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1장. 인연은 돌고 돌아. (1,037/1,284)

1051장. 인연은 돌고 돌아.

“트럼프, 그 멍청한 자식에게 내가 밀리다니!”

힐러리가 있는 대로 짜증을 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위기감을 더 강하게 느꼈다.

미국에서 누구나 아는 희대의 바람둥이 부동산업자가 공화당 대선주자가 될 확률이 월등히 높아졌다.

아니, 분위기로 보아 거의 확정적이었다.

동시에 자신이 경쟁해야 할 상대가 됐다.

“진정하십시오. 공화당의 표일 뿐입니다.”

“이 지표들 봐요. 핵심 경쟁주에서 트럼프와 격전 중이잖아요. 적어도 5% 이상 차이가 나야 안정권인데…….”

힐러리가 인상을 쓰며 모니터에 떠있는 여론 조사표를 신경질적으로 가리켰다.

“트럼프 쪽 선거기획자가 이쪽 방면에서 유명합니다. 교묘하게 프레임을 짰습니다.”

“우리 쪽이 부족하다는 건가요?”

힐러리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미국 대선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덕목은 돈과 선거기획자였다.

어떤 프레임을 짜느냐에 따라 선거 승패가 결정됐다.

상대를 꼼짝 못 하게 옭아매는 프레임을 완성하는 자가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힐러리는 함께, 더 강하게’라는 선거 구호를 내세웠다.

민주당 출신 대통령들이 16년간 미국을 통치했다.

상원과 하원은 공화당과 민주당이 번갈아가며 의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대선에서는 민주당이 강세를 보여 왔다.

이번 대통령 선거도 마찬가지 결과가 예상됐다.

오바마의 후광이 힐러리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은밀한 반란표가 수면 위로 나타났다.

중산층이 휘청거렸다.

제조업이 무너지며 안정된 일자리가 사라진 데 대한 반응으로 보였다.

미국 제조업을 대표하던 자동차 회사들이 엉망이 됐다.

IT업계와 금융업체들이 호황을 누리는 반면 그들이 창출해 내는 일자리는 대부분 특별한 인재들에게만 적용됐다.

그만큼 저학력 출신들이 갈 곳은 사라졌다.

3D 업종은 으레 그렇듯 불법 이민자들의 차지가 됐다.

양질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중산층이 무너지자 터져 나온 불만이 팽배해졌다.

사채놀이에 빠진 월가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인식도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힐러리는 월가의 듬직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트럼프가 그것을 약점으로 잡고 공격했다.

월가 금융가를 공격하는 발언을 거침없이 내놓았다.

동시에 히스패닉을 비롯해 불법 이민자들까지 공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이 미국민의 일자리를 빼앗아 갔다며 말도 안 되는 슬로건을 내걸고 중산층을 선동했다.

과거 미국 시민권자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던 저급한 일자리일 뿐이었다.

자신들의 삶이 팍팍해지자 미국 시민들, 특히 백인들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필요해졌다.

당연히 집권당인 민주당이 타깃이 됐다.

그런 군중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있던 트럼프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앞세웠다.

떠들어대는 트럼프가 부도덕하고 사기꾼 기질이 강하다는 걸 시민들도 이미 잘 알았다.

하지만 자신들의 가려운 곳을 콕콕 짚어 긁어주자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구호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잘 알았다.

로봇과 IT시대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주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특별한 실력을 갖추지 못하는 한 인간은 산업계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트럼프가 내세운 공약은 상당수가 거짓이었다.

그럼에도 유권자들은 그런 트럼프에게 현혹돼 한목소리를 냈다.

‘돌파구가 필요해.’

힐러리가 느끼는 위기감은 그 어느 때보다 컸다.

얼마 전까지 가득했던 자신감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대통령이…… 그자를 만나려고 합니다.”

“그자? 누구요?”

“다니엘 장이라는 한국인 말입니다.”

“뭐라고요!”

힐러리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깜짝 놀랐다.

다니엘 장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힐러리의 심장이 미친 듯 두근거렸다.

낸시가 조심하라고 경고했던 인물이다.

다니엘과 가볍게 얽힌 사건에서 매번 낭패를 봤다.

“다니엘이 미국에 왔습니다.”

“으음…….”

힐러리가 신음을 흘렸다.

오바마가 왜 다니엘을 만나려 하는지 선뜻 짐작되는 일이 없었다.

한때 다니엘을 처리하려고 했던 오바마.

‘맞아! 그자라면…….’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점찍고 화끈하게 밀어줬던 다니엘이었다.

그가 자신을 도와준다면 어쩌면 트럼프를 누를 수도 있을 것이다.

트럼프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다니엘과 로버트 라이언의 조력 덕분이었다.

“약속을 잡아줘요.”

“네?”

“다니엘을 만나야 할 것 같아요. 반드시!”

힐러리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니엘이 자신을 도와준다면 그가 원하는 것을 몇 가지쯤 충분히 들어줄 생각도 했다.

***

- 만덕이요?

참으로 촌스럽고 정감 넘치는 이름이다.

지금은 거의 들을 수 없는 만덕이라는 이름.

나도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나와 함께했던 충직한 종 만덕이.

꿈속에서 보았던 그에 대한 기억이 거짓말처럼 떠올랐다.

삼십대가 넘어가는 노총각 종이었다.

주인에게 충직하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던 사람이었다.

대를 거듭해 가문에 충성했던 만덕이.

성도 없었다.

“응, 만덕이…….”

- 정말 이름이…… 예술입니다.

“……영문은 알 수 없지만 듣기만 해도 슬픈 이름이야.”

자신의 이름이 슬프다고 말하는 전생 만덕이.

차마 그런 임성철 회장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만약 내가 꾼 꿈속 내용이 진짜 전생의 그림이라면 임성철 회장은 우리 집 종이었다.

- 뭐가 그렇게 슬프세요?

“주인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어.”

임성철 회장도 그간 꾼 꿈들을 예사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니 꿈속에서 완전히 헤어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정확한 사연을 모르고 있는 듯 그의 말 속에는 깊은 한이 담겨 있었다.

- 에이. 그래 봐야 꿈이죠.

“……주인이 죽기라도 했습니까?”

끝을 확인할 수 없었던 나의 꿈.

그 끝이 어찌 되었는지 나도 궁금했다.

“그런 것 같아. 집안에 작은 주인과 아가씨가 있었어. 참 사이좋은 남매였지. 보기만 해도 가슴이 흐뭇했어.”

지난 꿈을 회상하는 듯 두 눈을 푸는 임성철 회장.

그의 목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내가 장가를 못 갔는데……. 사랑하는 이가 왜구들에게 죽었어. 그래서 복수한다고 주인집 도련님에게 무술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

나의 이야기가 아닌 만덕의 이야기가 임성철 회장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 꿈이라면서도 그걸 다 기억한다구요?

귀신이 임성철 회장을 보며 의문을 표했다.

“그게 이상해. 꿈이 분명한데 너무 생생해. 그리고 한 번 꾸면 어찌 된 일인지 한 편의 영화처럼 계속 이어져.”

“계속요?”

“……어느 시점부터 꿈이 계속 이어졌어.”

이는 분명 꿈을 빙자한 전생 각성 현상이었다.

나도 처음 들어보는 기이한 이야기다.

“어떻게 됐습니까?”

“마을에 왜구들이 쳐들어왔어. 산성으로 도망쳤는데……. 왜구들 숫자가 너무 많았지. 키가 작은데 왜놈들…… 진짜 악귀들 같았어. 먹을 게 부족하면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도 돌았었지.”

그 순간의 느낌이 전해지는지 전생 만덕이 임성철 회장이 몸을 떨었다.

- 왜구들이 독했죠. 중국 해변가 마을에도 쳐들어와 쑥대밭을 만들었지 말입니다. 동양의 바이킹 같은 놈들입니다.

화교인 장립도 왜구에 대해서 얼추 알고 있는 눈치다.

과거부터 이웃 나라 침공을 취미로 삼았던 왜구들.

지금도 알게 모르게 전방위적으로 침탈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산성에서 전투가 있었습니까?”

다급한 마음에 궁금한 것을 물었다.

“맞아. 숫자와 무기가 부족했어. 왜구들 때문에 군에 끌려간 마을 청년들이 한둘이 아니야. 다 죽어서 다시 돌아오는 이들은 거의 없었어. 남아 있던 주인집 도련님과 그 밑에 무사들 10여 명이 핵심이었지. 나머지는 아이들이나 여자와 노인들이었어. 손에 무기라고는 죽창이나 낫을 엮어 만든 조잡한 무기들이 전부였어.”

- 그걸로 싸웠다고요? 용감들 하시네.

임 회장과 나의 전생을 일절 모르는 장립은 옛이야기를 듣는 듯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난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아직 임성철 회장은 나만큼 상황을 알지 못했다.

내가 바로 그가 꿈속에서 모시던 주인집 아들이라는 걸 짐작도 못 했다.

“도련님이 참으로 용감했어. 나에게 부탁했지. 누이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라고 했어.”

나도 그 부분이 생각났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누이는 나와 같이 싸우겠다고 했지만 허락할 수 없었던 그 순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누이는 살리고 싶었다.

산성에 오르기 전 믿음직했던 종 만덕에게 그 부탁을 내가 했다.

위험에 처하면 시선을 끌 터이니 누이를 데리고 도망가.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도망은 성공했어요?

장립이 임 회장이 전하는 스토리에 빠져들었다.

나 역시 한마디도 놓칠 수 없어 귀를 기울였다.

아직 나는 꾸지 못한 꿈의 이야기였다.

“……거기서 끝이야. 방금 전에 내가 꾸다 깬 꿈은 전투가 시작되면서 ……끝났어.”

“…….”

참으로 아쉬웠다.

사랑하는 누이가 살아는 났는지, 살았다면 그다음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지 몹시 궁금했다.

내 품에 안겨 어느새 새근거리며 잠들어 버린 시아.

전생의 누이였던 소연이 내 옷자락을 잡고 깊은 잠에 빠진 것이리라.

내가 자신을 놓고 어디로 떠날까 봐 이 작은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 회장님, 그 꿈하고 우리 시아 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귀신이 핵심을 짚었다.

나만이 임성철 회장의 꿈과 나의 꿈을 제대로 연결하고 풀어낼 수 있었다.

임성철 회장의 이야기대로라면 그는 전생 만덕이로 우리 집 종이 확실했다.

시아의 의식 일부는 전생 나의 누이 소연이다.

“이상하게…… 시아가 낯설지가 않아. 준이 하고 다르게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한 느낌이었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가슴이 따뜻해진다고 해야 할까.”

임성철 회장이 내 품에 잠들어 있는 시아를 바라보며 따듯한 미소를 지었다.

꿈속에서도 소연은 집안 노비들을 항상 따뜻하게 대해줬다.

아픈 이가 있으면 먹을 것과 약을 아끼지 않고 베풀었다.

마을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천한 신분의 또래들과도 사이좋게 지냈다.

아씨라고 갑질 같은 것은 하지 않았던 사랑스러운 누이 소연.

- 설마…… 시아가 회장님이 꿈에서 모시던 아가씨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귀신이 다시 또 핵심을 짚었다.

많이 똑똑해졌다.

“그건 모르지…….”

임성철 회장이 나를 보며 확신하지 못하는 눈빛을 보였다.

천천히 꿈을 떠올리며 나의 정체를 더듬으며 비교하는 듯했다.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꿈속에서 모시던 주인집 아들이 나라고 말하지 않았다.

“제가…… 모시던 주인집 아들과 닮았습니까?”

“……아니.”

“네?”

“도련님은 장 회장처럼 반듯하고 곱게 생겼지만…… 바람둥이는 아니었어.”

“…….”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 회장님. 형님은 바람둥이가 아닙니다. 제가 아는 큰 형님에 비하면 달빛 아래 반딧불이에 불과합니다.

나는 노바 형님에 비할 바가 못 됐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누구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단 말이야.”

임성철 회장이 다시 한 번 날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고.

“장 회장.”

은근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임성철 회장.

“네.”

“혹시 말이야……. 자네 전생 이름이…….”

눈치가 빠른 임성철 회장이 뭔가 직감한 눈빛을 내비쳤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만약 날 알아본다면.

내가 그 모시던 주인이라는 걸…….

“돌쇠…… 아닌가?”

“도, 돌쇠요???”

회귀의 전설 2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