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4장. 다시 전쟁.
스슥 스스스슥.
가벼운 터치 감을 보이며 붓이 캠퍼스 위를 부드럽게 지나갔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여인은 아직 눈이 녹지 않은 거대한 설원을 마주하고 화폭에 담았다.
아스라이 먼 거리에 있는 산맥과 그 위로 떠오르고 있는 찬란한 해의 빛살들.
둥둥 떠가는 구름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화폭에 그대로 옮겨졌다.
붓의 움직임에 한 치의 망설임은 없었다.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이 시원하게 그려지는 풍경화.
그곳에 빛이 함께 그려졌다.
웅장한 설원 위로 쏟아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광선 같았다.
메시아의 상징 같기도 하고 우주의 투명한 숨결 같기도 한 빛줄기.
펼쳐진 풍경 속으로 절묘하게 쏟아지는 빛은 보기보다 더 강렬했다.
차가운 눈이 덮인 대지 위에 쏟아지는 빛의 광선들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소망 같았다.
툭.
그러다 어느 순간 분주히 움직이던 손길이 멈췄다.
새하얀 물감 속에서 피어나던 빛의 꽃은 어느새 완성되어 있었다.
“아직도…… 춥네.”
여인은 자신이 막 그려놓은 작품을 보며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없이 도전했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빛으로 승화시키기에는 가슴 속에 자리 잡은 어둠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다.
처음과 달리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그림 속에 침범해 있는 차가움과 공포, 그리움.
막상 그려내고자 했던 작품과 전혀 다른 그림이 화풍에 담겨 버리곤 했다.
스윽.
여인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극동 벌판.
성안에서 생활한 지 어느새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긴 겨울과 짧은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과 시간의 느낌은 확연히 달랐다.
그날의 악몽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여전히 믿을 수 없지만 분명 눈앞에서 모습이 변하던 괴물.
그 괴물은 진짜 자신을 죽이려 했다.
그때 슈퍼맨처럼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한히 고맙고 감사했다.
그렇게 길지 않았던 그와의 추억이 있을 뿐이지만 남자는 자신을 위해 위험 속에 뛰어들었다.
그 기억으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가족이나 친구들 그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못했다.
온전히 혼자가 되어 성에서 그림을 그리며 치열하게 고독 속에 자신을 불태웠다.
“다들 무사하시겠지…….”
장태산은 종종 가족들의 소식을 알려왔다.
할아버지와 부모님, 그리고 오빠의 사진을 챙겨 보냈다.
다들 우려했던 것보다 아직은 별일 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빠가 홀로 감당하고 겪어야 할 고통의 시간을 손유리는 너무 잘 알았다.
고층에서 추락한 악마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언젠가 다시 부활해 자신과 가족에게 해코지를 해올 게 확실했다.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이곳과 달리 한국은 봄이다.
그동안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와 같이 시간을 보내줬던 장태산.
같이 그림을 그리고 소풍을 다녔다.
긴 밤 날을 새워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도 나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달리 그림 실력이 월등히 달라졌다.
누가 봐도 이제는 대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의 수준에 이르렀다.
장태산은 화풍에서 무척 자유로웠다.
그런 점에서 손유리의 장점을 특화시켜 개발해줬다.
장태산 덕분에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그림 신들의 세상을 맛볼 수 있었던 손유리.
마음으로 그려지는 풍경과 색채를 그대로 화풍에 담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심상(心想)이 화상(畵想)이 되는 수준.
다만 아직 남아 있는 심마가 캠퍼스 위에 암암리에 투영됐다.
이걸 두고 장태산이 말했었다.
천천히 마음의 상처가 모두 치유되어야 한다고.
촤아아아앗 촤앗.
손유리는 과감하게 막 그려놓은 그림을 찢었다.
장태산이 한 말이 손유리를 지배했다.
타인을 우울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심마가 넘치는 그림은 결코 남기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자칫 업이 되어 차후에 그려지는 모든 그림에 그 업이 따라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당신…… 곧 오겠죠?”
마음을 다잡고 다시 붓을 잡은 손유리.
애써 싱긋 웃으며 마음을 밝게 유지하려고 그를 떠올렸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리움이 샘솟게 하는 장태산.
그를 생각하면 손유리는 러시아 어느 공화국 성에 이렇게 홀로 있어도 행복해졌다.
묵묵히 외로운 화가의 길을 다시 걸을 수도 있었다.
***
“회장님. 채권단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여전히 빨간 안경테를 즐겨 쓰는 도도희.
오늘도 오피스 룩의 환상적인 결정체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30대를 넘은 그녀는 원숙한 아름다움을 흠뻑 보였다.
내가 꾸준히 제공하는 성수 덕분에 피부와 외모는 20대 초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에서 풍겨 나오는 삶이 축적한 지혜로움은 감출 수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 30대라는 나이가 주는 풍요로움이 더해졌다.
도도희를 사모하다 병이 난 남직원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도도희.
“애가 달았군요.”
“파산 신청할 수도 있어요.”
“못 합니다.”
“한국항공 정중용 회장도 손을 들었어요. 주순자에게 밉보여 크게 데인 것 같아요. 청와대 지시면 가능해요.”
도도희가 한국항공과 주순자에 얽힌 속사정을 풀어놓았다.
“욕심쟁이들끼리 벌인 싸움 때문에 국민들이 피를 보네요.”
“정중용 회장도 바보 같아요. 그 아줌마가 원하는 게 뭔지 알 텐데…….”
“자존심 때문입니다. 한때 주순자 남편이 한국항공에서 근무하던 직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하의 와이프에게 꼬리를 흔들기에는 정중용 회장이 자존심이 셉니다.”
“조인화가 주순자 뒷말했다는 소문도 파다해요. 그게 귀에 들어가 한국항공에 피바람이 불고 있다고 해요.”
증권가에 퍼져 있는 찌라시들 중에서도 알짜 정보에 해당하는 내용을 도도희가 전해왔다.
나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시간 참 눈코 뜰 새 없이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2016년 2월.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변했다.
회귀해서 다시 살고 있지만 흘러가는 세월을 되돌릴 능력이 나에게는 없었다.
차분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지난 2년 동안은 인생을 흔들 만큼의 큰일은 없었다.
일본과 중국은 의외로 조용했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일대일로 사업을 강화했다.
오바마 정부는 아직도 중국의 진짜 무서움을 몰랐다.
애 아빠가 된 임성철 회장은 거의 완전한 장립이 되어 중국 사업에 투입됐다.
미국에서 주로 생활하고 있어 안전에 있어 문제 될 건 전혀 없었다.
필요한 만큼의 자금이 들어갔고 철도를 비롯해 중요 사업 지분을 얻어냈다.
내가 심은 트로이 목마였다.
안심하고 자금을 받은 중국 정부는 일대일로 주변 국가에 생색을 냈다.
동시에 과거처럼 기술을 빼돌리는 일에는 여전히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매국노들은 현재도 판을 쳤다.
온시은의 슈퍼 컴퓨터를 통해 획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기술을 팔아넘긴 놈들을 국정원과 잡아들였다.
그 숫자가 상당했다.
과거와 달리 양심도 없는 매국노들은 현재 와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침투했다.
일본 정부도 바빴다.
일본을 빨아주는 어용학자들과 정부 관료, 언론을 등에 업고 조근영 정부와 과거사를 정리하려고 바쁘게 움직였다.
한일 두 국가 간에 치솟던 긴장 관계는 많이 완화됐다.
각종 언론 매체에서 일본 여행을 부추기는 여행 프로그램이 다수 방송되었다.
조용히 그들의 행태를 지켜보고 있다.
일본 관광청을 비롯해 여러 지자체에서 지급된 보조금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들이다.
언론사 사주들과 PD들은 짭짤하게 뒷돈과 편의를 제공받았다.
자유 여행 분위기를 타고 너도나도 해외로 빠져나갔다.
국내 여행지는 비싸다는 핑계로 벌어진 가벼운 쇼핑 같은 투어다.
해외여행을 못 하면 바보 취급을 받거나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축제가 끝나기 전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는 듯 활활 타올랐다.
그사이 정치는 막장을 달렸다.
곧 다가올 4월 총선 때문에 여야를 막론하게 치열하게 파벌 싸움이 벌어졌다.
여당에서는 조근영 대통령과 전임 최병박 계열의 정치인들이 서로를 물고 뜯었다.
공천이 바로 출세의 지름길이다 보니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물고 뜯고 싸우는 모양새가 개싸움이 따로 없었다.
야당도 마찬가지.
정치에 썩은 고인 물이 되어버린 프로 정치꾼들이 어설픈 대권 주자 하나를 내세우고 독립했다.
그동안 야권 안에서 당파를 형성하고 뒤에서 여당과 손을 잡았던 이들이 동료들 뒤통수를 치고 합류했다.
정치에 신물이 난 국민들이 중도파를 내세운 그들에게 환호했다.
그들의 본 모습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실수였다.
그 판 역시 뒤에서 지켜보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어차피 한번은 겪고 지나가야 할 폭풍이었다.
물이 맑아지면 감춰진 진실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법이다.
조근영도 덩달아 바빴다.
아버지 치부였던 일본강점기 변상금 문제를 조근영 대통령은 후다닥 처리해 갔다.
곳곳에서 친일파들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친일파 언론이 합세하고 국가 기관과 친일파 어용학자, 쓰레기 친일 사이트 회원들이 언론 플레이에 뛰어들었다.
사회 곳곳에서 블랙 리스트가 작성돼 차별이 격화됐다.
독재 시대 정치문화가 부활한 셈이다.
국정원을 비롯해 경찰 정보팀이 국민들을 감시했다.
주순자도 점점 대통령 퇴직 시기가 다가오자 마음이 바빠졌다.
대통령 퇴직 후를 대비해 본격적으로 해외로 자금을 빼돌렸다.
정권 초의 압도적 지지율이 급락했다.
서서히 드러나는 정권의 무능과 친일 행적을 국민들이 눈치채기 시작한 것이다.
보수 언론도 정권과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동계 올림픽을 주순자가 혼자 요리해 먹으려고 욕심을 부리다 탈이 났다.
삐걱삐걱 곧 바퀴가 빠질 것 같은 모양새로 정권은 굴러갔다.
그 와중에 난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했다.
엄마가 박사 학위를 원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기에 승낙했다.
대학원 수업도 출석은 거의 마음대로였다.
현직 변호사이기에 특혜가 주어졌다.
어차피 이론 부분도 교수들에게 밀리지 않았다.
다른 인문계열보다 사회 변화에 둔감한 법학이라는 학문은 연구 주제가 뻔했다.
쌍둥이들도 바빴다.
주아도 어느새 박사 과정에 들어갔다.
미대 교수를 노리는 주아는 스스로 알아서 성장해갔다.
주희도 레지던트가 되었다.
놀랍게도 선택한 진료과목은 산부인과.
흉부외과에서 강력하게 원했지만 주희의 의사는 확고했다.
신생아가 점점 줄어들며 산부인과 전문의에 도전하는 이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그걸 안타깝게 생각한 여동생 주희.
돈은 안 되지만 의료계 현실을 개탄하며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뛰어들었다.
개인적으로 그런 여동생을 지지했다.
어차피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상을 위해 한 줄기 빛이 되기를 원하는 주희를 보며 잘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인들의 상황도 많이 바뀌었다.
JS로펌은 승승장구했다.
아낌없는 지원 덕분에 약자를 대변하는 로펌으로 불렸다.
권주희를 비롯해 신덕수가 핵심 변호사가 됐다.
변호사 숫자도 어느새 50여 명을 넘어갔다.
로펌에서 배출된 이들 중에서 인성을 보고 변호사들을 뽑았다.
그들의 활약이 볼 만했다.
판사와 검사가 된 공수진, 강현수, 예린과 아린 선배도 조직에서 인정을 받았다.
그들은 중앙에서 놀았다.
실력도 뛰어났고 내가 뒤를 봐주고 있는 것도 있었다.
특혜라 할 수 있지만 한 번 제대로 된 칼로 쓰기 위해 그들에게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손대균 선배와는 일절 연락이 닿지 않았다.
손유리를 나에게 맡긴 이후 암묵적으로 모르는 사람처럼 지냈다.
독한 부정이 아닐 수 없었다.
딸을 위해 이를 악물고 인내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런 그를 존중했다.
악마 같았던 오광재는 어느 날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의 뒤를 캐 본 적이 있다.
그때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아냈다.
미친 오광재와 달리 그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누구나 아는 선량한 분이었다.
수십 년 전부터 고아나 부랑자들을 돌보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성인으로 불리는 분.
혹시 몰라 철저하게 뒷조사를 했지만 이상한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언제나 낮은 곳에서 힘없는 자들을 보살피기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었다.
오광재는 그런 아버지와 달리 오염이 된 것 같았다.
미국 유학 중에 누군가와 알 수 없는 접촉한 것 같았다.
욕망을 탐하는 자는 악마의 노예가 되기 더 쉬웠다.
언젠가 다시 나타날 것 같다는 예감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고 두렵지는 않았다.
오광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지구에서는 내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시에 각종 변화가 일어났다.
그사이에도 난 나의 길을 착실히 걸었다.
“그 덕분에 몇 조가 증발했죠.”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쯧.”
도도희가 혀를 찼다.
주순자를 만만하게 봤다가 한국항공 그룹은 뜨거운 손맛에 화들짝 놀랐다.
한국해운을 떠맡은 한국항공은 수조를 밀어 넣고도 채권단에 경영권을 넘겼다.
능력도 안 되는 주제에 대한민국 해운업 1위 업체를 위기에 몰아넣은 한국항공 그룹의 가족들.
한국해운의 주인이었던 여자는 퇴직금까지 짭짤하게 챙기고 시아주버니에게 짐을 던졌다.
아버지가 일으켜 세웠던 그룹의 모태인 해운업을 살리겠다고 발버둥 치던 정중용 회장은 주순자에게 얻어맞고 KO를 당했다.
그리고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된 한국해운.
“인수팀 준비는 다 끝났나요?”
“네. 회장님. 지시하면 바로 협상에 들어가겠습니다.”
도도희가 힘차게 대답했다.
새로운 먹잇감을 노리는 LOR투자법인의 대표.
“그럼…… 한국해운 인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십시오. 이제부터 다시 전쟁입니다!”
“넵! 회장님 명대로 전쟁에 임하겠습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