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1048장. 오빠!(2).
“로리아나님이 방금 출발했다고 합니다.”
“다른 특이 사항은 없나요?”
“경호원 숫자가 늘었습니다.”
“거기서 더요?”
사라는 보고를 듣다 의문을 표했다.
로리아나의 경호는 평소에도 과할 만큼 삼엄했다.
미국 대통령보다 더한 경호를 받는 그녀 주변에 경호가 더 철저해졌다면 위험 요소가 존재한다는 걸 의미했다.
“신전 전사들인 것 같습니다.”
“전사들이요?”
사라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로리아나는 차일드 가문의 수장인 동시에 야훼를 섬기는 성녀였다.
그런 로리아나에게는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특권이 주어졌다.
성전을 수호하는, 그래서 알려지지 않았고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실력의 전사들을 활용할 수 있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이제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으로 알려진 특이한 능력을 가진 전사들을 그녀가 소유했다.
그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사들의 실제 존재와 그들의 실력을 확인한 자들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위험하면 집에 있지. 왜 오는 거야.’
사라는 숨길 수 없는 질투심을 느꼈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지만 아직도 사랑은 진행중에 있었다.
다니엘 장이 미국에 왔다.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지난 2년 동안 그도 사라도 바빴다.
리처드 요한슨 상원의원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방계 사업 상당수를 사라가 책임지고 있었다.
그간 소리 소문 없이 한국으로 건너가 다니엘을 한 번 만나고 온 게 전부다.
다니엘에 대한 갈증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주변에 있는 남자들이 늘 관심을 표명해 왔지만 막상 사라는 그들의 호의를 차갑게 거절했다.
영혼의 대화가 통하는 유일한 남자가 다니엘이었다.
“아사신들의 활동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니까요.”
“지독한 놈들입니다.”
사라를 보좌하는 비서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사신의 살수들은 미국에도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언제 테러를 일으킬지 모르는 악성 바퀴벌레들이다.
“전 내일부터 휴가 갑니다.”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휴가 한 번 못 간 사라 요한슨.
큰마음 먹고 이번에는 시간을 냈다.
‘미국에서만큼은 다니엘……은 내 차지야!’
사라는 한껏 욕심을 부렸다.
용감한 여자가 사랑을 쟁취하는 법이다.
이번에는 그 누구에게도 그를 뺏기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
‘시아가 웬일이야?’
서유나는 딸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오빠 준이와 달리 시아는 낯을 무척 가리는 아기였다.
특히 남자들에 대해서는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소아과 담당 의사도 일부러 여자를 골랐을 정도다.
주변에 있는 남자 경호원들은 시아가 있을 때는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오직 아빠에게만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시아가 장태산 회장에게는 스스로 다가가 덥석 안겼다.
그것도 활짝 웃으며 아빠라고 불렀다.
시아의 최고 사랑 표현법이었다.
“시아야. 다니엘은 아빠가 아니라 아저씨야. ‘대부님’ 하고 불러봐.”
임성철이 웃는 얼굴로 시아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발음했다.
“아빠빠…… 오빠…….”
그때 아빠를 넘어 정확히 오빠라고 발음한 시아.
“오빠? 에이 그건 아니다.”
임성철 회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아가 장 회장님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아요.”
서유나가 그런 시아를 보며 얼굴에 한가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이런 시아가 낯설지 않네요.”
장태산이 품에 안긴 시아를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들어가요. 저녁 준비해 놨어요.”
서유나는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거하게 음식을 장만했다.
남편의 귀한 손님이 방문하는 날이었다.
장태산 회장 덕분에 오늘의 이 가정이 존재할 수 있었다.
“시아 주세요.”
서유나가 시아를 받기 위해 두 팔을 뻗었다.
도리도리.
어린 아기 장시아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뭐야?’
서유나는 시아의 반응에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지금껏 자신의 손길을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던 시아였다.
그랬던 시아가 오늘따라 괜한 고집을 부렸다.
조약돌처럼 작은 손으로 장태산 회장의 옷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시아는 제가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장태산이 더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그런 시아를 바라봤다.
“그래도…….”
“여보. 놔둡시다. 장 회장이 대부 아닙니까.”
임성철 회장은 시아의 행동을 지지했다.
‘뭐지?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평범한 여자인 서유나는 이들 관계에 대해 모르는 비밀이 너무 많았다.
자신이 낳은 쌍둥이 중 딸아이인 시아의 행동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나쁜 일은 아니야.’
시아의 눈빛은 그동안 봐온 아기의 눈이 아니었다.
장태산의 옷자락을 움켜잡고 있는 아기의 손은 결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린 아기임에도 장태산을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처음 보는 애절함마저 묻어났다.
돌도 안 된 아기가 보일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임성철 역시 시아의 모습을 보며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신이 점지해 준 자신의 귀한 새끼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자신 앞에서 무수히 벌어졌다.
어쩌면 늙고 병든 자신에게 안긴 아기들이 자신만의 아기가 아닌지도 몰랐다.
장태산을 바라보는 시아의 눈빛.
시아와 장태산 사이에 누구도 알 수 없는 전생의 인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을 뿐이다.
***
오빠……란다.
시아가 보내는 영혼의 텔레파시.
나를 보는 시선에 어떤 감정이 듬뿍 담겨 있다.
돌도 안 지난 꼬맹이가 보일 수 없는 짙은 감정이 담겼다.
그건 바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진한 그리움이었다.
“오빠빠빠.”
시아가 자꾸 오빠라고 부르며 방긋방긋 웃었다.
작은 손가락이 거친 뺨을 만진다.
씨이익.
그 손길에 저절로 입가에 번지는 미소.
- 오빠……. 오빠. 오빠…….
귓가에서 계속 맴도는 아기 목소리에 담긴 아련한 음성.
또로로록.
그때 갑자기 날 보며 웃고만 있던 아기 시아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형님! 왜 애를 울리고 그러세요!
귀신이 지켜보고 있다 날 나무란다.
나도 이 상황이 어이없다.
장시아와 난 이번 생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이다.
지리산 동물 남매들처럼 나와 인연이 있다는 정도는 어렴풋이 알겠지만 더 자세히는 전혀 짐작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장립, 넌 시아가 부르는 오빠라는 말이 안 들려?
-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와 와이파이로 연결된 장립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시아야. 왜 울어. 엄마에게…….”
와락.
서유나가 다가와 시아를 안으려 하자 시아는 다시 내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아기가 보일 수 있는 강력한 의사표현이었다.
“하하. 시아가 장 회장이 아주 마음에 드는 것 같아.”
임성철 회장이 호탕하게 웃는다.
토닥토닥.
왼팔로 시아를 받치고 오른손으로 등을 토닥거렸다.
보통 아이들과 시아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어린아이라면 보통 울음을 터트리며 우는데 시아는 그렇지 않았다.
어른들처럼 꼭꼭 슬픔을 참으며 눈물을 보였다.
그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짜르르 아려왔다.
시아와 얽혀 있는 전생의 인연이 반응하는 것이리라.
“들어갑시다.”
임성철 회장이 뭔가 아는 듯한 표정으로 나와 시아를 바라보다 앞장서 들어갔다.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아들을 안고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잡은 채 이끌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오빠아…….”
그때 내 품에 안긴 채 정확하게 오빠라 부르는 조용하고 느린 시아의 발음.
- 뭐, 뭐죠?
어리둥절한 귀신이 물어왔다.
나도 이 상황이 어떤 건지 정확히 모른다.
다만…… 시아와 나 사이에 알 수 없는 인연이 존재한다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
“도, 도련님! 포위됐습니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들판에 곡식이 익어가는 가을이 찾아왔다.
올해는 대풍이었다.
봄부터 때를 맞춰 알맞게 비가 내렸고 여름에도 폭풍이 없었다.
곳곳마다 누렇게 익은 벼들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대풍에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것저것 세금을 내고도 쌀가마니 몇 개씩은 집에 들일 수 있다는 걸 모두 알았다.
남정네들 마음에는 다 같은 생각들이 들어찼다.
커가는 아이들에게 무명저고리라도 하나씩 해 입히고 같이 고생한 아내에게도 고운 옷 한 벌 해줄 수 있게 된 해였다.
넉넉해진 수확물에 마을에 인심이 넘쳤다.
열흘 뒤면 추석이었다.
추수하는 집집마다 새참은 푸짐했고 막걸리도 넘쳤다.
흥이 넘치는 농부들의 입에서 구수한 노동요 가락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행복이 가득한 마을에 갑작스러운 불행이 불어 닥쳤다.
해마다 추수철이 되면 수시로 배를 타고 섬나라에서 찾아오던 왜구였다.
몇 년 전 대대적으로 토벌되었지만 틈을 타 다시 그들이 모습을 보였다.
다른 해와 달리 놈들의 수는 예년과 달랐다.
이번에는 경상도가 아닌 전라도 쪽을 노렸다.
조정은 대처가 불가능했다.
이성계 장군의 갑작스러운 위화도 회군으로 조정은 둘로 쪼개졌다.
언제든 내전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방 호족들과 관리들은 몸을 사리기 바빴다.
제대로 된 토벌군이 형성되지 못했다.
파죽지세로 관군을 격파한 왜구들은 나주까지 치고 들어왔다.
곳곳의 관아 식량창고가 털렸다.
넉넉하던 나주평야의 곡식이 눈앞에서 왜구들에게 수탈당했다.
아낙들과 아이들이 노비로 잡혀갔다.
흉흉한 소문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왜구들을 피해 도망친 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거지꼴의 유랑민이 됐다.
급한 대로 마을 장정들을 모았다.
작지만 대대로 인근에서 덕망을 쌓은 호족 가문의 장자였다.
몇 해 전 중앙 관리로 뽑혀 떠나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개성에서 의문의 객사를 당한 터였다.
풍전등화에 휩싸인 고려 궁궐에서는 쉬지 않고 피바람이 몰아쳤다.
당시 마을에서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을 건사했다.
연이 있던 절에서 화장되어 뼛가루가 되어 돌아온 부모님을 가문 사당에 모셨다.
피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섣불리 원수를 찾아 나서지는 못했다.
돌아가시기 직전 뭔가를 예견한 듯 아버지가 인편을 통해 신신당부한 일이 있었다.
혹시 두 분께 무슨 일이 있게 되더라도 결코 마을을 떠나지 말라는 당부였다.
그리고 하나뿐인 누이를 잘 보살피라는 말이었다.
유언이 되어 버린 그 말씀을 이를 악물고 따랐다.
아직 약관의 나이였다.
대단한 권문세족도 아니었다.
겨우 수백 가구를 책임지는 조그만 가문의 수장.
이를 갈며 무공을 연마했다.
힘을 길러야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걸 알아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올해 열여섯이 된 꽃다운 누이를 책임져야 하기도 했다.
그 틈에도 부모님을 죽인 원수를 조용히 수소문했다.
운이 좋았는지 하늘이 도왔는지 원수를 찾아냈다.
때를 기다렸다.
누이를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고 난 뒤 원수를 갚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왜구들이 중앙 정부의 혼란을 틈타 대규모로 약탈자들을 보냈다.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이틀 전 나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리도 들렸다.
사방이 왜구들 천지였다.
갈 곳이 없었다.
급히 마을 사람들을 인솔해 뒷산에 위치한 작은 산성으로 이동했다.
산성은 성벽이 낮고 작았다.
왜구들을 막기에는 턱없이 열악했다.
급박한 상황을 알고 중앙에서 토벌군이 내려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보름 정도만 버티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늘은 불쌍한 백성들의 편이 아니었다.
마을을 습격한 후 냄새를 맡은 왜구들이 산성을 포위했다.
숫자는 대략 1000여 명.
작은 키에 원숭이 같은 왜구들은 장창과 화살을 들고 산성을 포위했다.
변변한 갑옷도 없이 아랫도리를 천으로 묶은 왜구들은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보였다.
그에 반해 끌어모은 장정은 겨우 100여 명.
그동안 전란으로 남정네들이 많이 희생되어 그 숫자가 너무도 부족했다.
병사라 부를 만한 이들은 가문의 무사 10여 명이 전부였다.
무기도 죽창이나 낫이 대부분이었다.
챙! 채애앵! 채애앵!
“우헤헤헤헤헤헤헤!”
“크헤헤헤헤헤!”
왜구들은 징을 쳐대며 도깨비처럼 웃었다.
“으음…….”
깊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부모님의 원수를 갚기도 전에 찾아온 죽음의 위기에 내몰렸다.
“오라버니…….”
그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눈에 보이는 곱디고운 나의 누이.
“소연아…….”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