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5장. 다시 전쟁(2). (1,022/1,284)

1035장. 다시 전쟁(2).

“이거 날리면 우리 욕먹습니다. 나중에 야당이 들고 일어서면 국정감사까지 불려 나갈 사항입니다.”

날이 바짝 선 목소리로 강하게 의견을 내뱉는 도종수 금융위원장.

마음이 천근만근 답답했다.

늦은 밤 청와대 서별관에서 비밀회의가 진행 중이다.

공길춘 비서실장 주재하에 윤택훈 경제수석, 장동건 산업은행장, 윤병운 민정수석까지 참석했다.

청와대를 비롯해 정권 경제 라인 실세들이 다 모인 셈이다.

“국정감사라니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닙니까?”

윤택훈 경제수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한마디 쏘아붙였다.

전통 기재부 관료 출신이었기에 국정감사라는 말에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했다.

“한국해운은 개인 기업인 동시에 국적해운사의 위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해외 화주들은 한국해운을 한국이라는 국가와 동일 선상에서 취급합니다. 그런데 파산이라니요!”

도종수 금융위원장은 몇몇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들 미쳤어.’

한국해운이 방만 경영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이렇게 회의 몇 번으로 날려 버리기에는 그 파장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났다.

지금도 법정관리로 넘어간 것을 두고 화주들이 클레임을 걸어오고 있는 상황이다.

혹시라도 돈을 떼일까 봐 현금을 주지 않으면 각 항구에서 하역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물건을 제때 공급받지 못한 화주들이 빗발치게 항의했다.

긴급 유동자금 지원과 산업은행 보증으로 최악의 사태까지는 내몰리지 않게 막고 있지만 풍전등화 신세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법정관리도 부족해 파산으로 날려 버리자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정책국 기업구조개선과 보고에 의하면 한국해운은 반드시 살려내야 할 업체였다.

해운산업은 해운 주권과 직결되어 있었다.

수출로 먹고 살아가는 한국산업에 있어 국적 대형선사는 유럽과 중국, 미국을 이어주는 수출의 가교역할을 담당한다.

99% 이상의 수출과 수입이 해운을 통해 이뤄졌다.

만약 한국해운이 법정관리를 넘어 파산하게 되면 그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당장 부산항의 컨테이너 환적물량이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다.

자연스럽게 일자리가 줄어들고 다른 물건 수출에 악영향을 끼칠 게 뻔했다.

동시에 전쟁이라도 발발하면 군수물자를 위한 징발이 아예 불가능하게 된다.

해외 해운업체는 징발 의무가 없었다.

‘살림이나 하던 여자가 무슨 사업을 하겠다고 나서서…….’

도종수는 한국해운의 전 회장인 한은영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해운의 전 주인이었던 한은영의 욕심 때문에 이 사달이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그룹에서 한국해운을 물려받은 남편이 죽자 한은영은 경영권을 위협하던 시아주버니 정중용 회장에 대응하기 위해 지주회사를 세우고 방어에 나섰다.

그렇게 어렵게 경영권을 지켜냈지만 경영에는 빵점이었다.

일반 기업도 아니고 해운 업체였다.

평소에도 도박판으로 불릴 만큼 경영이 쉽지 않은 해운 사업.

호황 때 벌어들인 돈으로 불황을 대비해 저축하거나 자기자본으로 대형 화물선을 발주하는 게 상식적인 경영 방식이다.

하지만 집에서 살림이나 하고 강남 사모들과 어울려 쇼핑이나 하던 한은영은 경영능력이 제로였다.

누적된 수익을 주식 배분으로 자신과 주주로 지정된 자녀들의 배를 불리는 데 썼다.

호황이 찾아오자 돈에 눈이 멀어 비싼 용선료를 내고 배를 빌려 항로에 투입했다.

그것도 단기가 아닌 장기계약으로.

도박판답게 호황은 곧 불황으로 급 방향을 틀었다.

사업 오판으로 호황 때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발주한 어정쩡한 선박량의 배들까지 바다에 띄웠다.

물건을 실어 나를 때마다 손해가 났다.

2008년 리먼 사태 때부터 누적된 손해가 지속되어 온 게 세를 불리는 꼴이 됐다.

기름값까지 치솟은 상태였기에 해운업은 지속적인 불황의 늪에 빠져들었다.

자본 잠식 상태에 이를 정도로 한국해운 재무제표는 엉망이 됐다.

그사이 자본력을 소유한 해외 대형 선사들은 기존 선복량의 두 배에 달하는 대형 컨테이너선을 투입했다.

가격 경쟁력에서 벌써 끝난 게임이었다.

해운판 치킨 게임의 발발.

투자에 소심했던 한은영은 기껏 4000과 13000 TEU선을 발주했다.

유럽 대형 선사들과 발을 맞추지 못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한번 삐끗한 것이 치명타가 됐다.

돈도 안 되는 비경제선을 배정받았다.

대놓고 해운 동맹에서 찬밥 신세가 된 것이다.

더구나 정부 지원은 전무했다.

건설업체와 결탁해 오대강을 파던 최병박 정부는 급기야 해양수산부를 날려 버렸다.

겨우 조근영 정부 때 부활을 했지만 조직 자체가 온전하지 못했다.

정책 전문가가 사라져 버려 해운업체들은 자신들만의 생존 능력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매달 회의를 통해 해운업에 지원을 결정하는 일본과 사뭇 달랐다.

엄청난 세계 수출입 물량을 집어삼키기 위해 혈안이 된 중국 정부의 타깃이 됐다.

동맹 해운업체들은 한국해운을 찢어 먹을 생각에 노골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았다.

한국해운, 아니 한국그룹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 손에 의해 철저히 지원이 막혔다.

“VIP께서 특별히 해운업 구조조정을 언급했어요. 수조원 대에 이르는 손해를 국민 세금으로 언제까지 방어할 수는 없어요.”

국익보다 대통령의 명령과 사익이 먼저인 공길춘 비서실장이 넌지시 의견을 냈다.

“맞습니다. 우리보다 GDP가 큰 영국이나 인도, 캐나다, 심지어 미국까지도 대형 국적 해운사가 없습니다. 그래도 아무 문제 없이 잘 굴러갑니다.”

윤택훈 경제수석이 비서실장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들은 해운 경쟁 상대가 아닙니다. 우리와 수출입 구조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해운사업이 지금은 적자지만 호황일 때는 얼마나 많은 이득을 창출했습니까. 한국해운이 직접 고용하고 있는 직원들만 1만 명이 넘습니다. 거기에 부산항을 비롯해 수출입 항구 종사자들은 어떻고요. 그들 모두를 거리로 쫓아낼 겁니까?”

이곳에서 가장 발언권이 떨어지는 도종수였지만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금융위원장이 되기 이전에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땄던 전문 경제 관료였다.

“그럼 그 손해를 도 위원장이 책임질 겁니까? 대웅조선 세금으로 살려냈다고 국민들에게 얼마나 욕을 먹은지 아시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왜 세금으로 사기업을 우리가 먹여 살려야 합니까? 법정관리 끝나면 한국그룹에 다시 돌려주는 걸 원하는 겁니까? 뭐 받은 거라도 있습니까?”

얼마 전 새로 부임한 장동건 산업은행장이 삐딱하게 받아쳤다.

“제가 지금 한국그룹에 로비라도 당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도종수가 발끈했다.

“대책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때 윤택훈 경제수석이 끼어들었다.

“대책요?”

“연대상선이 있지 않습니까.”

“주력 해운 산업이 달라요. 한국해운은 컨테이너선이지만 연대상선은 벌크선이나 자동차 운반선이 주 종입니다.”

“그게 그거죠. 연대상선이 자연스럽게 물량을 흡수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배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법정관리를 통해 주인만 바꾸자는 겁니다. 파산하면 한국해운이 지금껏 운영하던 알짜배기 미주노선도 날아갑니다. 그리고 배를 빌려준 선박금융 업체들이 가만있을 것 같습니까? 모두 회수해 가버리면 고물선이나 별 필요도 없는 배들만 남는다 이겁니다.”

도중수의 외로운 싸움은 계속됐다.

“…….”

누구 하나 그의 말에 호응하지 않았다.

“국민 정서와 산업구조정책을 위해서라도 결단을 내려야 해요. 도 위원장은 본인이 책임지지 못할 말은 삼가세요.”

공길춘이 수첩을 들고 싸늘하게 도종수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내가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이 머저리 같은 인간들을 상대로.’

명예욕에 오늘의 자리까지 참고 올라왔지만 도종수는 이 순간 말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졌다.

이미 윗선에서 다른 방향으로 결론이 났음이 확실했다.

민정수석이 낄 자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늘 회의에 윤병운까지 합세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분위기만 살피는 냉혈한 윤병운.

안경테를 만지며 지그시 도종수를 빠르게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모종의 경고였다.

여기서 더 발언했다가는 내일 아침 당장 사표를 제출하라는 명을 들을 게 확실했다.

띠리리리리리.

그때 공길춘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스마트폰도 아닌 노인들이나 사용하는 구형 모델.

“각하. 하명하십시오.”

전화 응대를 하면서도 고개를 숙이며 대통령에 대한 예를 표하는 공길춘.

“네……. 네. 알겠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빠르고 정확하게 진행하겠습니다.”

윗선에서 하명이 떨어진 게 확실했다.

“평안히 쉬십시오.”

대화는 길지 않았다.

속전속결로 통화를 끝낸 공길춘.

“결론을 내리죠.”

예리한 시선으로 좌중을 훑어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국해운……. 파산 진행하도록 하세요. 최대한 빠르게!”

***

- 어젯밤 청와대 서별관 회의에서 파산으로 결정 난 것 같습니다.

“확실합니까?”

- 회의에 참여한 금융위원장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친구입니다.

내가 겪고 온 회귀 전의 사건과 똑같은 결론이 났다.

“의외의 결과이군요.”

알고도 모른 척했다.

- 저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약간의 국제 상황과 경제 상식만 있어도 그런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들 은행은 채권이 어느 정도 있습니까?”

- 대략 2000억 정도입니다.

“그렇게 많지 않군요.”

- 산업은행이 가장 큰 채권자입니다.

계속된 자금 투입으로 준 국영이 되어버린 한국해운.

우리들 은행도 채권단에 포함되어 있지만 물린 금액은 그리 크지 않았다.

“도도희 대표가 전면에 나설 겁니다. 채권단 회의에서 적극 지원해 주십시오.”

-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 곧 찾아뵙겠습니다.

우리들 은행 현준규 회장이 긴급 사항이라고 연락을 해왔다.

사실 한국해운은 그렇게 큰 자산 규모를 보이는 기업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해운이라는 사명처럼 지금까지 쌓아놓은 이름값은 상당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적 해운사 취급을 받았다.

그걸 한순간에 날려버릴 생각을 하는 무식한 정치권 인사들.

“회귀해도 어떻게 세상 돌아가는 건 똑같은 거야…….”

악한 놈은 시공간이 뒤엉켜도 여전히 악인이었다.

내가 일으킨 나비 효과가 곳곳에서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인간의 본성은 생각처럼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번 판을 주도하고 있는 주순자는 여전히 멍청했다.

나를 자신의 편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난 2년 동안 주순자와는 거의 연락할 일이 없었다.

정권이 중반을 넘어가자 주순자는 더 바빠졌다.

평창 올림픽을 빌미로 한탕 제대로 땡기려 작업 중이다.

대형 그룹들을 자극해 자신이 세운 법인에 기부하거나 투자토록 압력을 넣었다.

틈틈이 외교행랑을 통해 거액을 해외로 빼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모든 걸 뒤에서 낱낱이 지켜봤다.

그러나 내가 나설 때가 아니었다.

좀 더 때가 무르익고 국민이 성숙하기를 기다렸다.

한 방에 목을 쳐서 끝내야 했다.

그리고 그 때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같은 결의 악마들끼리 서로 치고받으며 삐걱거렸다.

“일단 초를 한번 쳐볼까.”

스마트폰을 꺼냈다.

단축번호를 길게 눌렀다.

띠링 띠리리링~♫.

밝고 경쾌한 왈츠풍의 멜로디가 들렸다.

- 보스! 

여전히 나를 경외에 찬 태도로 대하는 로버트 라이언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새로운 여자친구가 왈츠를 좋아하나 봅니다.”

- 클래식 전공자입니다.

내 물음에 로버트 라이언은 부끄러움도 없이 가볍게 답했다.

프리한 사고방식의 미국 남자다웠다.

이혼 이후로는 절대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않고 있는 로버트 라이언.

주변에 널린 미녀들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걸 선택했다.

연애가 결혼이라는 공식이 통하지 않는 미국에서 그답게 살았다.

내가 준 약과 치료를 통해 젊은 남자 못지 않은 파워를 겸비한 로버트 라이언은 여전히 바빴다.

그만큼 각종 투자 회사들 수가 늘어났다.

쌓여가는 잉여 자금으로 미래 산업 기술들을 매집했다.

형체 없는 숫자를 실체로 바꾸는 작업은 계속 진행 중이다.

지난 2년 동안 재산은 배로 늘었다.

덩치가 커진 만큼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견제하는 세력과 균형을 맞춰 경쟁하는 과정에서 수익률이 줄어들었다.

미래 지식을 알고 있다고 해도 무턱대고 판을 키울 수는 없었다.

과거처럼 단시간에 가질 수 있는 이익을 탐하지 않았다.

시장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갔다.

“언제나 부럽습니다.”

- 보스. 농담이시죠?

로버트 라이언도 나에 대해 웬만큼 파악했다.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 하명하십시오.

확실하게 주종 관계를 따르는 로버트 라이언.

“한국해운에 대해 정식으로 문제 삼아 주십시오.”

- 알겠습니다.

로버트 라이언을 통해 한국해운 주식을 매집했다.

여러 갈래 투자 회사를 통해 매집한 덕에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순간 소유 주식 비율은 상당해진다.

주 채권 은행인 산업은행과 싸움을 벌일 정도가 된다.

“조만간 캘리포니아 별장에서 뵙도록 하죠.”

-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띠릭.

통화가 끝났다.

이제는 피해갈 수 없는 본격 전쟁.

“다음 수순은…….”

스마트폰을 보는 순간 빙긋 웃음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듣게 될 반가운 목소리.

이제부터가 막장드라마의 본격 전개가 시작될 때였다.

회귀의 전설 2부

다시 전쟁(3).

“재고? 도대체 이 새끼들은 VIP 말씀을 개똥으로 듣는 거야? 까라면 까야지! 뭐가 어째! 어제 지시가 내렸는데 왜 말을 안 듣는데!”

청와대 관저에서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밖에서 경호를 서던 이들은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절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보고 들었던 모든 것들은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아야 한다고 교육 받았다.

하다못해 그게 말도 안 되는 개 같은 짓거리여도 결코 입 밖에 내서는 안 됐다.

“여기저기서 우려로…….”

정재근 비서관이 말끝을 흘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구조조정이었다.

사방에서 재고해 달라는 의사가 속속 전달됐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국해운을 본인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날려버리려는 무서운 여자.

독기가 바짝 올라 있었다.

“이러니까 야당이 우리를 만만하게 보는 거 아니에요! VIP가 누구예요? 이 대한민국을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 맞잖아요. 그런데 그 말에 토를 달아요? 그렇게 나라가 걱정되면 다들 대통령 되었어야지!”

주순자의 호통이 문밖을 지나 통로까지 멀리 퍼져 나갔다.

“…….”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지는 관저.

“대통령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 말이 틀려요?”

요가를 마치고 몸에 좋은 유기농 3색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던 조근영.

갑자기 상관없는 자신에게 떨어지는 질문에 잠시 두 눈을 껌뻑였다.

“내가 생각해도 이 문제는 결정이 난 것 같은데. 다시 말을 꺼낸다는 것은 내 지시에 항명하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특유의 늘어진 화법으로 길게 답하는 조근영.

주순자의 눈치를 살살 봤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를 잃고 어느 순간부터 주순자의 집안과 얼기설기 얽혔다.

그들이 수족처럼 모든 걸 알아서 처리해 줬다.

아버지는 언제나 나랏일로 바쁘기만 했다.

이런저런 일로 여러 차례 만남을 가지면서 자연스럽게 주순자와 친구가 됐다.

그녀는 집안일은 물론 먹는 밥부터 모든 일에 있어 평안하게 자신의 일을 처리해 줬다.

평소에도 자신을 공주처럼 대했다.

어린 시절부터 누려오며 익숙해졌던 삶을 그대로 지탱하게 해준 주순자와 그녀의 집안.

절대 그들 구성원 눈밖에 나고 싶지 않았다.

청와대에서 물러나면 노후를 책임질 적임자 역시 주순자였다.

대통령 조근영은 하나부터 열까지 세상 물정이라고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죠? 그런데 이것들이 미쳐가지고 내 말을 거역해? 누구예요! 당장 그 자식 잘라버려요!”

고위 공무원을 외국인 일용 노동자 정도로 여기는 주순자였다.

“넵!”

정재근은 일단 목소리에 힘을 실어 대답했다.

여기서 ‘아니요’라고 말했다가는 현장에서 자신도 잘려나간다.

더럽고 치사해도 먹고 살기 위해서 버텨야 했다.

다른 비서관들처럼 아직 노후 대비용 뒷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처지였다.

“아우! 한국그룹 회장만 생각하면 재수가 없어. 지 까짓 게 뭐라고. 아직도 나를 한국항공 직원 마누라로 보는 거잖아. 뭐라고? 내가 호빠 선수랑 놀아나는 천한 인간이라고?”

주순자는 얼마 전 들었던 자신에 대한 뒷담화에 이를 갈았다.

미국으로 쫓겨났다 들어온 한국항공 정중용 회장의 아내 조인화가 그 소문을 강남에 퍼트렸다.

일개 비행 사무장 와이프가 꼴뚜기처럼 날뛴다는 말까지 덧붙여서 말을 만들어 냈다.

그렇지 않아도 동계 올림픽 조직위원장인 정중용 회장과 이미 몇 번 부딪쳤던 주순자.

내친김에 칼을 빼들고 망나니처럼 휘둘렀다.

한국해운 한은영 회장이 이번에 제대로 해운업을 말아먹었다.

구조조정이라는 핑계로 정중용을 끌어들였다.

주순자가 보이는 뒤끝은 이 바닥에서 아주 유명했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한국해운을 품에 안은 정중용 회장.

‘한국’이라는 같은 사명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주순자가 무차별적으로 두들겨 팼다.

또 정중용 회장을 동계 올림픽 조직위원장에서 끌어내렸다.

사재를 탈탈 털어넣게 만들었다.

그래도 분이 가라앉지 않고 화도 풀리지 않았다.

급기야 청와대 관료들을 동원해 한국해운을 이번 기회에 날려버리라고 지시했다.

한국항공이 투자한 자금이 수조가 넘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명분도 좋았다.

대웅조선에 대한 세금 투입으로 인해 국민들의 정서가 좋지 않았다.

여론을 등에 업고 원하는 대로 질러버린 주순자.

‘내가 알 게 뭐야.’

주순자도 그 일의 진행 과정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대통령에게 올라온 주간 보고서에 기록된 한국해운 파산 시 대응에 관한 대책 논의.

연대상선이 한국해운을 이어받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적시되어 있었다.

예상 밖으로 이 건은 대통령의 치적이 될 수 있었다.

과거 IMF 시절 국가가 주도했던 기업간 구조조정으로 오늘날까지 알짜 기업들이 살아남았다.

무식한 주순자는 이번 일도 알아서 흘러갈 거라 생각했다.

기업인들이 생각보다 똑똑하다는 걸 주순자도 인정하고 있었다.

“나가 봐요. 내가 지시한 일들 꼼꼼히 체크해서 저녁에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선생님.”

정재근은 주순자를 향해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방에서 나갈 때까지 여전히 주스를 마시고 있던 대통령에게도 짧게 고개를 숙였다.

권력 순위를 단박에 확인시켜 주는 현장 모습이었다.

누구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없을 때는 이런 일이 더 비일비재했다.

“더 조여야겠어요. 이것들이 잘해줬더니 우리를 만만하게 봐요.”

“그래요. 만만하면…… 언젠가 배신하게 되는 거죠.”

조용하던 조근영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믿었던 부하에게 총을 맞아 사망했던 자신의 아버지 일이 떠올렸다.

그 때문에 배신이라는 단어에는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 자식 손 좀 봐야겠어요.”

“누구요?”

“돼지 같은 당대표요!”

“맞아요! 감히 우리 뜻을 거역하고…….”

주순자와 함께 분노하는 조근영.

곧 국회의원 선거였다.

작년까지만 해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일이 터졌다.

전 최병박 대통령을 따랐던 패거리 의원들이 조직적으로 분란을 일으켰다.

거기에 더해 자신이 키워줬던 이유성 대표가 권력욕을 드러냈다.

판이 이렇게 되면서 퇴임 후를 준비해야 하는 조근영은 뒤가 불안해졌다.

그 전에 이번 선거에서 자신을 따르는 의원들을 최대한 많이 당선시켜야만 했다.

주순자가 그 판을 짰다.

말 잘 듣는 사냥개들을 대거 입후보시키는 게 그 시작이었다.

당연히 살생부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게 유출되고 말았다.

비 조근영계 의원들이 대거 반기를 들었다.

오월호를 비롯해 여러 실정으로 평가가 바닥을 치는 조근영 대통령.

남은 임기에 주순자는 긴장했다.

지금까지의 암묵적 관행을 깨고 사냥개들을 의원 입후보 명단에 집어넣었다.

공천관리위원장을 자신의 사람으로 심었다.

문제는 당대표.

자신을 지지하는 의원들까지 쳐내자 그가 대놓고 반발했다.

한때 주순자와 함께 조근영을 위해 헌신하던 의원이어서 철석같이 믿었건만 배신을 때렸다.

분노가 끝까지 차오른 주순자.

“직접 몰아붙이세요. 이건 전쟁이에요!”

대통령을 닦달했다.

“그래야죠! 반드시…… 그놈을 무너트릴 거에요!”

조근영이 단단히 마음을 먹고 답했다.

다른 건 다 용서해도 배신만큼은 용서치 않는 정치 스타일이 고개를 든 것이다.

그녀가 이를 악물며 깊은 적개심을 드러냈다.

띠리리리리리리리리리.

그때 공간을 울리는 스마트폰 벨소리.

주순자가 탁자 위에 있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이 자식은 왜 또 전화하고 지랄이야!”

주순자가 인상을 쓰며 화를 냈다.

띠릭.

말과 달리 빠르게 통화버튼을 누르는 주순자.

“한동안 잠잠하더니 왜 전화질이야!”

- 누님. 그 동안 잘 계셨습니까?

***

- 왜 전화질이야! 나 지금 기분 안 좋다고!

이 아줌마 성격 참 안 변한다.

다짜고짜 자신 기분이 안 좋다고 화부터 냈다.

안하무인의 장인이 따로 없었다.

“그래요? 무슨 일 있습니까?”

심사가 뒤틀려 있다고 하니 살짝 반응 좀 해줬다.

몇 년 동안 인연이 지속돼 왔다.

그리고 앞으로 볼 날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주순자가 지금처럼 날 뛸 수 있는 날도 1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 알아서 뭐 하게?

“왜긴요. 도와주려고 그러죠. 우리 사이가 보통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 됐어! 할 말 없으면 끊어. 너하고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

쌀쌀할 말투와 달리 착실하게 주순자는 나와 통화를 이어갔다.

이런 유형의 성격을 소유한 사람은 의외로 다루기가 쉬웠다.

“성격 급한 건 여전하십니다. 쯧.”

안타까운 듯 혀를 차줬다.

- 너 지금 나 무시해?

대번에 미끼를 무는 그녀.

의도하는 방향대로 일이 착착 진행됐다.

“성격이 왜 그렇게 급합니까. 그러니까 밑에 사람들이 다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 뭐, 뭐라고?

“소문 다 났습니다. 요즘 국회의원 선거 때문에 엉망이라면서요. 그러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대통령 퇴직 후에 발 뻗고 주무실 수 있겠습니까?”

아픈 곳만 골라 콕콕 찔렀다.

- 으드득.

살벌하게 이 갈리는 또렷한 소리로 들려왔다.

아직도 자신이 측전무후처럼 절대 권력자인 줄 착각하고 있는 주순자.

“그건 됐고요. 누님, 저 지금 엿 먹이려고 이러는 거 맞죠?”

돌연 화제를 돌렸다.

-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주순자가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화가 나도 함부로 나의 통화를 끝내지 못했다.

주순자에게 나는 건들지 말아야 할 러시아 불 곰 같은 존재로 각인돼 있었다.

“제가 억수로 자금을 투자한 회사를 날리라고 했다면서요. 사실입니까?”

- 알아듣게 말해. 내가 뭘 날려!

칼칼하고 앙칼진 목소리가 따박따박 대꾸를 해왔다.

“한국해운.”

짧게 설명을 덧붙였다.

- 너 거기 투자했어?

“주식이 싸서 돈 좀 넣었는데 그걸 누님이 법정관리로 돌리더니 이제 파산으로 밀어붙인다던데……. 생각은 하고 사시는 겁니까?”

- 이 새끼가 오냐오냐 했더니 버릇이 없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네가 잘못 투자한 걸 왜 나에게 따지고 지랄이야!

“지금 이 정도면 막 가자는 거죠?”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계속 주순자를 자극했다.

정신없이 몰아붙여야 그나마 대화가 편한 스타일이었다.

- 그렇다면 어쩔래! 

주순자가 또 발끈했다.

참 멍청한데 성격도 개차반이다.

“누님……. 한 번 해보자는 겁니까?”

목소리를 한껏 쫙 깔았다.

과거 주순자 집에 쳐들어가 들려줬던 살기 가득한 음성 버전으로 바꿨다.

- …….

단박에 주순자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미국에 있는 월가 큰 손인 제 친구도 돈 좀 묻었는데. 이렇게 나오면 친구 성격상 소송까지 갈 겁니다.”

로버트 라이언을 팔았다.

- ……진짜야?

주순자가 잔뜩 쫄았다.

대한민국에서나 통하지 미국에서는 어림도 없는 주순자였다.

“내가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봤습니까?”

- 하아.

주순자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격대로 부리다 고민이 많아질 것이다.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았던 한국 그룹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그녀.

양쪽 저울에 상황을 올려놓고 추를 보며 가치 판단에 들어갔다.

“집안일부터 잘 처리하시죠. 한국해운은 채권단에 맡겨 놓고 말입니다.”

- 그거 가져서 뭐 하게?

주순자가 멍청하긴 해도 눈치 하나는 빨랐다.

“가지는 게 아니라 망해가는 기업에 애국하는 심정으로 투자하는 겁니다.”

- 흥! 됐어. 나한테 그 거짓말이 통할 거 같아?

응. 통해.

주순자와의 대화는 언제나 흥미진진하고 재밌다.

건들면 바로바로 톡톡 반응하는 중국산 성분 불량 탱탱볼 같았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파산 철회하고 시장 순리대로 넘기시면 됩니다.”

슬슬 대화를 마무리하고 통화를 끝낼 때였다.

그녀와의 통화는 이제 오늘로써 마지막이 될 것이다.

앞으로 펼쳐지게 될 파란만장한 주순자의 운명.

- 내가 왜?

주순자가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세웠다.

이럴 때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의사전달 방법이 최선이다.

나의 입가에 무심히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누님……. 일찍 가고 싶으세요?”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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