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장. 애국(愛國).
부우우우우웅.
몇 대의 대형 트럭들이 건물로 다가왔다.
“저건 뭐야?”
“냉동 차량 아냐?”
건물 앞 초소에 있던 경호원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들이 근무하는 회사는 저런 대형 차량과 관련된 일이 없었다.
간간이 식당 배식용 차량들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대형 냉동, 냉장 차량들의 출입은 처음이었다.
- 다가오는 차량들 뭐야?
CCTV로 살펴보고 있던 보안실에서 무선 이어링으로 연락이 왔다.
“그러게 말입니다. 누가 아이스크림 주문했습니까?”
- 오늘 예상 입고 차량 명단에 없어.
“어떻게 합니까?”
경호 조장이 보안실에 물었다.
- 요즘 분위기 살벌한 거 알잖아. 확인하고 바로 돌려보내. 현장 확인하고 있을 테니까.
“넵!”
경호 조장이 대답과 함께 밖으로 튀어나갔다.
끼이이익.
차단기 앞에서 차가 멈췄다.
스르르릇.
조장이 다가가자 제일 선두에 선 차량 조수석 문이 열렸다.
“방문 예약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조장이 딱딱하게 사무적으로 물었다.
씨큐리티 본사가 있는 것은 물론 보스라 불리는 회장님 집무실이 있는 곳이었다.
그동안 근무하면서 군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특수 상황을 여러 번 체험했다.
러시아는 물론 미국까지 건너가서 받은 특수 훈련도 여러 번이었다.
회장님과 주변 가족들에게 저격수가 붙기도 하고 여러 납치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다 보니 경호팀은 항상 날이 서 있었다.
동종 업체들에 비해 엄청난 규모의 연봉이었지만 그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자신들의 보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꿈의 직장이 날아간다는 걸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덜컥.
차 문을 열고 중년 남자가 내렸다.
고급 슈트 차림의 점잖아 보이는 남자였다.
냉동 차량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다.
“랏데식품 홍준식 상무입니다.”
“네? 랏데식품 상무님요?”
조장이 하도 어이가 없어 다시 상대를 살폈다.
어느새 꺼내 건넨 명함에는 랏데식품 상무라는 직함이 박혀 있었다.
그룹 상무가 직접 트럭을 타고 이곳을 방문한다는 건 아주 비상식적인 상황이었다.
눈앞의 명함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 잠시 기다려.
보안실에서 기다리라는 명이 내려졌다.
그리고.
- 뭐야? 진짜 랏데식품 상무이사님이네.
신분 확인이 끝난 듯 보안실에서 어이없는 음성이 터져 나왔다.
- 찾아온 목적 확인해봐.
“이곳에 무슨 일이십니까?”
“아이스크림 배달 왔습니다.”
“네? 배달요?”
경호 조장은 도저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건물 내에는 일체 아이스크림 판매 매장이 없었다.
탕비실이 있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커피 같은 간단한 간식을 먹을 때 이용하는 곳이다.
“여기 회장님과 저희 회장님 사이에 말이 다 끝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회장님요.”
조장은 회장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회장님하고 말이 다 끝난 거야?
최상부와 말이 끝났다면 보안실에서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신분도 확실했다.
폭발물 탐지 센서가 가동되고 있어 위험 인자는 우선 파악됐다.
아무 문제가 없었다.
최신형 CCTV로 차량에 타고 있는 인원도 모두 파악 가능했다.
“회장님께 확인할까요?”
- 아직 출근 전이시잖아. 그리고 회장님들끼리 한 계약이 있는 것 같은데 통과시켜.
“알겠습니다.”
- 혹시 모르니까 보안팀에서 지원 내려갈 거야.
“넵!”
대부분 군대에서 선후배 사이로 지내던 이들인 팀원들.
사정이 그러니 씨큐리티 직원들은 그 어떤 경호 업체보다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통과하십시오.”
“감사합니다. 당황스럽겠지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통 보안을 보니 갑자기 군대 시절에 황금마차 몰던 때가 떠오릅니다.”
“마차병이었습니까?”
“네.”
“꿀보직이셨네요.”
“큼큼. 우리도 나름 애환이 있었습니다.”
군대 얘기가 나오자 금세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그런데 트럭이 몇 대입니까?”
“아이스크림을 비롯해 각종 과자와 빵류까지……. 기계들까지 다섯 대 분량입니다. 어지간한 중견 슈퍼에 들어갈 규모입니다.”
“네? 그렇게나 많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회장님 특별 지시 사항이 떨어졌습니다.”
“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일주일에 두 번씩 물건 채우러 오겠습니다.”
“상무님이 직접요?”
“위에서 까라고 하면 까야죠.”
조용히 웃는 랏데식품 상무.
웃음 속에 조직 생활의 애환이 그대로 묻어났다.
***
“회장님. 지금 1층 로비 난리가 났어요.”
“무슨 일 있습니까?”
“세상에 랏데식품 상무라는 분이 직원들하고 같이 나타나서 점포를 차리고 있대요.”
“점포요?”
“아이스크림 냉동고부터 시작해서 과자, 껌, 간식용 빵까지 쭉 진열하고 있어요. 편의점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에요.”
“그래요?”
“그리고 다 공짜래요. 랏데그룹이 망하지 않는 한 평생 동안요.”
“아!”
놀라는 척해줬다.
“회장님과 말이 다 됐다고 그러던데 맞아요?”
“아마 그런 거 같습니다.”
“진짜 무슨 일이에요? 설마 랏데그룹 대주주라도 되신 거예요?”
유세라 상무가 호들갑을 떨었다.
손에는 이미 랏데식품에서 제조한 초코 과자가 들려 있었다.
그것도 종류별로 몇 개씩이나.
랏데 회장과 친구 사이다.
어제 꿀팁을 건넨 결과다.
이 정도 서비스는 받아도 문제 되지 않을 정도의 팁을 줬다.
앞으로 직원들 간식비는 굳었다.
돈으로 계산하면 몇 푼 안 되지만 사람 사는 정이 오고 가는 판이다.
기분으로 랏데식품 주식 몇천 억 정도 매입해 주고 싶다.
미래에도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기업이다.
더군다나 난 랏데의 백기사가 될 계획이다.
판이 이러니 누가 봐도 망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투자 좀 해줬습니다.”
“역시 우리 회장님! 짱이에요!”
초코 과자를 입에 문 유세라 상무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회사에 상주해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이 꽤 많았다.
그들이 푼돈 걱정 없이 마음껏 간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나는 배가 불렀다.
스르르릉.
사무실 문이 열렸다.
“회장님. 나 진짜 이 회사 사랑하는 거 알죠?”
입에 튜브 형태 아이스크림을 물고 도도희.
날 향해 손가락 하트를 날렸다.
“퇴근할 때 몇 개 가져가도 됩니다.”
“정말요?”
“아이스크림은 사랑입니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소소한 행복에 직원들의 사기가 살아난다.
이게 바로 내가 꿈꾸던 진정한 사내 복지다.
스르르릉.
그때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등장했다.
TS그룹을 이끌고 있는 하관우 회장.
그가 미팅을 요청했다.
그런 하관우 회장의 손에도 통팥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다.
“회장님도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1층에서 아이스크림을 무료로 나눠주길래…….”
하관우 회장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들어가시죠.”
“넵!”
“유 상무님, 전 커피 부탁드립니다.”
“넵! 맛있게 내려드리겠습니다.”
직급이 상무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한 커피를 내리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그녀.
점점 사업이 확장되어 할 일이 많아지고 있었지만 커피 내리는 일은 그만두지 않았다.
스르릇.
집무실 문이 열렸다.
지난 몇 년 동안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새로 나온 모니터로 교체된 것과 컴퓨터가 업그레이드된 것 정도 외에 시간 날 때 읽었던 책들이 늘어났을 뿐이다.
소파도 처음부터 좋은 가죽 제품으로 구입해 놓아 세월이 흐를수록 더 멋스러워졌다.
“TS그룹 영업 이익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더군요. 하 회장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자리에 앉으며 일단 칭찬으로 말문을 열었다.
“아닙니다. 이게 모두 다 회장님 덕분입니다. 대부분 정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안정성이 높아졌습니다. 회사 소속감이나 충성도, 애사심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관우 회장이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제 지시를 성실히 따라서 이끌어 준 하 회장님 덕분입니다.”
난 겸손을 사랑한다.
갈수록 판이 커지고 있었다.
모든 곳에 내 손이 일일이 미칠 수 없었다.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해 투입하는 일이 오너들의 진정한 업무였다.
쪼잔하게 계산기 두들기며 갑질을 즐기는 건 경계해야 할 일이고 극히 사양한다.
“맞아요. 회장님 덕분에 TS를 비롯해 각 그룹이나 회사들 경영성과가 높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느새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치운 도도희가 칭찬 대열에 합류했다.
“특히 스마트팩토리 공정 도입으로 생산성이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오래된 생산 공장들 중에서는 스마트팩토리 도입 후 100%까지 생산량이 확대되었습니다.”
“보고에 의하면 불량률도 현저하게 감소했답니다. 생산 라인 직원들을 다른 곳으로 재배치하고도 인원이 남아돌고 있습니다. 사물 인터넷을 기반으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자동화 공정을 통해 생산성이 향상된 미래 기술적 아키텍쳐 플랫폼이 만들어 낸 쾌거입니다.”
도도희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2020년대에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스마트팩토리가 지금은 신기술에 가까웠다.
불과 몇 년 차이지만 그 정도로 기술 발전은 빨라질 것이다.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빅데이터를 통해 네트워크 기술과 결합해 품질 관리 및 장비 성능이나 문제 발생 여부까지 체크가 되다니……. 격세지감이 따로 없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가장 과거의 경영방식으로 살아가던 하관우 회장이 느끼는 놀라움이 가장 큰 것 같다.
“미래 사회는 데이터가 모든 산업 근간이 될 것입니다.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국내 및 해외 공장의 정보를 통해 중앙에서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활용이 가능한 포괄적 경영 전략이 대세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경영진들도 나이를 탓하지 말고 공부를 게을리하면 안 됩니다. 멈추는 순간 퇴보하고 영원히 따라갈 수 없게 됩니다. 인생 100세 시대입니다. 한탄하는 순간 자리를 물려주고 앞서가는 세월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회장님의 말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나이 먹었다고 정년퇴직시킬 생각은 없다.
나이를 먹으면 육체는 노화하겠지만 결코 정신은 늙지 않는다.
스스로 나이가 들었다 생각하는 순간 한계가 정해지고 발전이 멈추는 것이다.
멈추는 순간 정신과 뇌의 노화도 빠르게 진행된다.
매일 공부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말 그대로 치매가 올 겨를이 없다.
“그렇다고 신규 직원을 뽑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인 물은 썩게 됩니다. 스마트팩토리가 고도화될수록 직원을 대체하는 게 아닙니다. 직원의 업무효율성이 극대화될 뿐입니다. 무리하게 직원들을 감축하거나 충원을 게을리하면 도리어 회사가 늙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공장의 생산직 감소는 어쩔 수 없었다.
기계가 하는 일을 굳이 인간이 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렇게 될수록 새로운 일자리 창출이 절실히 필요했다.
엔지니어를 비롯해 여러 직업군들의 수요가 창출되어야 한다.
물론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쳐지는 이들이 나타날 건 자명한 사실이다.
젊은 청춘을 펑펑 낭비한 이들에게는 직업 선택의 기회도 줄어들게 된다.
낭비해 버린 청춘까지 책임져 줄 수는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공부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고학력 스팩을 쌓을 수 있다.
과거처럼 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온라인 강의를 비롯해 공부 환경이 과거에 비해 월등히 좋아졌다.
그러다 보니 그런 환경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일자리가 넘쳐도 자신의 능력 이상을 원해 사용자도 근로자도 서로 만족하지 못했다.
내게 주어진 능력과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었다.
더 이상 남이 들고 있는 그들의 넘치는 그릇만 쳐다봐서는 발전이 있을 수 없는 시대가 온다.
누군가는 낭비했던 시간을 누군가는 끈기와 인내로 끌어안은 결과다.
그들이 넘치는 그릇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관심 두지 않고 눈앞의 조건만 보는 현실.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공평만을 부르짖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도태된다.
그것이 바로 인류 역사가 쌓아온 법칙이고 진화였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무슨 일입니까?”
하관우 회장의 미팅 요청 내용이 궁금했다.
내 물음에 고심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회장님. 국방부에서 제안이 왔습니다.”
“국방부요?”
뜬금없이 국방부 얘기가 튀어나왔다.
“정확히는 국방과학연구소의 제안입니다.”
“어떤 제안입니까?”
“한국형 전투기 개발 사업에 참여해 달라는 비공식적 요청이 왔습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