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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장. 파격 제안(6). (1,006/1,284)

1019장. 파격 제안(6).

“누님, 약소한 선물입니다.”

“형제들 사이에 뭘 이런 걸 가져와.”

“다음에는 더 근사한 걸 준비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성의니까 받아주지만 다음에는 그러지 마. 누가 보면 누나가 욕심꾸러기 같잖아.”

삼성동 장학재단 이사장실.

급하게 찾아온 동생 성동국에게 성미라는 친절한 어투로 일본어를 구사했다.

살아남기 위해 익힌 일본어였다.

일본에 갈 때마다 들었던 조센징이라는 말.

더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악착같이 배우고 익힌 언어였다.

특히 눈앞의 있는 동생에게 당했던 뼈저린 정신 공격.

사람 좋게 웃고 있지만 DNA에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은 채 박혀 있는 상처였다.

‘새끼, 여전히 쪼잔하기는.’

명품 가방도 아니고 화과자 세트 하나 달랑 들고 왔다.

금가루가 뿌려져 상당히 금액이 나가는 제품이었다.

일본에서 제일 잘나가는 전통 있는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는 집안에서 판매하는 화과자였지만 성미라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성동국.

자신 딴에는 신경을 많이 쓴 선물이었다.

“앉아.”

“감사합니다.”

“차 마실래?”

“아닙니다.”

“그럼 물이라도 한잔해.”

성미라는 느긋하게 여유를 부렸다.

사실 랏데 가문의 승계 전쟁에서 그녀는 한발 물러나 있는 입장이었다.

철두철미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자신은 미안한 마음이 큰 자식일 뿐이다.

적당한 재산을 분배받고 평안하게 인생을 살다 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분 관계가 복잡해지면 적은 주식으로도 승계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지금처럼.

“할 말 있으면 해.”

자리를 잡고 물 잔을 만지작거리는 성동국을 보며 성미라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누님…….”

성동국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었다.

어린 시절부터 철저히 무시해 왔던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누나.

그녀로 인해 성동국은 친구들로부터 숱한 놀림을 받았다.

성미라가 잠깐 동안 일본 학교에 다녔던 적이 있었다.

그때 더러운 조센징을 누나를 둔 또 다른 조센징이라는 말을 친구들로부터 들었다.

아무리 일본에서 잘나가는 기업이라고 해도 피까지 바꾸는 신분 세탁은 불가능했다.

학창 시절부터 시작된 그 시선은 랏데에 입사해서도 지속됐다.

동족인 일본인들의 멸시와 질투는 성동국의 주변을 맴돌며 항상 따라 다녔다.

성동국이 갖고 있는 트라우마인 셈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은 항상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이라 생각했다.

아버지가 한국말을 배우라고 교육했지만 거부했다.

어차피 한국에 있는 기업은 일본 그룹의 종속이라 여겼다.

지분 관계는 모두 다 일본 그룹에 속한 사항이었다.

그러는 사이 한국 그룹 매출과 종업원 수가 일본의 10여 배로 증가했다.

영악한 동생은 눈치 빠르게 한국어를 배워 한국 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속으로 비웃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룹 주인이 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 돼 버렸다.

뼈대 있는 일본 가문의 딸이었던 엄마는 교육받은 대로 중립을 지켰다.

아버지는 자신을 바보 취급하며 어리석다고 비난했다.

목적을 갖고 그에게 시집온 아내도 은근히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사면초가에 놓인 성동국.

절치부심 노력해 실력으로 승부를 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를 따르는 이가 많지 않았다.

한국 랏데 임원들은 대부분 성동민을 군말 없이 따랐다.

일본 랏데의 사정도 마찬가지.

랏데를 좌지우지하는 지주회사 지분을 쥐고 있는 아버지의 가신들이 성동국을 멀리했다.

최근 들어 피가 말라가는 성동국.

원수 이상으로 여겨 왔던 성미라의 손을 잡기 위해 직접 찾아왔다.

‘오늘은 고개 숙이지만 다음에는…….’

황제가 되면 모든 걸 뒤집을 것이다.

은근히 자신을 배척하고 성동민을 따르는 임원들을 모두 날리고 난 뒤 권위를 세우리라 다짐했다.

특히 큰딸이라는 명분으로 특혜를 누리고 있는 누나 성미라의 권리도 다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도와주십시오!”

쿵!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는 성동국.

‘뭐야?’

성미라는 깜짝 놀랐다.

오로지 자존심으로 밥 말아먹고 사는 싸가지 동생이 무릎을 꿇었다.

속이 뻥 뚫린 것 같은 쾌감이 밀려왔다.

주먹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스스로 일군 승리의 결과는 아니지만 상관없었다.

“…….”

가만히 무릎 꿇고 일본식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남동생을 바라보는 성미라.

‘장태산 덕분에 이런 호사를 다 누리네.’

갑자기 랏데 승계 전쟁에 뛰어든 장태산 덕분에 생각지 못한 승자의 기분을 맛보게 됐다.

“그래, 이 누나가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

성미라는 호의가 깃든 음성으로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성동국의 입장과 상황 이야기를 들어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았다.

성동민이 이것저것 랏데그룹 계열사를 통해 특혜를 주고 밀어줬지만 성미라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더한 조건을 제안해 준다면 흔쾌히 성동국의 편을 들어줄 수도 있었다.

그녀가 손을 들어준다 해도 어차피 현실적으로 승계자가 되기는 힘들었다.

최대한 이익을 창출해 낼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

배다른 남매간의 의리 따위는 개에게 던져버린 지 오래였다.

“아버지를 옆에서 더 보살펴 주십시오.”

“응? 뭐라고?”

갑자기 지금까지 해오던 효녀 놀이를 강조하는 성동국.

“누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아버지 상태를.”

“그 말은…….”

“유언장을 다시 작성할 수 있도록 힘써 주십시오.”

‘하여간 이 자식 잔머리 굴리는 거 하고는.’

“소용 있을까? 아버지 성품 알잖아.”

“될 겁니다. 아픈 병자는 옆에 있는 이를 가장 신뢰하는 법입니다.”

생각하는 척하며 사악하게 눈동자를 번뜩이는 성동국.

“귀찮은데…….”

살짝 튕겨본 성미라.

“상장 계열사 하나 드리겠습니다.”

“계열사? 정말?”

“비밀 계약서를 작성하겠습니다.”

‘이게 웬 떡이야?’

상장 계열사는 평가 가치가 달랐다.

성미라는 진심으로 귀가 솔깃했다.

성동민이 제안한 특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맛있는 먹거리였다.

“나야 좋기는 한데……. 괜찮겠어?”

“……다 빼앗기느니 나눠 갖는 게 남매간의 의리 아니겠습니까?”

성미라가 흔쾌히 수락할 걸 알고 성동국이 환하게 웃었다.

그를 마주보며 잇몸을 드러내 보이는 성미라.

“좋아. 우리 큰 동생 한번 믿어볼게.”

“감사합니다! 누님!”

***

‘아이스크림?’

성동민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진지한 제안치고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렵나요?”

“농담…… 아닙니까?”

“농담처럼 들리십니까?”

“…….”

평소 진지한 얘기만 나누고 살아왔던 성동민이다.

일본인들은 직업적으로 코미디언이나 이런 말을 나누고 살았다.

가벼운 말이나 실없는 말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어 지양했다.

하지만 진지한 대화가 오간 자리에서 거침없이 농담을 던지는 장태산.

“제 사무실 아시죠?”

“네.”

“상주 직원들이 아이스크림을 정말 좋아합니다. 우정의 증표로 탕비실에 아이스크림을 꽉 채워주십시오.”

“아! 증표요!”

성동민의 얼굴이 금세 활짝 펴졌다.

한국의 정서나 문화는 아직도 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장태산의 증표라는 말에 머리가 한층 맑아졌다.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탕비실에 아이스크림을 채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부담되십니까?”

“아닙니다! 친구 증표로 언제나 냉장고 비지 않도록 꽉 채워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태산이 웃으며 감사함을 표했다.

‘특이한 친구야.’

성동민은 랏데 회장인 자신 앞에서 이런 농담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장태산을 온화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괴짜가 분명했지만 괜찮았다.

지금까지 성동민은 꽉 짜인 원칙과 규율 속에서 살아왔다.

학창 시절 그 흔한 친구도 변변하게 없었다.

아버지 눈에 들기 위해 형처럼 어긋난 일은 일체 하지 않고 정도만을 걸었다.

학교도, 결혼도, 직장도 모두 다 아버지 뜻에 따라 움직였다.

간간이 형으로부터 질타를 받았지만 꿋꿋하게 목표를 향해 전진해 왔다.

그리고 그 끝에 얻게 된 오늘의 기회.

똑똑.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신호였다.

비서가 조심스러운 몸짓을 보이며 들어왔다.

“저…… 회장님.”

장태산과 동석한 것을 확인하고 말을 주저했다.

“괜찮아요. 말해 봐요.”

“성동국 부회장님이 방금 삼성동 재단 이사실을 방문했습니다.”

“형님이요?”

“급하신 듯 자가용 비행기를 이용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무슨 이유로…… 말입니까?”

“그건 아직.”

“알겠습니다.”

“그럼.”

간단하게 보고를 마친 비서가 다시 나갔다.

‘갑자기 왜?’

평소 한국 방문을 주저해 오던 형이다.

갑작스런 오늘 같은 방문이 의외였다.

그것도 누나라고 부르지도 않던 사람을 찾아간 건 더 이상했다.

“벌써 시작됐군요.”

“뭐가 말입니까?”

“전쟁요.”

“네?”

“회장님은 누님을 믿으십니까?”

“……그게.”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부탁으로 누나를 돌보고 있긴 했지만 썩 믿음이 가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바에 의하면 유난히 피해의식이 컸다.

커서도 다정하게 대화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었다.

냉정하게 말해 가족이 아닌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인 관계였다.

“여러 편의를 봐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명도 있긴 하지만 남매간의 기본 도리라 생각합니다.”

같은 핏줄을 타고난 혈육이고 가족이었다.

가족 간의 특혜는 그룹 일가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누님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네?”

“성동국 부회장이 더 큰 욕망 자극해 적절한 미끼를 던졌을 겁니다.”

“더 큰 욕망요?”

“가령 상장 계열사라든가…….”

“!!!”

성동민은 생각지 못한 장태산의 발언에 놀라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장 나쁜 시나리오였다.

누나 성미라가 갖고 있는 지분이 적지 않았다.

얽히고설켜 있는 계열사 지분 관계에서 지금도 충분히 변수가 될 수 있었다.

“성경호 회장님께 잘하세요. 그게 답입니다.”

“???”

“나이가 들면 다 애가 됩니다. 특히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의 변덕은 하루에도 몇 번씩 죽 꿇듯 합니다.”

‘다 알고 있다!’

쉬쉬하며 유지해온 그룹 사정을 장태산은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다.

“병원 자주 모시고 가고 있죠?”

“비서실에서 따로 움직입니다.”

“시간 내서 꼭 같이 움직이십시오. 특히 명의가 상주하고 있는 대형 병원으로 다녀보십시오.”

“그게 무슨…….”

“그리고 노인들이 알츠하이머에 걸리면 국가에서 지원 나오는 건 알고 계십니까? 진단서가 있으면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룹 회장으로 있던 인물이 쪼잔하게 국가의 혜택을 받는다는 건 구차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말의 행간에 숨겨 놓은 다른 의미가 있다는 소리였다.

씨이익.

성동민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죠. 제가 다른 형제들보다는 효자입니다.”

미래를 이미 알고 장태산이 팁을 던져준 것이다.

성동민은 기가 막히게 그걸 잘 받아먹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마시도록 하죠.”

“아쉽습니다.”

“다음에 또 기회를 잡죠. 친구 사이인데.”

장태산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성동민이 따라 일어섰다.

“아! 맞다!”

갑자기 문을 벗어나려다 뭔가 생각난 듯 탄성을 내지르는 장태산.

돌아서서 성동민의 눈을 직시했다.

그리고.

“혹시 중국 사업이 어려워지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제가 좋은 인맥을 친구로 두고 있습니다.”

갑작스런 제안이다.

“알겠습니다.”

성동민은 형식적인 인사치레 정도로 받아들이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인맥은 자신도 구축해 놓고 있었다.

장태산이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라 해도 개인의 사소한 인맥과 한국과 일본에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차기 후계자의 인맥은 비교할 수 없었다.

씨익.

그럼에도 의미 모를 미소를 짓는 장태산.

성동민은 알 수 없는 찝찝함이 온몸을 감싸는 걸 느꼈다.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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