화?”
“다니엘도 아사신이 특이한 술법을 사용하는 건 알지?”
“어느 정도.”
“차르도 아사신을 두려워해. 우리가 가진 힘으로 놈들을 죽이는 게 쉽지 않아. 바티칸에서 파견받은 사제가 차르를 따라다녀.”
타샤가 작심한 듯 많은 정보를 풀었다.
그사이에 승진이라도 한 모양이다.
한국에서 내 덕분에 이것저것 많은 이권을 챙겼다.
러시아와 그에 못지않게 돈을 사랑하는 타샤.
충분히 그 돈값을 해내고 있었다.
- 아사신이 진화를 해요? 놈들이 도대체 뭔데요?
아사신의 흑마법에 전혀 모르는 귀신은 잔뜩 흥분하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직접 경험하게 되면 그 때는 적어도 혼이 반쯤 나갈 것이다.
상위급 아사신 살수라면 충분히 귀신도 알아챌 수 있다.
“정보 고마워.”
“다니엘……. 아사신은 정말 무서운 놈들이야. 그놈들 정보를 캐러 갔다가 몇 개 팀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어.”
타샤가 진심으로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살아있는 병기라 불리는 러시아 베테랑 첩보요원인 그녀도 인간인지라 죽음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악마 병사로 변신하는 아사신과 싸워 이길 재간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몸 사려. 타샤와 오래 만나고 싶으니까.”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 맞지?”
“어.”
타샤를 똑바로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말 없이 나를 응시하는 타샤.
“고마워……. 진심으로.”
진심이 전해진 듯 타샤의 눈이 촉촉해졌다.
또로록.
진하게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
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짓도 감내해야 할 러시아 FSB 소속의 미녀 요원.
강한 척하지만 역시 그녀도 여자였다.
매일 생사를 넘나드는 첩보계에서 지금처럼 버틴다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 형님……. 설마…… 이 타샤라는 여자와…….
귀신이 짐작형 촉을 발동했다.
이럴 때 보여줄 건 단 하나.
스윽.
손을 내밀어 타샤의 진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철없던 시절의 다 타버린 즐거움, 혼란스러운 숙취처럼 씁쓸하구나. 그러나 지난날의 슬픔은 포도주처럼 내 영혼 속에 날이 갈수록 더욱 진해져 나의 앞날 어둡기만 하고 미래의 파도 치는 바다는 나에게 노동과 고뇌를 약속해 준다.”
조용히 먼저 앞 구절을 읊었다.
나를 바라보는 타샤의 눈동자가 별빛처럼 반짝였다.
타샤가 좋아하는 러시아의 대문호 푸시킨의 시였다.
타샤의 현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시.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삶에 대한 애착이 필요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꽃잎처럼 열렸다.
“오 벗들이여. 그러나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살아서 생각하고 고통당하고 싶다. 슬픔과 근심과 걱정 속에 즐거움 또한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때론 또다시 화음에 도취되고 공상의 산물에 눈물 흘리며 그리고 누가 알랴, 내 슬픈 만년에 사랑이 이별의 미소를 지으며 반짝일지도.”
씨이익.
눈물 흘리던 타샤가 비 갠 후 맑은 하늘처럼 웃었다.
얼굴 가득 무지개가 폈다.
짜르르.
그녀의 영혼이 시와 나, 분위기에 관통당했다는 걸 알았다.
타샤는 영리하고 똑똑했다.
거기에 문학 감수성까지 풍부했다.
꿀꺽.
우리 두 사람은 마주보며 잔을 비웠다.
빨갛게 물들어가는 타샤의 얼굴.
“우리 방에서 한 잔 더 할까?”
“응…….”
타샤의 연푸른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 혀, 형님!
귀신의 당황스러운 감정이 허공을 타고 전해졌다.
스윽.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내민 손을 잡는 타샤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이 손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병기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타샤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리고 레스토랑과 연결되어 있는 호텔로 이동했다.
- 꿀꺽.
뒤에서 들려오는 발칙한 귀신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안 봐도 그림자처럼 조용히 따라오고 있을 장립의 영혼.
“훗.”
사악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그리고.
- 설마…… 형님! 제발! 그것만은…….
무언가 알아챈 장립의 다급한 목소리.
가볍게 속으로 외쳤다.
와이파이 종료!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