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7장. 파격 제안(4).
- 만나보라고 해.
“유진이보다 그쪽 나이가 더 어리지 않나요?”
- 요즘 같은 세상에 그게 무슨 흠이야. 좋은 녀석이야.
‘좋은 녀석?’
여자는 남자의 말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가 다른 남자를 나이 불문하고 좋은 녀석이라고 표현하는 건 처음 들었다.
그는 아들들에게 유난히 엄격했다.
어쩔 땐 자신도 그가 무서웠다.
그 냉정한 잣대가 타인들을 향해서는 더 까다롭게 적용됐다.
부하 임원들을 언제나 호통치던 양반이 오늘따라 목소리도 부드러웠다.
막내딸 유진에게만 보이던 유별난 호감.
여자는 남자가 언급한 그가 궁금해졌다.
“장태산인가 하는 그 청년이 싫다고 했다면서요.”
아무리 잘난 남자를 소개한다 해도 엄마인 저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먼저였다.
호적에 오르지 못한 남자의 아내 자리.
멀쩡하게 본처가 살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지금의 삶에 만족했다.
랏데의 주인인 남자 덕분에 자신의 피붙이들은 부를 누렸다.
이렇다 할 능력도 갖추지 못했던 오빠가 어엿한 중소기업 회장이 됐다.
부모님도 지금까지 떵떵거리며 잘 살았다.
여자 혼자만 인내하면 모두가 평안한 삶을 사는 것이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스스로 선택한 인생이었다.
다른 여성 가수들처럼 단순한 스폰 관계로 끝내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망가질 몸이었다.
전성기 시절 때만 해도 대한민국 미모의 여가수로 살아간다는 것은 웬만한 수치와 수난의 연속을 감내해야 하는 삶이었다.
하물며 당시 청와대에서도 연락이 왔다.
뿐만 아니라 권력자들과 경제인들, 하다하다 깡패들도 여자를 노렸다.
일반 국민들은 전혀 모르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벌어지는 짙은 어둠 속의 삶.
그때 랏데 회장의 도움으로 몇 번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그의 여자가 되어 일본에서 쭉 살았다.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게 가능했다.
그와의 사이에 아이도 낳았다.
여자를 대할 때와 달리 남자는 아무 조건 없이 딸을 호적에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대신 여자는 차명으로 남자의 주식을 관리했다.
누구도 모르고 있는 비밀이지만 딸이 앞으로 나서는 순간 랏데 주인이 바뀔 수 있었다.
- 미녀 싫다는 남자 없어.
“요즘은 안 그래요.”
- 아니야. 남자는 그래.
여전히 나이가 먹어도 랏데의 주인은 고집이 셌다.
한번 박힌 생각은 확고부동해 절대 바꾸지 않았다.
보기보다 더 대쪽 같은 성품을 지닌 남자.
이번 일도 그의 성품대로 밀어붙일 것 같았다.
어느덧 성장해 20대 후반에 들어선 딸이지만 다른 젊은 여성들과 달리 아빠에게서 자유롭지 못했다.
호적에 입적되지 않았더라면 분명 비뚤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딸은 우려했던 것보다 잘 자라줬다.
일본에서 대학교까지 나와 조용히 조그만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돈이야 죽을 때까지 쓰고도 남을 만큼 있었기에 사회에 좋은 일을 하고 살아도 괜찮았다.
다행히 성격도 무난했다.
여느 일본 여성들처럼 무슨 일에 내색을 잘 하지 않았다.
문제는 연예에 잼병이라는 것.
부모의 인생을 낱낱이 지켜봐서 그런지 남녀 간의 애정에는 걱정스러울 만큼 무감각했다.
말이 좋아 봉사이지, 사회적 기업에만 매달려 살고 있는 딸이 안타까울 때가 많았다.
철저하게 언론 노출을 차단한 덕에 일반인처럼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스스로 자신을 너무 단속하는 것도 문제였다.
“알았어요, 한번 말해볼 게요.”
- 말은 무슨! 당장 한국으로 오라고 해.
남자가 금세 돌변해 화를 냈다.
나이가 구순이 넘어가지만 성정은 여전히 젊은 시절 못지않게 괄괄했다.
이럴 때는.
“그럼 주말에 같이 갈게요.”
- 당신도 온다는 거야?
“네.”
- 그럼…… 빨리 와.
나이를 먹으면 애가 된다는 말이 맞았다.
알츠하이머 초기 증세라는 걸 가족들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남자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아직은 기업 최종결정권자였다.
그의 눈 밖에 나는 순간 재산 상속에 불리하다는 걸 각자가 너무 잘 인지하고 있었다.
“당신 좋아하는 동경 모찌 사갈 게요.”
- 알았어.
“주말에 봐요.”
뚝.
통화가 끝났다.
“휴우……. 갑자기 전화해서.”
여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날 이 안정적인 자리에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살얼음판을 걸었는지 모른다.
한국이라면 머리채를 뜯고 싸워야 할 첩 신분이지만 일본은 성과 축첩에 의외로 관대했다.
대부분 고관대작이나 경제인들은 ‘메카케’라 불리는 첩을 뒀다.
본부인들은 그런 일에 명예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소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관료와 경제인들의 유착 관계가 심한 것이 일본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린 문화였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돈과 권력을 가진 남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방법이 축첩이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일본에서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는 여자.
한때 한국에서 가수 조미련이라는 이름으로 유명세를 탔던 여자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딸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건 불을 보듯 빤했다.
동시에 남편 고집을 꺾어야겠다는 생각도 못 했다.
“도대체 장태산이 누구야?”
***
‘이게 뭐지?’
성동민은 의아한 표정으로 007 가방을 빤히 쳐다봤다.
아버지가 즐겨 사용하는 현찰 전달 방식이다.
크기로 보아 잘나가는 여당 중진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하사하는 액수였다.
그 가방을 장태산이 갖고 있었다.
‘돈?’
장태산의 재산 규모가 상당하다는 것은 성동민도 알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 있어 파악한 자산만 수조가 넘었다.
물론 대부분이 차명으로 관리되거나 법인 자금으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월가의 전설 로버트 라이언과 친구 관계다.
랏데그룹 상장 기업들의 상당수 주식을 장태산이 매집한 걸로 파악됐다.
현실적으로 대주주인 그에게 아버지가 돈을 건넸을 리는 없었다.
노망이 나지 않고서야 정치인들을 매수하는 데 쓰는 수준의 자금을 건넸을 리 없다.
“이게 뭡니까?”
성동민은 직접 확인에 들어갔다.
아버지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냐는 질문에 대답으로 가방 하나가 건네졌다.
“용돈을 주시던데요.”
“네? 용돈요?”
성동민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항상 돈이 궁한 정치인들에게는 먹히는 방법이 맞다.
하지만 장태산 정도 되는 재계 거물에게는 엄청난 실례였다.
갈수록 알츠하이머 증상이 악화되어 가고 있는 아버지.
“크게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순수한 의뢰비입니다.”
“의뢰비요?”
‘도대체 무슨 말이야?’
장태산은 보기보다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변호사 비용입니다.”
“!!!”
변호사 비용이라는 말에 성동민의 안색이 다시 달라졌다.
평범한 용돈이라면 노망이 났겠구나 치부하겠지만 변호사와 의뢰라는 단어에는 법률적 문제가 엮여 있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장태산의 말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현시점에서 법률문제로 의뢰할 만한 일은 몇 개 없었다.
‘설마?’
의심이 가는 건이 하나 떠올랐다.
주변에 그룹 일을 맡은 변호사를 비롯해 아는 로펌도 많았지만 아버지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상속 문제에 특히 그랬다.
다 도둑놈들이라고 대놓고 말하며 자신이 죽기 전까지 쥐고 흔들 패로 여겼다.
다른 그룹들과 달리 장성한 자식들이 기를 못 폈다.
회장이 된 지금도 중요 결재 건은 서류를 들고 브리핑을 해야만 했다.
과거와 달리 총기가 흐릿해지면서 경영 관련 일들에 판단 미스가 많아졌다.
세월이 바뀐 만큼 경영 리스크는 도처에서 발생했다.
일본과 달리 한국 정치는 말 그대로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그 일들을 세세하게 설명하며 허락받는 과정은 그야말로 고역이다.
그나마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었다.
본인이 이제 늙었다는 걸 인지해서 생긴 변화였다.
90세 전까지는 손찌검도 했다.
귀한 자식일수록 매로 가르친다는 걸 신앙처럼 믿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젊은 청년 변호사에게 법률적인 문제를 의뢰했다.
꿀꺽.
신동민은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믿고 싶지 않지만 상상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큰일이 된다.
유언공정증서는 아니었다.
다만 자필로 인한 경우는…….
“맞습니다.”
장태산이 자신의 눈빛을 읽은 듯 대답했다.
“어떻게 그런!”
의심하던 부분이 사실로 드러나자 신동민은 짧게 소리를 쳤다.
적당히 여유 있던 분위기는 금세 깨졌다.
대신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가방 안에 유언장이 들어 있다면 큰일이었다.
장태산이 누구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아버지 사후 랏데는 격랑에 휩싸일 것이다.
지금처럼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면 굳이 공개되지 않아야 한다.
일본에 있는 지주회사 종업원들과 오랜 시간 동안 신뢰를 쌓아왔다.
여러 라인을 통해 우호 지분도 많이 확보한 상태다.
그런 와중에 유언장으로 인해 상황이 급변한다면.
결과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꿀꺽.
속이 탄 성동민은 단숨에 입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장태산에 대한 자신의 선택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친구와 적 사이.
이번 선택으로 랏데 주인이 결정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잔 더 드시죠.”
성동민의 마음과 달리 장태산은 여유로웠다.
술병을 들며 술을 권했다.
스윽.
말없이 잔을 내밀었다.
“연배도 있으신데 한 손으로 받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습관이 돼서.”
술을 받는 성동민의 손이 좀 전과 달리 미세하게 떨렸다.
애써 감추려 했지만 긴장감이 몸을 지배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회장님.”
장태산이 은근한 목소리로 성동민을 불렀다.
고개를 들어 장태산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성동민.
“제가 제안 하나 해도 될까요?”
“!!!”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