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9장. 떠나는 자와 남는 자.
“ⵈⵈ이게 뭐꼬?”
“으음ⵈⵈ.”
냉동창고를 비롯해 항구파의 주요 사업장을 구성파가 접수했다.
그 와중에 저항하던 항구파 조직원들은 과거에 그들이 그러했듯 조용히 통통배에 실려 바다로 향했다.
폭풍이 몰아치는 밤사이 실질적으로 부산을 다스리던 밤의 보스가 뒤바뀌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최종 보스의 서식지에 구성파 보스 방만식과 부하들이 이른 새벽부터 들이닥쳤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도 왔다 갔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수십 명이 넘는 항구파 정예 조직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밤새 내린 폭우와 돌풍에 별장 주변은 난장판이었다.
별장 내부도 사정은 마찬가지.
문이 열려 있었던 듯 바람이 휘갈긴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하지만 별장 내실에서도 그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행님. 이거 이상타 아입니꺼. 최철혁이 하고 똘마니들이 안 보입니더.”
“일본으로 내뺀 거 아입니꺼?”
최철혁이 아직 살아 있으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게 빤했다.
부산 외에도 서울에 항구파 조직원들이 제법 상주하고 있었다.
구심점인 보스가 살아 있게 되면 언제든 조직 재건이 가능했다.
야쿠자도 항구파 편이다.
‘진짜로 쓸어버렸나? 아니면 도망친 건가?’
방만식은 찝찝한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최철혁을 깔끔하게 정리할 테니 자신에게 부산을 접수하라고 했던 의문의 남자.
막상 그가 한 제안대로 현실이 되었지만 뭔가 찝찝했다.
직접 최철혁의 숨통을 끊거나 끊어진 걸 확인하지 못했다.
“일단 부산은 완벽하게 접수했습니다. 안심하셔도 될 겁니다.”
밤을 샌 강지철이 피곤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지철이 수고했데이.”
“아닙니다.”
“서울 쪽은?”
“최철혁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고 하면 투항할 겁니다. 제가 데리고 있던 애들이 많습니다.”
“그럼 니가 최종 마무리 하거래이.”
“넵! 형님.”
강지철은 하룻밤 사이에 방만식의 오른팔이 됐다.
같이 있는 동안 확실히 깨달았다.
항구파에 없는 의리와 낭만이 구성파에는 아직 남아 있었다.
“형님ⵈⵈ. 어째 으스스 합니데이.”
“그러게 말입니다.”
“여기 파이다.”
구성파도 평범한 조직은 아니었다.
산사람 몇씩은 담가본 자들이 태반인데, 그 정도로 내공 있는 자들이 모두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사방에서 원혼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만 가입시더.”
“문둥이들이 뭐라카노. 우리 조직 아이가. 이거에 쫄면ⵈⵈ.”
휘이이이잉.
덜컹 덜컹.
그때 갑자기 휘몰아치는 강한 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리며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리고 펄럭이며 날리는 커튼 자락까지.
“으아아아아!”
“귀ⵈⵈ신이다!”
산사람은 무서워하지 않지만 귀신은 두려워하는 구성파 조직원들이 어린애처럼 비명을 질렀다.
‘이거 피 냄샌데ⵈⵈ.’
그 와중에도 미세하게 맡아지는 피 냄새에 반응하는 방만식.
“가자.”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수중에 들어온 이 별장을 당장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으으으으으으.”
서련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이렇게 달달한 잠을 오랜만에 잤다.
계속되는 강행군에 지칠 대로 지쳐 녹초가 됐다.
솔로 활동이 생각보다 길어진 여파였다.
그리고 전혀 예기치 못했던 납치.
“!!!”
서련은 눈을 번쩍 떴다.
낯선 공간이다.
평소 생활하던 숙소 천장이 아니었다.
도무지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
침실은 넓었고 침대도 킹 사이즈로 무척 컸다.
아이보리색 벽지에 심플한 가구만 놓여 있는데도 왠지 모르게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여기는ⵈⵈ.”
서련은 서둘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화장대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아!”
목에 생겼던 상처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재생되는 기억들.
‘분명 깡패 두목에게 잡혀서ⵈⵈ.’
태풍이 불어 닥친 부산에서 깡패들의 별장으로 납치됐다.
그곳에서 끔찍한 상황에 놓인 채 치욕을 당할 뻔한 순간 장태산이 나타났다.
두목이 칼로 위협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장태산이 도발했다.
그리고 잠깐 자고 있으라는 말을 들었고, 그 뒤 기억이 끊겼다.
“그럼ⵈⵈ. 이곳은.”
서련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
거실 창 너머로 넓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직 태풍의 영향권인 듯 바람이 거세게 불고 파도도 높았다.
연신 비가 후려치듯 두꺼운 창을 두드렸다.
먹장구름이 두툼하게 낀 하늘과 검푸른 바다가 어쩐지 답답한 속을 뻥 뚫어주는 것 같았다.
“잘 잤어?”
그때 들려온 다정한 목소리.
“오빠!!!”
커다란 거실 창 한쪽에 서서 커피잔을 들고 서련을 바라보는 남자.
“가수 아니랄까 봐 목청 좋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왜 여기에ⵈⵈ.”
“기억 안 나?”
“깡패들은?”
“다른 조직들이 다 쓸어갔어.”
“다른 조직?”
“깊게 알면 다쳐.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가.”
장태산의 말에 서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사정을 안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었다.
“여기는 어디야?”
“팰튼.”
“호텔이야?”
“어.”
“이곳에는 왜ⵈⵈ.”
“태풍 때문에 비행기도 막히고 도로 사정도 안 좋아. 너도 잠에 푹 빠져서 일어날 생각도 안 하고.”
“그런데 내가 어쩌다 잠든 거야?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어.”
서련은 궁금했던 순간을 물었다.
장태산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여유 있는 모습으로 커피를 마시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별장에서 총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어디 한 군데 다친 곳이 없어 보이는 장태산.
“오빠가 운동 신경이 좋잖아. 나 이래봬도 올림픽 메달리스트야.”
“그렇다고 총알도 피해?”
“그 깡패들 군대도 안 갔다 왔어. 누가 그런 놈들 총질에 맞아.”
피식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장태산.
“그럼 그 두목 깡패는 갑자기 왜 몸을 못 움직이게 된 거야?”
“서련아! 너한테만 말하는데ⵈⵈ. 오빠가 초능력잖아.”
장태산이 은밀하게 속삭이듯 얘기했다.
“ⵈⵈ정말?”
“아니 농담.”
“오빠!”
서련은 진담 같은 장태산의 농담에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도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농담이어도 천만다행이었다.
꼬로로록.
그때 서련의 배에서 가히 천둥소리 같은 배꼽시계가 울렸다.
요즘 행사 때문에 제대로 식사를 챙기지 못했다.
어제저녁에는 납치를 당하고 이런저런 일을 겪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다.
깡패 두목이 불어터진 짜장면을 내밀었지만 조금도 먹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서련의 배는 등가죽에 딱 달라붙었다.
아무리 몸매 관리에 사력을 다하는 여자 아이돌이라고 해도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룸 서비스 시켰다.”
“정말?”
서련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장태산과 식당 같은 곳에서 대놓고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 손에 스마트폰이 쥐어지면서 연예인들의 사생활은 더 조심스러워졌다.
그걸 알고 서련을 배려하는 장태산.
어제 납치당했던 기억은 까마득히 옛일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남들 같으면 트라우마가 생길 만큼의 대사건을 겪었지만 이 정도의 여자 아이돌로 살아남으려면 정신력 또한 단련돼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꿈에서도 그리던 장태산과 단둘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거센 태풍이 지나고 차분히 가라앉은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호텔 펜트하우스다.
분위기도 좋고 조명도 좋았다.
낮임에도 먹장구름이 잔뜩 끼어 마치 저녁처럼 사방이 어둑했다.
“물? 커피?”
“따뜻한 물 있어?”
“그럼.”
장태산은 정말 친절했다.
커피포트에서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라왔다.
호로록.
아침에 기상할 때 따뜻한 물을 마시는 습관을 들인 서련.
손으로 전달되는 잔의 온기를 느끼며 바다를 내다봤다.
“위기 속에 찾아온 기회인가?”
“뭐가?”
“오빠랑 이렇게 단둘이 있었던 적이 거의 없었잖아. 경리단길에서 술 마신 게 마지막이야.”
“나도, 너도 바빴잖아.”
“내가 누구 때문에 바빴는데! 내가 돈 벌어서 오빠 사법시험 뒷바라지하는 게 꿈이었는데ⵈⵈ. 그렇게 빨리 합격해 버리면 어떡해? 그리고 돈도 대따 벌고.”
서련은 자신의 어긋난 계획이 새삼 억울했다.
가수로 성공해 장태산을 가지겠다는 포부 넘치는 깜찍한 계획을 세워 두었던 서련.
하지만 모든 게 스쳐 지나가는 꿈이 돼 버렸다.
이제는 바라만 봐도 고개가 아픈 위치까지 멀어져 버린 장태산이었다.
“마음만 받을게.”
“다른 걸 받으면 안 돼?”
“뭐?”
“그게ⵈⵈ.”
서련은 말을 꺼내다 말고 얼굴을 붉혔다.
자신도 모르게 발칙한 생각과 동시에 말이 튀어나왔다.
감출 수 없는 본심.
“돈?”
“아니 그게 아니라ⵈⵈ.”
서련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는 서련도 어엿한 성인이었다.
굳이 미래를 약속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이와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장태산 앞에서는 부끄러웠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점 찍은 장태산은 그때보다 훨씬 더 멋진 남자가 돼 버렸다.
자신이 소유할 수 없을 만큼 멋진 남자.
스윽.
그때 장태산이 할 말을 잃고 서 있는 서련을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서련이 많이 컸네.”
“ⵈⵈ.”
“그런데 어쩌지. 오빠는 예전에도 말했듯이 서련이가 쌍둥이 동생들처럼 느껴지는데.”
서련도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날 때부터 장태산은 자신을 동생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애가 탔는지도 모른다.
“오빠가 다 큰 여동생을 이렇게 안는 게 어딨어.”
“여기.”
“나빴어ⵈⵈ.”
말과 달리 서련은 장태산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기회가 많아.’
어차피 연예인 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상대가 누구든 함부로 연애할 수 없었다.
과거보다 많이 자유로워졌지만 아직도 여자 연예인의 사생활은 은밀하게 감춰져 있는 게 나았다.
서련도 욕심이 많은 한 사람이었다.
가수뿐만 아니라 연기자로도 활동 영역을 넓혔다.
‘따뜻해.’
서련은 장태산의 품에서 오랜만에 따듯한 행복을 맛봤다.
어차피 장태산은 매일 매일이 바쁜 사람이다.
그가 벌여놓은 사업 영역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띠리리리리리리.
그때 장태산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누가 눈치 없게ⵈⵈ.”
“황 대표님.”
장태산이 웃으며 스마트폰을 받았다.
- 회장님.
“네, 황 대표님.”
- 서련이는 좀 어떻습니까?
“잘 자고 이제 일어났습니다.”
- 천만다행입니다. 회장님이 나서지 않으셨다면 큰일이 났을 겁니다.
지난 밤 일이 대책 없이 소문이 났다면 서련에게 큰 타격이 왔을 게 확실했다.
사실 확인이나 동정보다는 남의 일에 대해 상상을 더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걸 확인하려고 연락한 건 아닌 것 같은데ⵈⵈ.”
- 회장님ⵈⵈ. 회사로 좀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여는 황연태 대표.
“무슨 일 있습니까?”
- 그게ⵈⵈ.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