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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7장. 마성녀 지성자 (986/1,284)

997장. 마성녀 지성자

“베커 장이라ⵈⵈ.”

마력석에서 발한 빛으로 미약하게 밝혀진 지하 공간.

짙은 회색 로브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종이 한 장을 펼쳐 읽고 있었다.

오직 그만이 해독해 낼 수 있는 암호문.

의뢰가 들어왔다.

요즘 들어 대륙을 들썩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베커 장 공작 척살 의뢰.

대귀족들은 물론이고 최상급 마력 기사였던 팰트론 국왕을 검 한 자루로 죽여버렸다.

그 정도 수준을 갖춘 자라면 마스터급이 확실했다.

마탑주와 능력이 맞먹는다는 검의 마스터들.

그런 베커 장을 척살해 달라는 의뢰였다.

거절할 수 없는 일이다.

오랜 세월 동안 서로를 돕고 살아왔던 마탑의 부탁이자 의뢰였다.

그리고 청부 길드에서의 의뢰 거절은 말이 안 되는 행위였다.

의뢰 대상을 제거하지 못해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행해야만 했다.

그게 바로 청부 길드의 의무이자 불문율이었다.

“길드장님, 상대가 너무 강한 거 아닌가요?”

남자의 등 뒤 어둠 속에서 새하얀 손이 꿈틀거렸다.

요사한 뱀의 혀처럼 손은 길드장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그래서 거절하라고?”

“할 수 있다면 그래야죠. 상대가 마족이라는 소리도 있던데.”

“그건 아니지. 당신도 잘 알잖아. 베커 장을 각 신전에서도 확인했어.”

“그래도 너무 위험한 자에요. 저 같으면ⵈⵈ 거절할 거예요. 세상에 목숨보다 소중한 게 뭐가 있나요?”

여인의 음성은 몽롱하고 달콤했다.

정신계 마법을 사용하는 듯 여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욕망으로 가득한 환상에 빠져들 것 같았다.

“레이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 나에게 정보를 팔고자 찾아온 거 아닌가?”

화르르르.

그사이 남자가 들고 있던 종이가 갑자기 불타올랐다.

특수한 마법 종이 위에 기록된 내용으로 시간 제약이 걸려 있었다.

“폴.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을 모르나요? 전ⵈⵈ 돈보다 당신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구요.”

꿈틀거리는 레이나의 손은 남자의 가슴을 지나쳐 아랫배로 향했다.

누가 보면 뜨거운 연인 사이로 오해할 만한 행동.

“말해봐. 그 녀석을 단칼에 죽일 수 있는 약점을.”

눈을 감고 여인의 손길을 올올이 즐기는 남자.

대륙에 몇 없는 대형 청부 길드의 수장이 바로 폴이다.

나이는 물론 실력까지 모두 다 불문에 부쳐져 있는 인물이었다.

알려진 게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부 대상자를 가장 자연스럽게 제거함으로써 누구도 의심치 못하게 만들었다.

은밀하고 신속하며 치밀하게 살해하는 ‘밤손님’ 길드장.

그에게 정보를 팔 심산으로 나타난 정보 길드의 수장 레이나에게 베커 장의 약점을 물었다.

“알려는 줄 수 있는데 괜찮겠어요? 그 녀석 정말 강해요.”

길드장의 자존심을 은근히 자극하는 레이나.

등 뒤쪽에서 폴을 애무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요사하게 빛났다.

자신에게도 걸려든 청부 의뢰 사건.

마탑에서 몇 개의 청부 길드로 베커 장에 관한 의뢰를 동시에 내려보냈다.

청부 가격은 엄청났다.

성공할 시 그 보수는 웬만한 귀족 가문 하나를 세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레이나는 고급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정보를 가장 높은 값에 팔아줄 자를 찾아 나섰다.

선택한 청부 길드 ‘밤손님’의 길드장 폴.

“레이나. 우리 선수잖아. 가격을 말해봐.”

“난 진심으로 당신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내가 오빠 사랑하는 거 알지?”

“흐흐흐. 안 들은 걸로 하지.”

정보 길드와 청부 길드는 한 쌍의 뱀과 같았다.

필요에 의할 때만 불타오르는 그들.

“베커 장은 마검사야. 그것도 7서클에 마스터급의 실력자.”

“그건 나도 알아. 다른 거 말이야.”

“좀 참아볼래?”

“으음ⵈⵈ.”

뱀 같은 레이나의 손놀림에 폴이 신음을 흘렸다.

정보 길드의 수장인 그녀는 보통 여인들보다 매혹적인 장미 같았다.

뜨거운 밤을 몇 번이나 보낸 관계였지만 여전히 그녀를 볼 때마다 목말랐다.

하지만 결코 사랑하지는 않았다.

사람을 죽여 먹고 사는 이들에게 사랑은 크나큰 사치였다.

“베커 장을 일대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어. 하지만ⵈⵈ 녀석은 약점을 가지고 있어.”

“약점?”

“그래.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없는 거.”

“???”

“그건 바로 주변 사람들을 자기 몸처럼 여긴다는 거지. 하물며 머저리 같은 영지민들까지도 말이야.”

“흐음ⵈⵈ.”

별 것 없는 내용 같지만 아주 중요한 정보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ⵈⵈ. 놈을 무력화시킬 방법을 난 알고 있어.”

“그래?”

“그런데 가격이 좀 비싸.”

“말해봐.”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흥정.

눈을 감고 레이나의 손길을 즐기고 있었지만 폴은 그녀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한 지역의 정보 길드 수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행사할 수 있는 힘은 미약하지만 갖고 있는 정보와 귀계로 긴 세월 살아남는 이들이 그들이었다.

“베커 장의 진짜 약점은 말이야ⵈⵈ.”

폴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은밀히 속삭이는 레이나.

“음!”

폴의 목구멍에서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귓속을 파고드는 놀라운 정보와 뜨거운 쾌락이 동시에 몰려왔다.

“어때? 그 정도면 자신 있지?”

악마처럼 속삭이는 레이나.

“고마워. 레이나ⵈⵈ. 오늘은 널 사랑할 수밖에 없겠어.”

쓸 만한 정보에 흥분해 짐승으로 돌변한 폴.

그대로 등을 돌려 레이나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

- 형님, 안 보여요?

알파닥이 그것도 질문이냐는 듯 어이없어하며 물어온다.

그래 안 보인다!

가끔 알파닥이 여자처럼 삐치지만 대부분 중성처럼 느껴졌다.

처음 이계에 떨어졌을 당시부터 알파닥은 얄미운 조언자처럼 굴었다.

그야말로 나의 모든 걸 지켜봤다.

온갖 욕설도 다 내뱉었다.

오래된 친구처럼 알파닥과 티격태격하며 지금까지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런 알파닥이 완전한 여성으로 느껴질 리 만무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알파닥은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 얘 완전 예뻐요. 지금까지 내가 봤던 그 누구보다!

- 흥!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사실인 거 같다.

자존심 강한 알파닥이 은근히 인정했다.

- 성질이 개 싸가지 같지만.

- 뭐라고! 개 싸가지? 야! 비루먹게 생긴 잡귀 같으니라고! 너 내가 우습게 보여? 나 성녀야! 성녀!

- 성녀? 요즘은 개나 소나 성녀야? 어떤 성녀가 너처럼 입에 걸레를 물고 살아! 고고하고 도도한 게 성녀의 기본 아냐?

- 우리 동네에서는 이게 표준이야!

- 너희 동네 어디?

- 마ⵈⵈ.

“!!!”

알파닥의 정체가 성녀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뭔가 특이한 능력을 소유한 능력자 정도로 여겨왔다.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녀는 잘도 찾아왔다.

지구의 알림음과는 격이 달랐다.

내가 회귀자이자 신들의 세계를 볼 수 있어서 납득을 했지 나 아니면 다른 이들은 결코 믿지 않았을 존재였다.

그런데 마? 그건 또 어디야?

- 마장동 성녀? 너 도축 기술자?

- 닥쳐! 이 한참 덜떨어진 잡귀야!

- 네가 성녀면 난 지구에서 온 성자다! 그러니까 앞으로 지성자 오빠라고 불러.

- 나이도 어린 게 누가 오빠야!

- 너보다 키가 크잖아. 그리고 얼굴 연식으로 봐도 내가 오빠잖아.

- 미친!

- 미치거나 죽거나 뭐가 달라. 그러니까 오빠라고 불러. 내가 형님 포인트 뜯어서 가끔 맛있는 거 사줄게.

-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어! 야! 바람둥이 이 물건 안 치울 거야? 너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중에 진짜 후회한다!

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알파닥이 날 추궁했다.

“풋.”

상황이 웃겨 웃음이 다 나왔다.

“베커! 왜 그래요?”

품에 안겨 있던 아린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갑자기 웃겨서.

“네?”

- 이 상황이 웃기시다 이거지? 그래. 좀 세졌다고 요즘 어깨에 힘 좀 주는 것 같은데, 너 그러다 큰일난다.

- 마성녀 동생. 우리 형님 실력 몰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검도 뽑아서 괴물도 무찔러. 그리고 인간인데 막 하늘도 날고 손에서 번갯불도 만들어.

- 마성녀? 하아. 이 개념 없는 작명 센스 보게.

알파닥이 고개를 젓고 있는 그림이 연상됐다.

장립의 영혼이 응시하고 있는 한곳.

분명 그곳에 알파닥이 있었다.

- 좋잖아. 거친 야생마 같은 호칭. 마성녀! 누가 지었는지 이름 죽인다!

- 야! 잡귀 그 아가리 안 닥쳐!

지구에서 잡귀 취급을 받더니 이곳에서도 잡귀로 통일됐다.

- 성녀야. 오빠에게 그러면 벌 받는다. 우리 형님 앞으로 잘 모셔. 앞으로 크게 되실 분이야.

- 우리 동네에서는 갓 태어난 애들도 저 인간보다 강해.

- 으헤헤. 뻥 치시네.

- 뻥? 미치겠네. 이것들이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려나. 진짜 한 번 우리 동네 가볼래?

- 마성녀. 그 동네 가면 다 그래?

- 뭐가!

- 너처럼 다 예뻐?

- 와아아아ⵈⵈ. 발정 형님 밑에 그 아우라더니! 너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말이라고 해?

- 응. 나에게는 중요해.

- 내가 말을 말자.

오늘따라 알파닥 참 말 많다.

나에게는 중요한 정보 몇 개 던지고 툭툭 싸가지없이 말하는 게 다였는데 잡귀와 은근 죽이 잘 맞는다.

이번 기회에 둘이 사귀어라.

- 형님이 그렇게 원하신다면야ⵈⵈ. 이 한 몸 희생하는 마음으로.

- 이런 개 X! XXX!

알파닥의 욕이 방언처럼 터졌다.

성녀? 어딘지 몰라도 저 동네 수준 안 봐도 빤하다.

저 정도 수준의 알파닥이 성녀라면 나머지는 볼 것도 없었다.

- 흐흐. 거 참 욕 찰지게 하네. 너 그러니까 진짜 귀엽다.

- ⵈⵈ진짜 너 진국 잡귀구나.

- 욕먹으면 오래 산다고 했다.

- 영체 주제에 오래 살아서 뭐하게!

- 좋잖아. 마성녀 같은 동생도 만나고.

- 야! 베커 장! 진짜 이 잡귀 안 치울 거야?

마음에 안 들면 네가 치워.

절대 사양하지 않을게.

- 너와 묶여 있잖아! 

- 마성녀 동생. 화 풀어. 화내는 모습도 예쁜데 그러다 나 진짜 홀딱 반해.

- 헐ⵈⵈ.

알파닥이 지구에서처럼 혀를 찼다.

“크크큿.”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만 터져 버렸다.

“베커?”

아린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다시 날 봤다.

“아린.”

“네?”

“성질 더러운 성녀도 있는 거 알아? 눈에는 안 보이지만 욕도 찰지게 하고 건방은 하늘을 찌르는 그런 성녀.”

상황을 모면해 보려고 아린에게 농담을 던졌다.

“네ⵈⵈ. 그런 성녀 있어요.”

이런.

아린이 나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 성녀가 있다고?”

“자세히는 모르지만 스승님이 남기신 기묘한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긴 해요.”

“어, 어떤 신을 모시는데?”

“그게ⵈⵈ 마.”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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