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1장. 매국(賣國)(2).
“화질이 좋아.”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는 호텔 밀실 내부 풍경.
수염 색깔까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화면에서 중년 사내들이 젊은 미녀들과 환락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신음소리까지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는 장면을 유심히 보는 리장창.
그는 지금 홍콩에서 밀실 장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관음의 시선이 아닌 경멸의 눈빛이었다.
“덫은 이만하면 된 것 같군.”
리장창은 화면 속 장면에 흡족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들 중에 엘자가 가장 만만한 상대였다.
엘자는 다른 그룹들과 달리 진짜 주인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공동 협력 경영이라는 미명 하에 기업 주식이 사방으로 분산되었다.
꿈꾸는 이상은 좋았지만 타인을 밟고 1인자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무시한 처사였다.
중국인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그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세상에 믿을 건 돈밖에 없다는 사상.
사기를 치는 놈보다 사기를 당하는 놈이 더 어리석다는 비난을 받았다.
격동의 근대세기를 살아내며 끈질기게 버틴 중화민족은 생명력이 질겼다.
그들이 보기에 엘자그룹은 어리석은 자들이 꾸리는 만만한 기업이고 바보였다.
직원들이 헌신적으로 개발한 고급 기술들을 특허받아 보유하고 있지만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점점 변화가 빨라지는 기업 경영 환경에서 언제나 한 발자국씩 뒤처졌다.
그 차이가 오정과 엘자를 갈랐다.
어느 시점까지는 비슷한 경쟁 수준을 유지했지만 이제는 확실히 차이가 날 만큼 벌어졌다.
중국 측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에어컨이나 가전제품이 그 예였다.
한때 세계 1위를 차지했던 엘자에어컨을 중국에서 보기 좋게 밀어냈다.
동시에 세계 시장에서도 점점 그 입지가 좁아졌다.
인건비 절약이라는 명목으로 중국에 들어왔던 엘자그룹 가전사업부.
그들의 노하우를 탈탈 털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돼 줬다.
같이 들어왔던 협력사를 비롯해 공정 전체 기술을 여유 있게 빼낼 수 있었다.
볼 일 없어진 엘자그룹 가전사업부는 기술과 공장 전부를 헐값에 던지고 내뺐다.
세계 가전사업 중저가 라인에 중국 기업들이 속속 포진했다.
몇 년 사이 빠른 속도로 기술을 축적하며 고급 제품에도 발을 들였다.
향후 몇 년 후면 기술 역전 현상이 벌어질 건 불을 보듯 자명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둔감한 엘자는 미련을 못 버렸다.
LCD 사업을 비롯해 배터리 공장을 내달라고 중국 정부에 사정하고 있었다.
중국 정부는 배짱 좋게 튕기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다.
조건으로 핵심 기술을 제공하라고 제안하듯 협박했다.
예상한 대로 엘자는 고개를 조아리고 조공을 바쳤다.
중국의 내수시장이 커지자 어떻게든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꽁꽁 언 발에 오줌을 싸버린 엘자.
중국의 덫은 그 폭이 넓고 거대했다.
천라지망이라는 병법과 닮아 있었다.
한국이 소유한 핵심 기술 획득에 대한 계획은 진작부터 가동됐다.
돈 몇 푼과 하룻밤 미녀 품에 안기면 한순간 영혼을 팔아 버리는 엘자의 임원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행동이 낱낱이 기록되어 왔고 기록되고 있다는 걸 몰랐다.
적당한 순간에 협박용으로 안성맞춤인 자료들이었다.
유교 윤리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지금 같은 정도의 증거를 들이대면 바로 사회적 매장이었다.
그걸 너무 잘 알면서도 그들은 매번 돈과 계집을 거부하지 못했다.
“조상준, 저자가 날개를 달아줬습니다.”
“알고도 우리 손을 잡은 놈이야.”
“재산도 상당하던데 욕심에 끝이 없습니다.”
“사업하는 인간 본성이 어디 가는 게 아니지. 정치인과 다를 게 없어. 그래서 우리 덫에 확실하게 걸리는 거고 말이야. 흐흐.”
“단주님의 선견지명에 언제나 경의를 표합니다.”
제갈유량은 잔머리에서는 앞섰지만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리장창을 따라가지 못했다.
“주웨이를 확실히 키워야 해. 미래 중화민족을 먹여 살릴 핵심 기업이 될 거야.”
주웨이는 태생부터 공산당 정부의 소유였다.
공시된 주식 보유 정보는 형식적인 것으로 사실상 무의미했다.
그 실체는 가명과 차명으로 철저하게 가려져 있다.
충성스런 핵심 당원들이 중요 임원으로 근무했다.
중국 정부와 스파이들이 빼앗은 비합법적 지적재산권이 무한 자금과 함께 투입됐다.
소모품으로 사용할 세계 인재들도 속속 흡수했다.
몸집을 더 키우지 못하면 그게 이상한 일일 정도다.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에 이렇게 단시간에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넓은 중국 전역에 주웨이 제품으로 통신장비들이 깔렸다.
그 후 세계 시장으로 손을 뻗는 건 당연했다.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자 남은 건 단가 후려치기.
다른 통신장비업체들은 감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필요한 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은 엄청난 달러 보유고를 이용해 그때그때 사들였다.
멍청한 자유경쟁주의를 추구하는 유럽이나 민주주의 진영에서는 중국 자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주웨이가 가장 큰 혜택을 받았다.
그런 주웨이가 가장 공을 들인 업체가 엘자그룹이다.
그룹 전체가 중국이 탐낼 만한 것들로 넘쳤다.
가전사업부터 시작해 반도체와 LCD, 배터리 등등.
차세대 먹거리에 대부분 부합되는 사업들이다.
“단장님 뜻대로 되실 것이옵니다.”
“그건 그렇고 한국 차세대 전투기가 쌍발로 결정됐다고?”
“ⵈⵈ조근영이 결단했다고 합니다.”
“찜찜해. 결코 그런 결단을 할 그릇이 못 되는 여자야.”
“주순자라는 실세가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그년도 마찬가지야. 욕심 많은 돼지가 애국적 행위를 한다고?”
홍콩에 앉아서도 전 세계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천지회 지단주 리장창.
자신의 계획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인 한국 대통령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지금 선정되더라도 미래 전장에서는 별 쓸모가 없을 겁니다. 완전 매립형의 5세대 기체도 아니고 반매립은 의미가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
리장창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미래를 예견해 봤다.
가슴에 돌덩이가 올려진 것처럼 답답했다.
“미국 측에서 제공하는 단발 F-35로는 겨우 북한이나 상대할 수준입니다. 그리고 미국 정부와 전투기 제조사에서 결코 기술이전을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만 방심하면 안 돼. 한국 놈들은 모방하고 개량하는 데 천재적이야.”
그 점은 중국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과거 일본 전자제품들을 모방해 오늘에 이른 한국 기업들.
분해와 모방을 통해 자신들만의 시장을 개척해 냈다.
그걸 그대로 중국은 답습했다.
일본 기업들도 미국이나 유럽 업체들의 기술을 베껴 성장했었다.
냉정한 시장 시스템은 후퇴하는 자에게는 지옥이지만 진취적 기업들에게는 부를 안겨줬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중국은 기본 상도덕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최대한 방해 공작을 벌이겠습니다.”
“얼마 전에도 얘기했지만 미국 업체들과 손을 잡아. 그리고 최대한 지연시켜.”
“넵! 대인!”
“그런데 이번 일에 장태산의 입김은 안 들어간 거야?”
“그런 기미가 없었습니다.”
“이상해. 뭔가 찝찝해.”
장태산이 언제부턴가 한국의 중요 결정에 암암리에 관여되기 시작했다.
눈치 챈 자들은 드물지만 리장창은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좀 더 파봐. 뭔가 나올 거야.”
“명을 따릅니다!”
‘장태산, 네놈이 똑똑한 것은 잘 안다. 하지만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는 우리 공작을 혼자 막을 수 있을 것 같더냐? 특히 내부에서 총질하는 매국노들이 널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한국의 정치 상황을 꿰뚫고 있는 리장창.
장태산과 휴전을 맺었지만 어느 정도 안심하는 부분이 그 때문이다.
뿌리 박혀 있는 한국의 매국노 집단.
상상 이상으로 더 거대하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
“!!!”
고연지는 장태산의 차가운 경고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단일 사업부가 아니라 엘자의 모든 걸 훔치려 든다는 장태산의 경고.
맞는 것 같았다.
아니 확실했다.
그룹 계열사지만 경영에 참여하면서부터 보이던 중국과의 밀월.
이상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거대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사업부가 통째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고연지가 봐도 위험한 결정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일당독재다.
공산당 결정이면 법 조항도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사업하는 이들이 사라져 몇 달 뒤에 재판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중국에서의 사업은 리스크가 컸다.
독자 기업을 운영할 수도 없었다.
지분 절반 정도를 공산당이 지정한 합자 회사에 내줘야만 가능한 중국 사업.
함께 따라 들어간 부품 업체들이 언제부터 중국인으로 대표가 바뀌어 있는 경우도 많았다.
자동차나 LCD, 반도체 사업은 부품 업체가 패키지 형태로 들어가야만 원활하게 운영이 가능했다.
중국은 그걸 노렸다.
‘가전사업부가ⵈⵈ 대부분 철수했지.’
10년 전만 해도 중국 업체를 누르고 사방에 깔렸던 엘자에어컨.
이제는 중국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에어컨이라는 게 기본 성능만 충실하다면 나머지는 가격에 의해 구매가 결정됐다.
같은 중국에서 만들어도 엘자는 가격 경쟁력에서 떨어졌다.
AS를 비롯해 한국 법규에 맞게 공급되는 상품은 무차별적으로 살포되는 중국 업체의 공세를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시장을 빼앗기고 철수했다.
그리고 중국에 남겨진 공장들과 기술들은 모조리 중국 당국에 넘어갔다.
“예전에도 말했지. 다음은 LED야.”
“그건 너무 비약 아닐까? LED는 쉽게 따라올 수 있는 분야가 아니야.”
“과연 그럴까?”
‘LCD 공장도 이제 가동 중인데ⵈⵈ 벌써 LED까지?’
고연지는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엘자그룹이라는 거대 공룡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형 사업부는 원활하게 굴러가야만 했다.
그 밑에 딸려 있는 사업부 모두 대형 사업부가 떨구는 부스러기를 먹고 유지됐다.
“연지야.”
장태산이 고연지를 다시 조용히 불렀다.
“응ⵈⵈ.”
“현대 사회의 사업장은 전쟁터야. 글로벌시장에서 내가 먹지 못하면 누군가에게 먹혀. 언제나 뒤를 돌아보고 경계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어.”
교과서적인 장태산의 조언.
“그래서 사자가 되라고 하는 거야.”
“???”
“압도적으로 강해서 누구도 건들지 못할 때, 그때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는 거야.”
장태산의 미소가 부드러워졌다.
자신을 한껏 배려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엘자에게 아직 기회가 있어.”
‘아직’이라는 말에 고연지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장태산의 말이 틀리기를 바랐지만 부정할 수 없는 일인 것만은 확실했다.
고연지가 봐도 엘자는 삐걱거리고 뒤뚱거리는 공룡 같았다.
그 상태가 벌써 10년이 넘어갔다.
“방법이 뭐야?”
고연지는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자신도 로열패밀리였다.
작은 그룹 수준의 사업체지만 대표로 참여하면서 경험하고 느꼈던 바가 있었다.
본인이 내린 결정 하나가 직원들과 그 가족의 안위와 직결된다는 사실.
성공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존심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지금껏 누누이 말했잖아.”
“응?”
“매국노 처단.”
“매국노?”
“엘자에 매국노가 너무 많아.”
“ⵈⵈ구체적으로 누구?”
“중국과 손잡고 사업하자고 부추기는 상당수 임원들.”
“아!”
“특히 고선택이라는 인간이 문제인 것 같아.”
“매국까지는 그래도ⵈⵈ.”
고선택이 회장 자리를 탐내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인간인 이상 그룹 최고 권력자가 되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매국이 뭐라고 생각해?”
“???”
“별거 없어. 내 이익을 위해 국가를 먹여 살릴 핵심 기술과 능력을 타국에 팔아먹는 모든 놈들, 그자들이 모두 다 매국노야.”
“ⵈⵈ.”
고연지는 장태산의 매국노 정의를 본능적으로 곱씹었다.
피부에 확 와 닿았다.
“엘자 엘플러스가 주웨이에게 날개를 달아줬어. 그 대가로 몇 년 후에 엄청난 청구서와 받게 될 거야.”
“청구서?”
“미국이 언제까지 중국이 크는 걸 보고만 있을 거 같아?”
‘그래 미국이 있었어.’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거대 제국.
“결코 미국은 자신들 머리 위에 누가 올라앉는 걸 용납하지 않을 거야. 태양은 오직 하나만 떠야 하는 법. 곧 전쟁이 시작될 거야.”
“그거하고 엘자 엘플러스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
아직 고연지는 상황을 연관 지어 생각하지 못했다.
“전쟁은 단순한 게임이야. 적 아니면 아군.”
“적 아니면 아군ⵈⵈ.”
“미국이 곧 강요할 거야. 중국 아니면 미국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말이야.”
“음ⵈⵈ.”
장태산 말대로라면 심각한 사태였다.
한국은 두 강대국 사이에서 수출로 먹고 살고 있다.
한쪽만 선택한다면ⵈⵈ.
“그런 때가 오면 엘자 엘플러스를 오만한 깡패 두목 미국이 그냥 놔둘까? 언제든 도청과 감청이 가능한 주웨이가 깔아 놓은 동맹국 통신망을 넉넉한 아량으로 봐줄 거라 착각하는 건 아니지?”
“!!!”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