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8장. 파격 제안(5).
“이 녀석 봐라……. 아버지에 이어서 동민이를?”
삼성동에 위치한 랏데장학재단 이사장실.
랏데가의 장녀 성미라가 속속 들어오는 보고에 머리를 굴렸다.
성미라는 아버지가 지금의 성공을 이루기 전에 낳은 자식이었다.
젊어서부터 야망이 남달랐던 아버지는 그 길로 일본으로 밀항했다.
어린 시절 한동안은 아버지 얼굴을 모르고 자랐다.
엄마는 전쟁 난리통에 병을 얻어 낫지 못하고 사망했다.
보호막이 없는 상태에서 친가 할머니 댁에 맡겨졌고 어느 시점까지 눈칫밥을 먹으며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공주가 됐다.
일본에서 갖은 고생 끝에 성공한 아버지가 거액의 돈을 보내왔다.
작은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가난한 농부 집안이었던 성씨 가문은 일시에 마을 유지가 됐다.
줄줄이 많았던 형제들 모두 한국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사업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보내준 엔화는 한국에서 유용한 사업자금으로 쓰였다.
그렇게 엄마 없는 서러움을 날리고 부유한 삶을 살게 된 성미라.
어린 시절부터 눈치를 보고 자란 탓에 쉽게 사람을 믿지 못하는 구석이 있었다.
넉넉하지 못한 생활 속에서 자신을 구박하던 사람들에 의해 평생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갖게 됐다.
그 일을 두고 아버지는 미안한 마음을 갚기 위해 엄청난 부를 안겨줬지만 치유는커녕 만족도 하지 못했다.
딸이라는 이유로 일반적인 사업에는 발을 담그지 못하게 했다.
두고두고 불만을 품게 됐다.
그런 장녀 성미라의 마음을 어떻게 읽고 성경호 회장은 그룹 주식 상당수를 그녀에게 물려줬다.
그 주식이 성미라에게 큰 힘이 됐다.
랏데가 승승장구하며 주식 가치가 큰 폭으로 치솟았다.
엄연한 법적상속권자이다 보니 누구도 그녀를 무시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배다른 동생들도 거부감 없이 누나라고 깍듯하게 대우했다.
물론 가족 간에 흐르는 따뜻하고 특별한 정 같은 건 없다.
서로가 알다시피 모두가 계산적이었다.
나눌 수 있는 이익이 있는 곳에서 웃음꽃이 피는 관계 정도.
성미라는 차라리 그게 편했다.
어떻든 어색한 동생들과 피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 고역이었다.
아버지는 입장이 달랐다.
그래도 천륜지간이다 보니 그나마 부정을 느꼈다.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버지를 가장 많이 보필하는 사람도 성미라였다.
그 과정에서 성미라에게 떨어지는 생각지 못한 떡고물도 쏠쏠했다.
주식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두 동생들이 대놓고 밀어주는 구조였다.
계열사 지원의 형태를 띠고 아낌없는 후원해 줘 그동안 알짜배기 부를 쌓았다.
그러던 중 듣게 된 낯선 이의 방문.
오랜만에 성미라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장태산……. 요란한 소문처럼 그렇게 대단한 녀석이 맞을까?”
성미라는 속에서 발동한 호기심에 심장이 뛰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만나서 판단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신분으로는 어림없었다.
장태산이 가진 경제적 파워는 이제 5대 그룹 못지않게 위상을 떨치고 있었다.
“동민이가 똑똑하단 말이야.”
때마침 한국으로 들어오려고 준비 중인 큰동생보다 둘째가 훨씬 똑똑했다.
명절이나 생일 때마다 잊지 않고 선물을 챙겨 보내는 것부터가 차이가 났다.
썩 가까운 관계는 아니지만 조카들까지 신경 쓰는 건 인정할 만했다.
조카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그룹 계열사 임원 자리에 앉혔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자꾸 둘째에게 기울었다.
장자인 성동국은 오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 자신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가 했던 말을 아직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했다.
아버지의 소개가 끝난 뒤 일본 집에서 바람을 쐬고 있을 때 성동국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더러운…… 조센징!’
그때의 충격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성미라에게는 일본인이 한반도에 꽂은 말뚝이 박힌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직도 가슴 깊이 박힌 채 빼내지 못했다.
꿋꿋하게 살아남아 자식들에게 많은 걸 남겨 주기 위해 꾹 참았다.
성동국이 회장이 되면 모르긴 몰라도 지금까지 쌓아올린 부를 모조리 빼앗길 수도 있었다.
랏데가는 탈세와 불법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데 도가 튼 기업이었다.
성미라 자신도 그 중심에 놓여 있었다.
그런 만큼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껏 잘 살펴야 했다.
아버지가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는 차기 회장 자리는 누구에게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만큼 중요한 시점에 등장한 장태산.
“동민이와 손을 잡으려나…….”
성동국과 장태산 사이에 한 차례 부딪침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다.
오만한 성동국이 먼저 장태산에게 고개를 숙일 리 만무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장태산은 성동민과 손을 잡게 될 것이다.
“궁금하네. 후훗.”
성미라는 대세가 어느 쪽으로 흐를지 궁금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동민아 잘 해봐. 난 동국이보다 네가 더 좋다.”
성동국이 생각 이상의 큰 베팅을 하면 좀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수준의 배팅이 이루어진다면 성동민의 손을 잡는 게 더 이득인 구조였다.
기준을 명확하게 정한 성미라.
“장태산……. 한 번 만나볼까?”
***
뭘 그렇게 놀라시나.
성동민 회장이 나의 제안이라는 말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런 파격적인 제안은 처음 받아볼 것이다.
머릿속이 온통 뒤엉키는 게 훤히 보였다.
성경호 회장이 왜 나를 통해 유언장을 작성했을까 궁금해 미칠 테니까 말이다.
속으로 노망 난 늙은이라고 욕을 퍼부을 수도 있었다.
자필 유언장도 효력이 있지만 상속자들 중 누구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재판을 받아야 한다.
재판에 부쳐지면 그 결과를 얻기까지 기간이 꽤 걸린다.
그룹 경영에 공백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다.
덜 받은 형제들의 악다구니와 화려한 변호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많은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특히 랏데는 일본 기업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있는 실정.
일이 시끄러워지면 국민 정서에 반한다는 이유로 당장 불매 운동을 개시해 랏데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자필 유언장은 핵폭탄 수준의 파급력을 갖고 있었다.
성경호 회장도 시간이 지나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게 뻔했다.
하지만 배는 부두를 떠났다.
어차피 1, 2년 뒤면 랏데는 본격적으로 구설수에 오른다.
경영권 분쟁부터 시작해 중국 사업 전반에 걸쳐 국민들의 대표적인 밉상이 된다.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차라리 내가 폭탄을 쥐고 있는 게 나았다.
다만 보관비용이 적지 않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
그 사실을 감안하고 제안하는 것이다.
“…….”
성동민 회장의 머리 굴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각자가 들고 있는 패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꿀꺽.
스트레이트 잔을 비웠다.
오늘따라 양주가 달콤했다.
호박색 액체가 주는 독특한 독함과 쌉싸름함.
무색무취에 가까운 소주와 맛이 많이 달랐다.
포도주 특유의 과일향이나 산미, 중국술의 곡식 발효 풍미와도 달랐다.
마치 지금 이 자리의 불편함을 대신하는 것 같다.
마시면 취하는 깔끔한 독주.
성동민은 도저히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제안입니까…….”
일본에서 자란 까닭에 태도에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예의는 덤이었다.
독재자 인상이 강했던 형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한국에서 사업하기에 딱 좋은 스타일이다.
“글쎄요. 어떤 제안이 좋을까요?”
제안을 하겠다고 말해 놓고 바로 본론을 꺼내지는 않았다.
쉽게 얻은 것들은 금세 그 가치를 잃는 법이다.
성동민 회장의 갈등하는 모습과 괴로운 모습을 충분히 즐겼다.
이때가 아니면 대한민국 5대 그룹 총수를 무엇으로 협박해 보겠는가.
“변호사라고 하니 아시겠지만…… 새로 유언장을 작성하면 기존 유언장은 효력을 상실합니다.”
성동민도 그냥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죠.”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 와중에도 병을 잡아 내 잔을 채우는 치밀하고 자연스런 성동민 회장의 행동.
플러스 가산 점수가 붙었다.
“하지만 충분히 귀찮은 상황을 만드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요? 모든 게 다 합법인데.”
살짝 겁도 줬다.
다시 미미하게 찡그려지는 성동민 회장의 얼굴.
흥미롭다.
술을 나누는 자리에서 그룹 회장 놀리는 맛이 아주 일품 안줏거리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동민 회장이 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네.”
짧게 답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랏데 상속문제는 복잡합니다. 아버님이 경영권을 지금까지 손에 쥐고 있습니다. 변모하는 다른 기업과 또 사회 현상과도 맞지 않습니다. 손발이 꼬여 투자 기회를 놓치는 일이 잦습니다.”
먼저 불만이 터져 나왔다.
나도 개입할 수 없는 랏데 경영 문제다.
“저런…….”
공감하는 의미에서 동조 한 번 날려줬다.
“그 와중에 형과 저의 경영권 문제가 터졌습니다.”
“터졌다니요? 지금요?”
“형님이 일본에서 치밀하게 물밑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형수님 가문이 뒤에서 돕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흘려듣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최대한 그런 부분까지는 관심 없다는 듯.
“곧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거의 확신한다는 듯 성동민 회장이 말을 이었다.
상속문제를 언급하다 전쟁이란 말까지 나왔다.
그 점은 이미 알고 있는 터라 놀라지는 않았다.
지금 성동민 회장이 언급한 전쟁은 2020년까지도 끝이 나지 않는다.
“쉽지 않겠습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또로록.
빈 채 놓인 성 회장의 잔에 술을 다시 채웠다.
“크으.”
단숨에 털어 넣고 짧은 신음을 토했다.
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인 게 여실히 티 났다.
“천천히 드십시오.”
말과 달리 나는 다시 잔을 채웠다.
“제안이…… 궁금합니다.”
성동민 회장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누가 보면 사랑을 갈구하는 눈빛인 줄 오해할 것 같다.
“어렵지 않을 겁니다.”
“제 손에서 가능한 일이라면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다시 느끼는 거지만 성동민 회장은 똑똑했다.
오만하고 겉멋만 든 형과는 확실히 다른 인품이다.
내가 따로 원하는 바가 있음을 알아챘다.
“제가 공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장 회장님.”
“네. 성 회장님.”
“우리 친구하죠.”
“친구요?”
기대하지 않은 성동민 회장의 파격적 제안.
갑작스런 한 방에 이번에는 내가 진심으로 놀랐다.
도움을 구하는 관계와 친구가 되자는 것은 천지 차이다.
단순 협조자가 아닌 적극 협력자가 되어 달라는 의미.
“성현 말씀에 뜻이 통하면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했습니다. 배울 점이 있다면 아이도 스승으로 섬기라 했는데 친구면 양호하죠.”
이 양반 배포 큰 거 봐라.
한국인이었다면 바로 형 동생 먹자고 틈새를 치고 들어올 위인이다.
“하하하하하하하.”
호탕하게 한 번 웃었다.
오랜만에 재밌는 술자리를 가졌다.
성경호 회장과 그릇 모양이 많이 달랐다.
과거 생의 랏데가 굳건히 버티고 쉽게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를 확실하게 알았다.
욕심 많은 복 두꺼비 성동민 회장이 그야말로 알짜다.
“받아들이겠습니까?”
성동민은 매 순간 진지했다.
나름 승부수를 내걸고 있었다.
“이거 의외로 큰 거 한 방 얻어맞았습니다.”
“그 말씀은…….”
성동민 회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친구 좋습니다.”
“아! 다행입니다!”
친구 먹자고 하는 게 반말하는 그런 친구 관계가 되자는 건 아니다.
인생 선후배로서 사업의 동반자적 친우 관계를 맺자는 의미다.
그런 만큼 서로에 대한 적정 거리를 유지할 것이다.
적보다는 훨씬 가까운 친구 사이.
“건배할까요??”
“물론입니다! 오늘 취할 때까지 마시겠습니다!”
성동민 회장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어진 대작.
금세 술병이 비워졌다.
룸에는 몇 병의 술이 더 있었다.
안주는 굳이 필요 없었다.
대화가 간이 잘 맞는 짭짤한 안주가 돼 줬다.
“그런데…… 성 회장님.”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네?”
“제 진짜 제안은 반드시 들어주셔야 합니다.”
“제안요? 어떤…….”
진지한 태도에 성동민 회장이 살짝 긴장했다.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평생 아이스크림은 공짜로 주십시오!”
“!!!”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