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2장. 인연은 돌고 돌아(2).
“…….”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 돌쇠? 푸하하하하하하하.
귀신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어이가 없어 임성철 회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어디를 봐서 돌쇠란 말인가!
이름 자체도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꿈속에서 내게는 오래 두고 보아온 벗이 있었어. 돌쇠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였다.”
“그 돌쇠가…… 저와 닮았습니까?”
“어.”
“…….”
“돌쇠란 놈 얼굴이 아주 반반했어. 동네 여인네들과 눈이 자주 맞았어. 말빨도 좋고 힘도 세더군.”
임성철 회장의 말이 이어질수록 신기하게 그에 대한 모습이 떠올랐다.
돌쇠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 청년.
평민이었다.
만덕의 친구였지만 나와도 자주 어울렸던 인물이었다.
여름에는 강가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고 겨울에는 꿩 사냥도 같이 나갈 만큼 가까웠다.
임성철 회장의 말처럼 그는 말빨이 좋아 함께 있으면 심심할 틈이 없었다.
만덕이의 죽마고우였던 돌쇠.
그 돌쇠는 전생 만덕 임성철 회장의 말처럼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준수하게 생겼다.
그러니 동네 처자들과의 사이에 연분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남녀간의 연애가 더 자유롭기도 했다.
남녀 차별도 조선 시대만큼 심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준수한 외모의 돌쇠가 처녀와 유부녀를 가리지 않고 사고를 쳤다는 것이다.
아버지 살아생전 그 일로 대노해 멍석말이를 지시했을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었다.
당시에도 유부녀와의 간통은 중죄에 속했다.
돌쇠가 이런 말을 했던 걸로 기억된다.
‘‘사랑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라고.
무슨 말로 포장을 한다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
돌쇠가 멍석말이를 당해도 상대 유부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여인을 바라보던 돌쇠의 시선이 꿈속의 일인지 현시의 일인지 구분하기 힘들 만큼 선명하게 떠오른다.
돌쇠는 그 일이 있고 다음 날 홀연히 사라졌다.
그 이후 다시는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던 걸로 기억된다.
- 흐흐흐. 형님, 돌쇠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입에 딱딱 붙지 않습니까?
귀신이 또 약을 올렸다.
나름 심각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던 차에 장난을 치는 귀신을 째려보았다.
그 순간.
“!!!”
갑자기 오버랩되는 환상이 눈앞에 보였다.
귀신 장립과 돌쇠의 이미지가 거짓말처럼 겹쳐졌다.
“돌쇠???”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 뭐라고요? 돌쇠요? 제가요?
귀신이 화들짝 놀라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돌쇠가 맞았다.
“어! 그러고 보니…….”
임성철 회장도 나의 말에 귀신을 빤히 쳐다보다 뭔가 깨달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 뭐, 뭐죠. 지금 제가 얼토당토않은 두 분 전생 속의 그 돌쇠였다는 헛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죠?
귀신이 강하게 사실을 부정했다.
“돌쇠였어. 확실히 돌쇠를 닮았어!”
임성철 회장이 귀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확신에 찬 음성을 말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장립도 참 잘생겼다.
전생에서나 이생에서나 마찬가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목을 매는 것도 같았다.
갱단 두목의 여자와 사랑하다 사막에 묻혀 죽었던 장립의 처지를 생각하며 더욱 그랬다.
요즘 들어 말빨도 많이 늘었다.
그 모든 걸 종합해 보면…….
- 아니야! 내, 내가 돌쇠일 리가 없어! 난 돌쇠가 아니라 장립이야!
전생 돌쇠가 울부짖다시피 자신의 전생을 부정했다.
“돌쇠야.”
더욱 친밀하게 느껴지는 그 이름으로 장립을 불렀다.
“처음 볼 때부터 낯설지 않다 했더니…….”
임성철 회장도 확신하는 눈빛을 띠었다.
- 난 돌쇠가 아니야……. 내가 돌쇠일 리가……. 돌쇠.
정신이 반쯤 나가 보이는 전생 돌쇠 귀신.
돌아가는 상황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귀신의 인연까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물론 사실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 그런데 형님은 왜 제가 돌쇠일 거라고 확신하십니까? 마치 그 꿈속에 같이 계셨던 것처럼요.
돌쇠가 또 한 번 예리하게 핵심을 짚고 물어왔다.
“그러게…… 장 회장은 돌쇠를 알지도 못할 텐데 어찌 그리 생각하는가?”
둘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솔직하게 말하면 낱낱이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사정을 다 듣고 난 뒤였다.
이제 와서 굳이 내가 전생에 당신들과 함께 살던 마을의 호족 가문 도련님이라고 말하기도 뭐했다.
- 형님 설마…….
“다들 여기서 뭐 하시는 거죠?”
그때 등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임 회장이 제일 먼저 화들짝 놀랐다.
“시아가 왜…….”
내 품에 안겨 자고 있는 시아를 발견하고 서유나가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새벽 시간이었다.
아이의 부모도 아니고 친척도 아닌 내가 이 시간에 시아를 품고 있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시아가 칭얼거려서 데리고 나왔어.”
“당신이요?”
“오빠를 찾더라고.”
임성철 회장이 나를 보며 말했다.
“오빠요……?”
“저기 잘생긴 대부 오빠.”
임성철 회장이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시아가 절 많이 좋아하나 봅니다. 안아주자마자 이렇게 잠이 들었습니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귀여운 시아를 안아 보겠습니까.”
품에 폭 안겨 잠들어 있는 전생의 나의 누이 소연이.
여전히 작은 손으로 옷자락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헤에에…….”
행복한 꿈을 꾸는 듯 작은 시아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우리 시아 이쁘다.
장립이 다가와 사랑스럽게 시아를 바라봤다.
“이리 주세요. 제가 볼게요.”
서유나가 다가왔다.
자다 깬 상태인데도 미모가 남달랐다.
“!!!”
갑자기 가까이 다가선 그녀에게서 전생에 내가 알던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미 모든 기억이 지금의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듯 여인이 떠오른 일 또한 신기한 일이었다.
그건 바로.
“초련이 누님…….”
만덕이 형님이 사랑했던 가문의 여종 초련 누님.
전생의 내가 아주 어린 꼬맹이던 시절 초련은 진짜 누님처럼 나와 소연이를 챙겨줬다.
씻겨주고 먹여주고 안아주던 그녀.
친오누이처럼 그녀를 따랐다.
몸이 약한 어머니를 대신해 늘 우리를 챙기는 데 정성을 다했다.
초련은 어느 날 다른 지역으로 심부름을 갔다.
그리고 그게 그녀와의 마지막이 인연이 되었다.
도착한 지역에 침략한 왜구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만 전해 들었다.
만덕이와 혼인을 약속했던 초련 누님.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이 상황이 놀랍기만 했다.
인연이 이렇게 무서운 것도 이제 알았다.
이번 생 역시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인연이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돌고 돌아 전생의 만덕이와 현생에 만나 두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그 두 아이 중 한 명은 나의 누이였던 소연이다.
게다가 멍석말이 끝에 마을 떠났던 돌쇠는 귀신이 되어서 만나게 된 장립.
보이지 않는 인연의 고리가 얼기설기 엮여 만들어 낸 이생의 또다른 삶의 모습이 되었다.
전생의 업은 이렇게까지 인연이 되어 현생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초련……이라고.”
전생의 만덕이 임성철 회장이 초련이라는 이름에 반응하며 멍해졌다.
자신의 아내가 분명한 여인을 멍하니 바라보는 만덕, 아니 임성철 회장.
순간, 그의 눈동자가 뿌옇게 흐려졌다.
“당신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서유나가 화들짝 놀라며 임성철 회장을 부축하며 챙겼다.
“아니……. 갑자기 하품이 나와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어요.”
남편을 다정하게 챙기는 서유나.
“……사랑해.”
“네?”
“지난 생이나 이번 생이나…… 난 당신을 사랑해.”
“여, 여보.”
갑작스런 사랑 고백에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서유나.
이른 새벽부터 보는 눈이 많은 와중에도 마음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남편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큼큼.”
헛기침을 뱉었다.
- 좋을 때다. 흐흐흐.
장가도 못 가본 귀신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부엌을 빌릴 수 있을까요?”
“네?”
“어제 거하게 대접을 받았으니 보답해 드리고 싶습니다.”
“여보. 장 회장 요리 솜씨가 대단해.”
“그래도…….”
“두 분은 들어가 쉬십시오.”
시아를 서유나에게 넘겨줬다.
“그럴까?”
사랑이 넘치는 시선으로 아내를 바라보는 임성철 회장.
“…….”
서유나는 얼굴이 빨갛게 익으며 시아를 받아 안았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부리나케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보세.”
뭐가 그리 급한지 아내를 따라 곧장 방으로 사라지는 임성철 회장.
고소한 깨소금 냄새가 사방으로 확 번졌다.
- 오늘 시아 동생 보는 거 아닙니까?
두 사람의 모습에 장립도 눈치를 보며 한마디 거들었다.
“신경 꺼. 돌쇠.”
- 아니! 내가 왜 돌쇠냐고요!
“그럼 돌쇠를 돌쇠라 부르지 뭐라고 불러.”
- 아오! 내가 미쳐.
쿵쿵 답답한 듯 심장을 치는 장립 귀신.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며 부엌에 걸음을 옮겼다.
돌고 돌아 다시 만난 인연자들을 위한 선물이 필요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파티하는 것보다 좋은 일도 없었다.
***
“이, 이걸 다 준비하셨어요?”
“네.”
“대단해요…….”
한 상 거하게 아침을 차려냈다.
부엌에 대형 냉장고 세 대나 있었다.
그 속에는 필요한 재료가 차고 넘쳤다.
오랜만에 실력 발휘 제대로 했다.
아무리 서유나의 음식 솜씨가 뛰어나도 나를 따라올 수는 없었다.
몸에 좋은 흰콩 수프부터 시작해 건강 영양밥과 칼칼하고 시원한 버섯 된장찌개.
알맞게 구워진 궁중 너비아니, 시저샐러드, 모둠 해산물 튀김, 비취 물만두 등등.
아침에 먹기에는 좀 과하다 싶은 맛있는 요리들이 식탁 위에 가득 차려졌다.
- 진짜 먹음직스럽습니다…….
귀신이 침을 줄줄 흘렸다.
“배가 고팠는데……. 장 회장. 고마워.”
새벽부터 진하게 사랑을 나누었을 임성철 회장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직 아기들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은 전생 초련 누님의 발그레한 얼굴.
맛있게 차려진 요리를 보고 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드십시오.”
“잘 먹을게요.”
여유 있게 시작한 아침 식사.
“진짜 맛있어요! 너비아니가 입안에서 탱글거려요!”
“해산물 튀김이 정말 고소해.”
부부는 젓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배가 불렀다.
지난 생에는 두 사람을 위해 이렇게 대접할 일이 없었다.
전생이 어떤 관계였건 이생에는 모두가 동등한 신분이었다.
- 형님, 전 만두요!
귀신이 음식 맛을 보라며 나를 재촉했다.
나도 젓가락을 들었다.
그 순간.
띠리리리리리.
분위기 깨며 갑자기 울리는 스마트폰 벨소리.
아직 이른 아침 시간이었다.
스마트폰에 모르는 번호가 떴다.
그것도 미국에서 사용하는 번호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다니엘 날세.
회귀의 전설 2부
맛을 아는 법.
‘누구?’
서유나는 아침부터 장태산 회장에게 걸려온 전화에 의문이 들었다.
이곳은 미국이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전화를 거는 건 대단한 실례였다.
조용한 가운데 밖으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왠지 익숙했다.
“바쁘신 분이 무슨 일이십니까?”
장태산 회장이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
- 만나고 싶네.
“지금 말입니까?”
- 그렇네.
“지금 아침 식사중입니다.”
- 알고 있네.
‘뭐라고? 알고 있어?’
서유나는 희미하지만 정확하게 들려온 상대의 말에 깜짝 놀랐다.
스피커폰은 아니지만 상대의 대화 내용이 또렷한 소리로 들렸다.
이곳은 LA의 부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이다.
경호원이 사방을 경계하고 있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장태산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말하는 통화 상대.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 나올 때 따뜻한 커피 한 잔 부탁해도 되나?
“그러죠.”
상대의 그런 태도에도 의연하게 대답하는 장태산 회장.
- 그럼 식사 맛있게 하게.
띠릭.
통화는 길지 않게 끝났다.
“…….”
순식간에 식탁에 정적이 감돌았다.
“누구?”
남편 장립이 조심스레 상대가 누구인지 물었다.
“목소리 들으면 몰라?”
“진짜 그분?”
“어.”
“휘이~ 대단해.”
장립이 다소 과장되게 휘파람을 불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서유나는 장립과 함께 살고 있지만 그의 진정한 정체를 낱낱이 알지는 못했다.
돈 많은 화교 투자자인 것을 제외하면 그 이상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서유나와 아기들, 그는 가정에 한없이 충실했고 남편으로서도 더없이 다정했다.
아기들과 자신을 끔찍하게 사랑했다.
사업 영역이 궁금하긴 했지만 장립은 굳이 밖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구에요?”
서유나가 남편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도 잘 아는 분이야.”
“누구…….”
“미합중국 지도자.”
“네?”
“프레지던트.”
“!!!”
서유나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의 말에 몸이 그대로 굳는 것 같았다.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장태산 회장과 통화한 상대의 정확한 정체를 알고 나니 더 놀라웠다.
‘지금 미국 대통령에게 밥 먹는다고 기다리라고 한 거야?’
서유나는 어이없는 시선으로 장태산 회장을 바라봤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된장국을 떠먹고 있는 장태산 회장.
그의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나이도 어린 젊은 남자였다.
그럼에도 어딘가 범접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았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자신의 남편 장립도 장태산 앞에서는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식사하세요. 국이 식으면 맛이 없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음에도 전혀 꿈쩍도 하지 않는 장태산 회장.
“여보. 어서 먹어. 아기들 깨기 전에.”
장립의 태도도 장태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도 별거 아니라는 듯 행동하는 두 사람을 보며 서유나는 내심 놀랐다.
‘두 사람 다 정상이 아니야.’
서유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장태산과 장립의 입장이라면 도저히 저렇게 앉아 식사를 마저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 어느 누가 아침을 먹겠다고 미국 대통령을 밖에 세워둘 수 있겠는가.
“무슨 일로 찾아왔을까?”
남편 장립이 장태산 회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부탁하러 왔겠지.”
“어려운 부탁이겠지?”
“아마도.”
‘부탁? 미국 대통령이?’
레임덕에 빠져 있는 상황이지만 아직도 올겨울까지는 미국과 세상을 움직이는 주인공이었다.
두 사람은 그런 미국 대통령이 장태산 회장에게 부탁을 하러 찾아왔다고 말하고 있었다.
콩닥콩닥.
그 말에 서유나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두 아이의 대부가 되었다.
특히 시아를 너무너무 예뻐해 주는 장태산 회장.
생각만으로 두 아이의 미래가 얼마나 밝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 국 더 주세요.”
서유나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간을 키웠다.
호랑이들과 어울리려면 스스로 호랑이가 되어야 했다.
서유나도 두 남자가 만든 판에 끼어들었다.
밖에 미국 대통령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머릿속에 지워냈다.
***
“각하……. 바람이 아직 차갑습니다.”
경호실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원하니까 걱정 말게.”
휘리리리링.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오바마는 그대로 맞았다.
이른 아침이다.
부자들이 사는 동네답게 바쁜 움직임은 없었다.
그 동네 정상에 위치한 작은 해맞이 공원.
삼엄한 경계가 펼쳐졌다.
대통령 경호처 소속 무장 경호원들이 사방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대통령이 있기에 머리 위는 비행 통제구역으로 선포됐다.
레임덕으로 권력 누수 현상이 발생했지만 아직도 세계를 굴림하는 대통령이다.
오바마의 한마디면 약소국 정도는 며칠 안에 정권이 바뀔 수도 있었다.
그런 오바마가 한 남자를 기다렸다.
단단하게 코트를 여몄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오바마는 생각에 잠겼다.
지난 8년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머리칼 상당수가 새치로 변했다.
탄탄하던 육체도 나이를 먹어 근육이 빠졌다.
시력도 나빠 신문을 볼 때 안경을 써야만 했다.
‘난 최선을 다했어.’
태양을 보며 오바마는 스스로를 평가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오바마는 자신의 신념으로 미국을 이끌었다.
원하던 결과도 얻었다.
추진하고자 했던 가장 핵심 정책, 오바마 케어라 불리는 전국민 의료보험.
보험이 없어 병원에 가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시민들을 막고자 했다.
중병에 걸리면 어지간한 중산층도 파산하고 마는 국가가 미국이었다.
모든 걸 시장에 맡기다 보니 돈이 있어야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됐다.
누가 봐도 말이 되지 않았다.
못사는 쿠바도 전국민 의료 혜택을 받았다.
배가 고플지언정 의사를 만나지 못하고 죽을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미국은 달랐다.
상위 0.1%를 위해 모두가 노예처럼 살았다.
자유시장 경제주의의 폐단이 그대로 드러났다.
수없이 싸우고 노력했지만 한계가 보였다.
문제는 상류층들이 아니었다.
언제 자신들이 병에 당할지도 모르건만 대다수 미국인들은 타인들에게 보험료 나누기를 싫어했다.
무지의 발로였다.
극단적 이기주의자들이 넘쳤다.
‘교육 시스템이 낡았어. 이대로 가면…… 미국은 수십 년 안에 망하게 될 것이야.’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국가로 호칭되던 대영제국도 이제는 이빨이 다 빠진 호랑이가 됐다.
미국도 마찬가지 신세다.
오만에 취해 개혁을 게을리한다면 중국을 비롯해 여러 개발도상국들에게 먹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동안 역사는 말해 왔다.
발전 없는 국가는 도태되고 영원히 낙오된다는 걸 말이다.
저벅저벅.
그때 오바마가 있는 공원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한 손에 커피잔을 들고 있는 사내.
“멈추십시오.”
경호원들이 막아섰다.
“내 손님일세.”
오바마가 손님을 확인했다.
“들여보내.”
경호실장이 손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남자가 다가왔다.
“자리를 비켜주겠나.”
“각하…….”
“걱정 말게.”
“넵!”
경호실장이 자리를 떴다.
“주문하신 커피 가져왔습니다.”
남자가 커피를 내밀었다.
“오! 아직도 따뜻하군.”
“특별한 비법을 사용했습니다.”
“고맙네.”
큼지막한 커피잔은 놀랍게도 따뜻했다.
영상 10도 정도의 날씨에서도 식지 않는 커피.
호로록.
몸이 차가워진 오바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하와이 코나군.”
“네.”
“내가 좋아하는 커피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
“각하만 절 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 점은 미처 생각 못 했군.”
오바마가 쓴웃음을 지었다.
만나자마자 한 방 먹었다.
천하의 미국 대통령 면전에서 협박하는 사람은 눈앞의 이 남자가 처음이었다.
중국이나 러시아 지도자도 감히 앞에서는 이런 말을 뱉지 못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남자는 태양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바마도 커피를 들고 태양에 시선을 돌렸다.
“안부도 없이 너무 직설적이군.”
“각하와 제가 안부를 물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피식 웃으며 남자가 물었다.
사방에서 날선 기운이 느껴졌다.
경호원들이 물러났지만 모두 다 예민한 상태.
남자가 허튼 짓을 하는 순간 머리통에 구멍이 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 저격수도 배치가 됐다.
“한때는 친구라 생각했는데 안타깝군.”
“정치인에게 진정한 친구가 존재할까요?”
“……아프지만 맞는 말이야.”
오바마는 인정했다.
아내 말고는 누구도 믿지 못했다.
최측근이라 불렸던 힐러리나 정치 동료들도 각자 목적이 존재했다.
순수한 친구는 정치판에 존재하지 않았다.
“말해보십시오.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라면 기꺼이 응해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승낙했다.
“고맙네. 다니엘.”
“천만에 말씀입니다.”
‘갈수록 더 대단해지는군.’
오바마는 숨이 막혔다.
편한 옷차림이건만 넥타이를 맨 것처럼 답답했다.
그 정도로 압박감이 심했다.
“……다니엘. 미국을 위해 마음을 돌려주게.”
오바마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니엘이 시치미를 뗐다.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 자일세.”
“현명한 미국 시민들이 선택할 문제가 아닐까요?”
“다니엘!”
오바마가 힘주어 남자 이름을 불렀다.
어려운 걸음이었다.
자존심까지 내려놓고 찾아온 자리다.
그런데 다니엘은 거절의사를 밝혔다.
“그동안 다들 배부르고 평안하게 살았습니다. 공짜가 아닌 그 청구서가 이제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후대에 넘겨주라는 말입니까?”
“청구서라니…….”
“미국인은 물질에 현혹되어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았습니다. 그 대가입니다.”
“중요한 것들?”
남자가 오바마를 직시했다.
입가에 그려지는 차가운 미소.
“법과 질서, 종교, 신, 가족, 자아와 같은 중요한 가치관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일개 개인이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당신이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양심을 물질에 팔아먹은 영혼들을 모두 구제할 수는 없습니다. 뜨거운 감자 수프에 입과 위장이 까져봐야 확실하게 맛을 아는 법입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