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3장. 매국(賣國)(3).
“이런 개놈의 새끼들. 쌍발? 나라 살림 거덜내려고 작정했네!”
“무지한 것들 보세요. 돈이 썩어나요.”
“회주님 아직 연락 없죠?”
“조근영. 이거 대통령 만들어 줬더니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 합니다.”
“주순자가 다 조종하잖아요.”
“그 아줌마가 겁이 없어요.”
“이거 어떡합니까?”
“되돌릴 수 있는 가능성은 없나요?”
“그게…… 애국에 근거한 불가역적 결정이라고 청와대에서 발표해서.”
“미치겠네…….”
삼성동에 위치한 한정식집 별채.
일송회 장로들이 긴급회의를 위해 모였다.
여당 국회의원과 신문사 대표, 그리고 리앤장의 손대균 이사까지 핵심 멤버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반종현과 전운택이 대통령을 두고 침을 튀겨가며 성토했다.
손대균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딸이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춰 버린 지 오래다.
딸에 관련한 모든 걸 장태산에게 위임해 버렸다.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아 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어디로 감추었는지 대한민국에서 흔적조차 사라져 버린 손유리.
아무리 가문의 역사를 잇는 일이라 해도 딸을 그런 광인에게 팔아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직접 확인한 회주 아들놈은 악마였다.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던 그 광기와 괴물 같은 모습.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쳐졌다.
하지만 여전히 손대균은 일송회에서 발을 뺄 수 없었다.
의아했지만 회주는 딸의 일로 손대균을 추궁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피가 말랐다.
차라리 불러들여 분노를 표출하거나 협박이라도 한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남아 있는 가족들 때문에 맡고 있는 일에서 손을 놓을 수도 없었다.
어디 한 곳 숨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회주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손 장로님.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할 거 아닙니까. 술만 마시지 말고 대책 좀 말씀해 보십시오.”
전운택이 답답한 듯 손대균을 끌어들였다.
“언론을 동원해도 꿈쩍도 하지 않나요?”
손대균이 그간 궁금했던 부분을 살짝 물었다.
“탄탄한 지지층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흔들어도 요지부동입니다. 조근영 고집 센 거는 다들 아시잖아요.”
반종현이 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청와대로 쫓아가서 끄집어낼 수도 없고…….”
다선 의원 전운택이 답이 없다는 듯 쓴 입맛을 다셨다.
“국회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까?”
“최고 선출직 공무원인 대통령의 결정 사항입니다. 예산으로 쥐어짜봐야겠지만 생각 외로 대통령을 지지하는 의원들이 많아요. 주순자 그 여우 같은 게 사람 홀리는 데 재주가 많습니다.”
전운택이 인상을 쓰며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국민이 선출한 최고위 공무원인 대통령.
일송회도 그 점에 있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통령이 고집을 부리면 천하의 일송회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후보를 세우는 건데.”
“당시에 대항마가 없지 않았습니까. 최병박 이 멍청한 인간이 돈에 그렇게 욕심을 부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맞아요. 그때 얼마나 막아줬습니까. 언론뿐만 아니라 의원, 검찰과 법원까지 철판 깔고 도와주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웃겨요. 뻔한 거짓말이었는데 주어가 없다는 말만 믿고 투표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흐흐. 우리 복이었죠. 개, 돼지들이 욕심에 눈이 멀어 제 손으로 똥을 뽑아줬으니.”
“그때가 좋았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개, 돼지들이 점점 깨어나니 모든 상황이 피곤합니다. 아버지들은 참 편하게 사셨는데.”
“최고였죠.”
반종현과 전운택이 지난 과거를 회상하듯 생각에 젖어들었다.
아버지 시절만 해도 이런 일은 절대 가능하지 않았다.
일송회에 반역하는 기미만 보여도 그들을 안기부를 동원해 조용히 처리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전운택이 은밀한 표정을 지었다.
“왜 좋은 계획이 있습니까?”
반종현이 속삭이듯 물었다.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계획을 짜는 게 취미인 사람들이었다.
“플랜 B를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플랜 B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눈을 마주쳤다.
“예전에 우리 말했지 않습니까.”
“예전이라면…….”
“교체.”
“아!!!”
교체라는 전운택의 말에 반종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요 근래 수십 년 동안 쿠데타 말고 대통령을 끌어 내린 적은 없었다.
탄핵을 진행한다 해도 여러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가능할까요?”
의구심 가득한 시선으로 반종현이 다시 물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풀면 알아서 일어날 겁니다.”
“촛불요?”
“흐흐. 맞아요.”
“그건 위험성이 너무 커요.”
반종현이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어차피 다음 대 총선에서도 우리가 다수당이 됩니다. 그때 이걸 빌미로 협박하면 주순자도 겁먹고 우리말을 따를 겁니다. 자연스럽게 레임덕이 찾아오게 만들면 제까짓게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확신에 찬 전운택의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당 소속 연구소에서 다음 대까지 무난하게 여당이 집권당이 될 거라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내놨다.
“그래요. 차라리 허수아비 대통령이 나을 수도 있겠군요.”
반종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순자, 찍어내야 합니다. 그년 때문에 정치자금이 다 빨려 들어가고 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단발로 밀면서 미국 측 전투기 사업체에서 광고를 밀어주기로 했는데…….”
결국은 돈이 문제였다.
주순자가 대기업 정치자금을 쓸어가면서 여당 의원들의 주머니에 가뭄이 찾아왔다.
언론도 사정은 마찬가지.
‘매국노 새끼들.’
술잔을 다시 기울이던 손대균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이번에 회주의 아들 일을 겪으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대한민국에는 매국노들이 차고 넘친다는 사실을.
***
‘농담이 아닌 것 같은데?’
고연지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한때는 언감생심 꿈도 안 꿨던 사업 참여였고 영역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점점 욕심이 생겼다.
본인의 의지가 사업에 투영되어 생각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게 신기했다.
고연지는 생각 이상으로 자신이 사업적 체질을 갖고 있음을 최근에 깨달았다.
과거 그룹을 이끌던 그녀의 조상들이 가진 사업능력이 자신의 피에 녹아 있었다.
“왜 아직도 쫄려?”
“그게 아니라…….”
장태산이 그런 고연지의 두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고연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너무 대놓고 묻는 질문에 부끄러웠다.
“아직 멀었어.”
“뭐, 뭐가”
“배포.”
“면전에 대놓고 그렇게 말하니까 그렇지.”
“마음에 없는 건 아니고?”
“그건…….”
“오빠가 아직도 걱정돼?”
“…….”
장태산의 말에 고연지는 입을 다물었다.
꺼림칙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버지를 비롯해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오빠가 가업을 이을 거라 계속 말해 왔다.
“너에게 밀릴 정도라면 결과는 빤한 거야. 앞으로 엘자가 마주칠 미래 사업들은 더 치열할 거야. 과거 반도체 사업처럼 우물쭈물하다 다 빼앗겨.”
“팩트 폭력이 너무 센 거 아냐?”
“만약 오정처럼 반도체와 함께 사업 영역을 구축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최고였겠지.”
“맞아. 오정처럼 엘자도 상당히 잘나갔을 거야. 어차피 연대는 경영 스타일상 반도체와는 맞지 않았어.”
“그 점을 아빠도 항상 아쉬워했어. 연대반도체가 매물로 나왔을 때 중국에 투자할 게 아니라 반도체를 잡았어야 했다고 말이야.”
“정말 헐값이었는데. 엘자가 그 당시에도 한발 늦었지. 그 점에서 재빠른 NK는 본받을 만한 기업이야.”
“인정.”
“지금도 그래. 엘자는 정에 너무 약해.”
“경영이념이라 어쩔 수 없어.”
“세상이 바뀌었어. 가족들 간의 정으로 사업을 분리하고 떼 주면 주식회사에 과연 뭐가 남을까? 회사를 믿고 지붕 삼아 살아가는 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그건…….”
“어설픈 선행은 악을 기르는 법이야.”
장태산의 뼈를 쑤시는 매운 충고는 계속됐다.
“넌 그러지 마.”
장태산의 얼굴에서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사라졌다.
문득 그가 무척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고연지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가 엘자의 경영 방식에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경고는 오래됐어. 그런데 그렇게 큰 변화가 없어. 말렸던 중국 사업은 계속 진행 중이고 매국노들은 판을 쳐. 순간의 이익을 좇다가 모든 걸 잃게 된다는 걸 왜 모를까? 국내 임금 상승이나 강성 노조 핑계는 대지 마. 오정과 연대는 잘 버티고 있잖아.”
고연지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도 엘자그룹의 로열패밀리였기에 부정할 수 없었다.
그만큼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연지야. 그냥 하는 말 아냐.”
“???”
“난 내 사람이 필요해.”
“!!!”
내 사람이라는 말에 고연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장태산에게서 지금껏 들었던 말들 중에 가장 뜨거운 표현이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믿을 만한 사람들이 드물어. 등을 맞대고 적과 싸워야 하는데 등 뒤까지 의심하며 전투를 할 수는 없잖아.”
장태산의 독백과 같은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 땅을 피로써 지켜내고 땀으로 일궈낸 선조들이 슬퍼하셔.”
‘도대체 무슨 말이야?’
고연지는 장태산의 목소리가 점점 슬픔에 물드는 것을 느꼈다.
그 목소리에 고연지 역시 전염이 되는 듯했다.
뭔지 모르지만 선조들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콕콕 쑤시고 아려왔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놈들이 온 사방에 넘쳐. 매국의 독버섯 같은 포자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까지 안 퍼진 곳이 없어. 그래서 더 이 땅의 선조들이 슬퍼하셔.”
‘매국…….’
엘자에도 넘친다는 매국.
대한민국의 미래라 할 수 있는 중요 기술을 팔아넘긴 행위들을 장태산은 매국이라고 했다.
“연지야.”
장태산이 또 다시 뜨거운 시선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응…….”
“우리 함께 쓸어버리자.”
장태산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이글거렸다.
고연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진심으로 장태산과 함께 매국노들을 쓸어버리고 싶었다.
“나와 같이 함께 갈래?”
장태산이 진심을 다해 청하는 동반자의 길.
두근두근 심장이 제멋대로 미친 듯 뛰었다.
엘자의 경영권을 제시했을 때보다 더 크게 맥박이 뛰었다.
‘그래 이거야.’
고연지는 지금껏 장태산 곁에서 자신이 왜 맴돌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언제나 정착하지 못하고 장태산 주변에서 긴 줄을 맨 연처럼 맴돌았다.
자신보다 더 대단한 여성들이 장태산 주변에 바짝 포진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못했다.
그녀들과 달리 엘자그룹 회장 딸이라는 명함밖에 내놓을 게 없던 고연지.
이제는 주변인들 중 한 사람이 아닌 같은 길을 걷는 동반자로서 장태산 옆에 서고 싶었다.
“나라도 좋다면……. 태산이 너와 함께할게.”
고연지가 두 말 하지 않고 대답했다.
씨익.
장태산이 그런 고연지를 바라보며 웃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장태산의 미소가 고연지의 머릿속에 각인됐다.
“청소 다 끝날 때까지 시집도 못 갈 텐데 각오는 된 거야?”
“어차피 인생 100세 시대야. 길게 살 인생, 시집 안 가면 어때.”
“좋아. 그럼 내 파트너로 받아주지.”
스윽.
장태산이 먼저 잔을 들었다.
살짝 찰랑거리는 잔 속의 맑은 소주.
“그 멘트는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냐?”
“누가 하면 어때. 파트너끼리.”
“공짜는 아니야. 나 진짜…… 욕심낼 거야.”
“오빠만 믿고 따라와.”
“그 오빠…… 믿을게.”
팅.
두 사람의 잔이 부딪쳤다.
꿀꺽.
그리고 가볍게 비워지는 잔.
다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불쑥 고연지의 가슴에 방 하나를 만들며 똬리를 트는 욕심 하나.
‘장태산……. 나 너도 안 놓칠 거야!’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