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9장. 다시 전쟁(6).
“뭐라고? 당대표 도장을 가지고 날라?”
“네……. 위원장님.”
“그 새끼 미친 거 아냐? 시일이 촉박한데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공천 관련 확정 회의장에 들어선 여당 공천위원장 김한규.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그는 목이 터져라 욕을 퍼부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당장 며칠 후가 선거 등록 마감일이다.
그 전까지 공천을 마무리 짓고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에 돌입해야 했다.
어제만 해도 상황이 괜찮았다.
당 산하 연구소에서 160석 이상의 압승을 예상했다.
여러 실정과 악재가 겹치긴 했지만 언론이 실드를 쳐주었고 댓글 공작을 더하여 급한 대로 여론을 잠잠하게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곳에서 사고가 터졌다.
후보 등록에 반드시 필요한 당대표 직인.
이건 위조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생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지금까지 이런 어이없는 사태는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아무리 반대파가 꼴 보기 싫어도 대세를 따라 도장은 찍어줬다.
정치력이 딸리면 한발 물러설 수 있는 자세를 보이는 것도 암묵적인 규칙처럼 지켜져 왔다.
‘이유성! 이 개자식을 그냥 놔두는 게 아닌데!’
두 번의 정치 위기를 돌파하고 살아남은 이유성.
밟아도 죽지 않는 잡초처럼 살아남더니 끝내 발목을 제대로 잡았다.
“어떻게 할까요?”
“그 새끼 지금 어딨어?”
사무직 직원들이 보고 있는 자리임에도 김한규 공천위원장은 대놓고 당대표를 이 새끼 저 새끼라고 불렀다.
어차피 당대표도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공천위원장이 된 뒤로 안하무인의 성격이 꽃을 피웠다.
한국대를 졸업한 뒤 행정고시 패스, 그리고 미국 대학교에 국비 유학까지 다녀온 전통적 엘리트였다.
그는 SKY 출신이 아닌 의원들은 모조리 아래로 깔고 보는 경향이 강했다.
“부산 지역구에 있는 걸로 파악됐습니다.”
“전화 연결해.”
“받지를 않습니다.”
“뭐라고? 전화도 안 받는다고?”
“할 말 있으면 직접 찾아오라고 비서가 전해왔습니다.”
“미치겠네. 그 자식 진짜 미친 새끼 아냐?”
머리카락을 팍팍 손으로 털어대며 김한규는 분노를 삭이느라 애썼다.
‘이게 언론에 알려지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파장이 순식간에 밀어닥칠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아도 곱지 않는 눈길로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내분까지 밖으로 알려지면 선거 판세가 어려워지는 건 당연지사.
‘최대한 막아야 해.’
김한규 자신도 이번이 정치인으로서 마지막 행보가 될 걸 알고 있었다.
공천위원장이 되면서 국회의원 공천권을 받지 않았다.
공평을 위한 조치라고 했지만 다른 속셈이 있었다.
선거만 무사히 끝나면 큼지막한 공기업 수장으로 자신을 꽂아주기로 주순자가 약조를 해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이 꼴 저 꼴 다 보면서도 꼬리를 흔드는 개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일이 여기서 틀어지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동료 의원들로부터 온갖 눈총을 받고 원망이 대상이 될 건 불을 보듯 빤했다.
친조계 의원들이 당선되지 않으면 조근영 대통령과 함께 묶여 싸잡아서 심판받을 수 있었다.
무조건 상대를 죽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살벌한 전쟁터.
그 전쟁터에서 이유성이 먼저 포탄을 날렸다.
스윽.
그때 임시원내대표가 들어왔다.
능숙한 술수를 통해 원내대표였던 왕승문이 자진 탈당하게 만들었다.
모든 게 김한규 뜻대로 돼 가고 있었지만 이유성이 사고를 제대로 쳐 버렸다.
“무슨 일 있습니까?”
젊은 나이에 3선 의원이 된 임시원내대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사태를 파악 못 한 눈치였다.
“원 의원.”
“넵! 선배님.”
김한규의 학교와 정치 후배인 원철용이 군기 잡힌 짱짱한 목소리로 답했다.
“부산 가서 빼앗아와.”
“네?”
“이유성 그 새끼가 당대표 도장 들고 날랐어.”
“도, 도장요?”
그렇지 않아도 큼지막한 원철용의 눈이 더욱 커졌다.
전혀 상상도 못 한 사태에 말문이 턱 막혔다.
“협상을 하든지 무슨 수를 써서든 가서 도장 찾아와. 정 안 되면 밟아놓고라도 가져와!”
빈말이 아닌 준엄한 김한규의 명령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바로 가봐. 가면 만나준다고 했으니까.”
“넵!”
원철용이 힘차게 답하고 부리나케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 순간.
“원 위원님. 그 소문이 사실입니까? 이유성 대표가 옥쇄를 들고 부산 지역구로 갔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닙니다!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밖으로 막 튀어나간 원철용 위원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 말씀 해주십시오!”
“김한규 공천위원장님 안에 계십니까?”
“위원장님!!!”
‘뭐야! 벌써 알아챈 거야!’
방금 전까지 조용하던 밖이 일시에 소란스러워졌다.
국회에 상주하고 있던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하이에나처럼 몰려들었다.
띠리리리리리.
그때 울린 김한규의 스마트폰.
“!!!”
번호를 보던 김한규의 얼굴이 새카맣게 변했다.
띠릭.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 김 의원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당대표가 도장을 들고 날랐다는데 사실이에요?
천박하게 쏟아지는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
“선생님 그게…….”
- 됐어요! 더 이상 말 필요 없어요! 가서 도장 찾아와요!!!
“알겠습니다…….”
김한규는 기세등등하던 조금 전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꼬리를 말았다.
이번 선거가 끝나면 국회의원도 뭣도 아니었다.
한자리 차지하기 위해서는 주순자 눈치를 볼 수밖에 처지였다.
- 에휴, 주변에 믿을 만한 인간이 없어.
띠릭.
주순자가 한숨을 터트리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런 개 같은 X이!’
속으로 쌍욕을 퍼붓는 김한규.
분노를 삭이느라 얼굴이 붉어졌다.
인생 100세 시대였다.
길고 긴 세월 눈치를 안 보려면 깔고 앉을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가장 안전하고 큰 덩어리의 밑천을 잡는 방법은 낙하산으로 공기업 대표가 되는 것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수십억씩 꽂아야 되는 일을 자신은 큰 공들이지 않고 말로 얻어낼 수 있었다.
“차 대기 시켜!”
“넵!”
‘이유성……. 일단 너부터 때려잡는다!’
***
‘뱀과 악마!’
양우석은 장태산의 비유에 화들짝 놀랐다.
일반적인 비유로 사용되는 묘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농담이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로 알 수 있었다.
장태산의 눈에 이글거리는 것만 봐도 진심 어린 분노였다.
꿀꺽.
양우석은 마른 침을 삼켰다.
공간에 퍼져 있는 장태산의 기가 장난 아니었다.
“야당 안에도 그 종자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말입니까?”
“상당수 쓰레기들이 걸러져 나갔지만 몸을 감춘 뱀들의 하수인들이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말을 하는 장태산의 모습은 마치 예언자 같았다.
“누굽니까?”
양우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됩니다.”
“미리 찾아서 단죄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럴 능력이 되십니까?”
“…….”
장태산의 반문에 양우석은 입을 다물었다.
지난 4년 동안 당했던 야당 의원의 서러움이 새록새록 기억났다.
아무리 잘나가봐야 세력이 미미한 2선 의원에 불과했다.
이번에 당을 창당해 나간 동료 야당 의원들보다 끗발이 밀렸다.
당에 숨어 있는 하수인들을 찾아 응징할 힘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힘이 없는 자의 분노는 만용입니다.”
“……그렇군요.”
“지난 4년 동안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보궐 당선 초선 시절에는 선배들 눈치 보느라 바빴다.
2선 의원 때는 동료를 만들도 그나마 나은 계보에 몸을 실었다.
정치는 절대 혼자 할 수 없었다.
등을 맡길 동료를 만드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친구 같은 동료를 팔아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양 의원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대한민국은 오염 상태가 심각합니다. 친일파의 잔재가 곳곳에서 뿌리를 내리다 못해 무성하게 번식했습니다.”
“…….”
“특히 과거 민주화 운동을 펼쳤던 이들의 변절이 가장 무섭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친구로 가장해 주위에 포진해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이상도 현실의 부와 권력 앞에서는 의미가 퇴색됩니다.”
“!!!”
민주화를 주도했던 이들이 당에 상당수 포진했다.
그들이 변절하면 여러모로 치명타가 될 수 있었다.
“저도 믿지 마십시오.”
“장 회장님도 말입니까?”
양우석은 혼란스러웠다.
장태산을 믿지 말라는 건 오직 자신 스스로만 신뢰하라는 의미였다.
“그 정도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큰일 하셔야죠.”
큰일이라는 말의 무게감이 달랐다.
대권을 노리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장태산이 염두에 두고 말하는 그 무엇.
아직은 미개봉 선물 상자 같았다.
“깊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애국하는 마음과 초심만 잃지 않으면 됩니다.”
‘애국과 초심…….’
가장 어려운 주제였다.
항상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고 생각하며 법안을 제안하고 투표에 임했지만 동료들의 부탁에 흔들릴 때가 많았다.
서로 상부상조하지 못하면 후에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까닭이었다.
“양 의원님 뒤에 제가 있습니다. 쭉 밀고 나가면 됩니다.”
장태산이 양우석의 마음을 훔쳐보기라도 한 듯 힘을 보태왔다.
“그 말씀이 듣고 싶었습니다.”
양우석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어느새 나이가 50줄에 들어섰다.
살 만큼 살아온 인생이었다.
국회의원이 되면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고 권력의 맛도 느껴봤다.
장태산의 후원 덕분에 돈에 구애받지도 않았다.
남아 있는 건 국가와 민족, 후손을 위한 뜨거운 마음뿐.
사나이로 태어나서~♬.
양우석의 특이한 스마트폰 벨소리가 울렸다.
“황 비서 무슨 일이야?”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말해 놓은 상황이었다.
눈치 빠른 국회 비서들이 그걸 알고도 연락해 왔다는 건 중대한 사건이 터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 의원님. 이유성 당대표가 날랐다고 합니다.
흥분한 비서의 목소리가 터졌다.
“날라? 무슨 소리야?”
- 지금 의원실에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이유성 의원이 당대표 직인 도장을 들고 지역구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뭐라고 도장을 들고 날라?”
놀라서 양우석도 덩달아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야당은 공천이 거의 끝났다.
하지만 여당은 지금 막바지 계파간 샅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요란하지만 대부분 뒷공작을 통해 서로 주고받으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 같은 소문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선거에 결코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마당에 당대표가 직인 도장을 들고 튀었다는 건 대사건이었다.
- 기자들도 알아챘고, 지금 언론이 난리입니다.
“기자들이 어떻게?”
당 간에는 이런 일은 터져도 서로 발설하지 않는 게 예의였다.
그런데 기자들이 냄새를 맡았다는 건 이미 내부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가 있다는 것.
‘설마?’
양우석이 고개를 돌려 장태산을 쳐다봤다.
씨익.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장태산.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게 나의 적들끼리 벌이는 싸움 구경 아니겠습니까.”
축배를 들 듯 잔을 들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장태산.
오히려 섬뜩하게 보이는 미소가 그의 입가에 슬쩍 비쳤다 사라졌다.
‘장태산 회장……. 이 남자야말로 뱀의 지혜로 무장한…… 진짜 악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