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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6장. 혹시 남자친구 있어? (985/1,284)

996장. 혹시 남자친구 있어?

“오랜만입니다. 탑주님.”

“그러게 말입니다. 한 20년은 족히 된 거 같습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마나의 길은 아직도 길기만 한데 세월이 참 빠르게 흐릅니다.”

어느 산 정상의 폐허가 된 요새.

새하얀 마법사 로브를 착용한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눴다.

한쪽은 30대 중반의 멋들어진 금발 청년.

반면 다른 한 명은 새하얀 백발을 한 노인의 모양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물론 그들의 얼굴 표정은 진심이 아니다.

웃고 있지만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각자의 계산은 달랐다.

하루 이틀 얘기가 아닌 과거부터 쭉 그래왔다.

어느 시절에는 서로를 향해 무력을 행사하기도 했으며 어느 날에는 필요에 의해 손을 잡기도 했다.

20년 전 제국 멸망 뒤 황실이 남긴 마법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잠시 서로에 대한 경계를 풀고 동맹을 맺었다.

각 왕국과 고위 귀족 가문들과 힘을 합쳐 뜻하는 바대로 제국의 남아 있던 유산을 차지했다.

평민들은 마법사들을 하나같이 현자라 여기지만 그건 큰 착각이었다.

마법사들 역시 그들 각자의 욕망을 위해 살아가는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다만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다를 뿐.

인간으로서 안고 있는 영원한 과제라 할 수 있는 9서클에 도달하기 위해 끝없는 세월 동안 피나는 노력을 해온 것만은 인정할 만했다.

그리고 지금 마주하고 있는 두 남자는 그 끝에 다다라 있었다.

마탑의 당대 주인들이자 8서클 마법사인 두 사람.

갈기오 마탑의 수장 발몬과 사르칸 마탑주 데오드란이 조우했다.

두 사람은 만남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은밀하게 마법 수정구를 통해 약속을 잡았다.

두 사람의 만남은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큰 파장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이동 마법진을 이용해 접촉했다.

이 사실은 마탑 장로들도 몰랐다.

중요한 일은 이렇게 마탑주들만 따로 만나 해결했다.

“날이 좋습니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탑에만 갇혀 있다 이렇게 한 번씩 바람을 쐬면 더할 나위 좋더군요.”

“우리도 이제 마나의 품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폐허가 된 요새에서 보이는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빨갛고 노랗게 물들어가는 가을 단풍들 너머로 굽이굽이 흐르는 강이 아름답게 보였다.

마수들에게 빼앗긴 과거 인간들의 땅.

동물들과 마수들의 울부짖음이 곳곳에서 간간이 메아리쳐 울렸다.

용감한 사냥꾼이나 용병들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발을 들이는 순간 길을 헤매기 일쑤이고 얼마 못 가 한 끼 식사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마탑 탑주들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인간의 한계라고 알려진 8서클 경지에 오른 상태.

더 이상 위로는 위대한 존재라 불리는 드래곤과 사악한 마족 정도밖에 없다.

수명이 다른 고위 엘프들과도 동급 수준의 마법을 지녔다.

태생이 가진 바 마나가 부족한 인간이지만 인간만의 특별한 마법으로 충분히 극복 가능했다.

위대하다 할 만한 두 명의 절대자가 한가로이 사담을 나누는 자리였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지요. 풀은 뿌리까지 뽑아야 더는 힘을 쓰지 못하니까요.”

“자존심도 상합니다. 그렇게 노력했건만 고작 썩어빠진 황실의 뿌리 한쪽에 망신을 당했으니ⵈⵈ.”

“엘프들과 드워프가 뒤에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베커 장이라는 정체 모를 놈도 수상하고 말입니다.”

“마족일까요?”

“마족은 아닙니다.”

“그럼ⵈⵈ.”

“그러나 그쪽과 연관이 있음이 확실합니다.”

갈기오 마탑의 수장 발몬이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그렇겠지요. 인간이라면 그 나이에 도달하기 어려운 성취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고서클 마검사라니ⵈⵈ.”

“정령도 다룹니다.”

“그래서 잠시 헷갈렸습니다. 정령은 마족들과는 상극인데 어찌 그놈에게 소환됐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특이한 변이종 같습니다.”

“그 말씀은ⵈⵈ.”

“마족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의미지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마법 시전도 말도 안 되게 빠릅니다. 탑주님도 알다시피 마법을 펼치며 물리적 공격을 가하는 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놈은 아무렇지 않게 시동어도 없이 마법을 펼칩니다. 그것도 손에 마력검을 들고서 말입니다.”

“전투에 참가했던 마법사들도 다들 깜짝 놀라더군요.”

“그놈이 문제입니다. 베커 장ⵈⵈ.”

“그렇지요. 베커 장 그놈이 문제입니다.”

두 마탑의 탑주 두 사람은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황실 후손인 아린 황녀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진 실력이 미천했다.

황실에서 남겨준 유산도 별 볼 일 없었다.

그리고 재화만 있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다.

지지하는 귀족과 기사들 같은 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황녀를 뒤에서 도와주는 황실수호공작이라는 자였다.

“하루케우스의 절대반지를 사용하는 자입니다. 만만하게 봤다가 팰트론 국왕도 참살당했습니다.”

“저도 만만히 봤다가 큰 손해를 봤습니다. 장로들을 잃을 뻔했으니까요.”

자라스 백작과 손을 잡고 황제의 뒤통수를 치려다 제대로 쪽팔림을 당한 갈기오 마탑.

포로로 잡힌 장로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피 같은 마력석을 거의 다 토해내야 했다.

베커 장은 인정사정을 두지 않았다.

대부분 마탑과 척을 지지 않기 위해 마법사들을 포로로 잡아도 대우를 해주게 마련이다.

그러나 베커 장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리어 포로 교환 협상 자리에 장로들을 고문하는 장면을 영상구에 담아 보내왔다.

마나를 억압한 채 채찍질과 물고문을 자행했다.

황제를 암살하려던 죄인이라는 죄명을 붙였다.

한 번 협상이 결렬될 때마다 배상금은 올라갔다.

갈기오 마탑은 눈물을 머금고 마력석을 비롯해 여러 가지 마법 물품을 토해냈다.

한 명의 장로를 키워내기 위해 들어가는 물자와 비용은 천문학적이다.

7서클 마법사는 개나 소나 되는 게 아닌 현실을 감안하면 엄청난 손실을 본 셈이다.

“기회가 좋습니다.”

“연맹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국에 복속을 거부하는 왕국과 대귀족들이 곧 화합을 할 것 같습니다. 그때 저희가 도움을 주도록 하죠.”

“그래야죠. 저대로 놔뒀다가는 다시 황실 눈치나 보는 신세로 전락하게 될 겁니다.”

제국이 막강한 힘을 갖고 있을 때 마탑은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아무리 마탑이라 해도 황실에 비하면 일개 그들만의 조직에 불과했다.

황제의 생일을 비롯해 제국의 여러 경축일이면 마탑은 알아서 조공을 보냈다.

자존심으로 살아가는 마법사들에게는 지금 생각해도 치욕의 시절이 아닐 수 없었다.

세금은 면제를 받았지만 거대 권력 앞에서 늘 숨을 죽여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그렇지 않았다.

제국이 사라진 뒤에 어깨를 펴고 자신들의 힘을 한껏 과시해 왔다.

황실 마법이 사라진 뒤 마나에 자질이 있는 마법사들이 마탑으로 몰렸다.

지금 상태대로 몇십 년만 지나면 마탑은 왕국보다 더한 힘을 소유하고 행사하게 될 것이다.

그때를 위해 손을 잡겠다는 두 사람.

“그럼 의견이 일치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귀찮은 제국의 한쪽 뿌리를 이번 기회에 확실히 뽑도록 합시다.”

“베커 장을 척살하고 평화로운 마법의 세계를 건설하도록 합시다.”

두 사람이 눈을 맞췄다.

“제가 아는 실력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이용해 보도록 하죠.”

“저도 아는 곳에 의뢰를 해 놓겠습니다. 그놈들이라면ⵈⵈ 혼자 다니기 좋아하는 놈을 처리하기에 안성맞춤일 겁니다.”

“하하. 그래요. 우리 내기하도록 하죠. 누가 그 녀석을 먼저 없애는지요.”

“그럴까요? 최상급 마력석을 걸까요?”

“그렇게 하도록 하죠. 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그깟 마력석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합의한 걸로 알겠습니다.”

“마나의 이름으로 약속합니다.”

“저도 마나의 이름으로 약속합니다!”

수장들의 의견 합의.

또 다른 거대한 폭풍이 태동하는 순간이다.

***

상상하기를 멈추고 설마를 외치는 귀신.

아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 보며 활짝 웃는다.

주변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에게 다가갔다.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꿀.

- 형님ⵈⵈ. 아니죠? 가면 쓴 저 여황제와 그렇고 그런.

“베커ⵈⵈ. 밖이 춥지 않아요?”

아린이 내 옷을 매만졌다.

달콤한 향기가 코로 파고들었다.

씨익.

입가에 피어나는 자연스런 미소.

“말 타기 좋은 날이야.”

“그래요? 그럼 내일은 저도 같이 갈래요.”

“그럴까?”

“네!”

- 으아아아아! 이 천하의 몹쓸 바람둥이! 지구에서 방금 넘어와놓고 이래도 됩니까! 양심에 안 찔립니까?

응. 안 찔려.

처음에는 나도 여러 상황과 감정의 섞임으로 인해 가책을 좀 받았지만 이제 순수하게 운명을 받아들이게 됐다.

아린은 아직 황권이 단단하게 자리매김하지 못했다.

내가 빠지는 순간 제국의 부활도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몇 년 동안 그녀와 나는 운명공동체이자 동지였다.

그만큼 서로를 신뢰했다.

아린은 엄연히 제국의 황제였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연약한 한 여자였다.

스윽.

아린을 품에 꼭 안았다.

역시 자연스럽게 안겨오는 그녀.

부드러운 아린의 머리칼을 쓸며 매만져줬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나를 잠시간 못 본 것이지만, 나에게는 참으로 오랜만의 재회였다.

- 하아아아. 내가 이계까지 와서 이런 몹쓸 꼴을 봐야 하다니! 신이시여! 제 운명이 너무 가련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제가 전생에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다고 말입니다!!!

귀신이 허공을 올려다보며 한탄에 젖어 울었다.

전혀 마음에 짠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러다가도 아리따운 여인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잡귀.

- 이 상스럽고 잡스런 영혼은 뭐냐?

갑자기 들려오는 이계 알파닥의 목소리.

오랜만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장립을 알아봤다.

- 누구야! 감히 나에게 시비를 거는 이 촌스러운 목소리는!

- 미치겠네. 야! 너 다른 차원에 쓰레기 투기하면 큰 벌 받는 거 몰라? 어서 잡귀 데리고 너희 동네로 꺼져!

- 쓰레기? 그러는 넌 뭔데!

- 그런데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너 몇 살이야!

- 살 만큼 살았거든! 그러는 넌 몇 살인데!

- 7000정도 살았다.

- 7000? 겨우 7000일 정도 산 녀석이 그따위로 반말이야! 앞으로 오빠라고 불러! 

- 7000일이 아니라 년! 7000년!

- 뭐라고ⵈⵈ 녀여연? 7000년?

장립이 7000년이라는 말에 다시 되물었다.

조용하다 싶더니 이곳에서 사고를 친다.

알파닥 정체는 나도 아직 잘 모른다.

나에게 마신이라는 말을 던지고 한참 사라졌던 녀석.

그런데 여자였어?

아직도 알파닥 성별은 구별하기 힘들었다.

여성 같다가도 또 남성 같은 알파닥의 목소리와 행동.

- 혀, 형님 진짭니까? 저 싸가지가 7000년 살았다는 게ⵈⵈ.

죽어서 몸뚱이도 없는 것들끼리 나이가 뭐가 중요하나.

그냥 서로 오빠 동생하고 사이좋게 지내면 될 것을.

- 나 안 죽었거든! 

뭐라고 안 죽어? 그런데 어떻게 다 알고 말하는 거야!

알파닥 혹시 너ⵈⵈ 신이냐?

- 흥! 무지한 인간이 궁금한 것도 많다. 곧 피똥 쌀 녀석이.

뭐라고 피똥?

알파닥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 많이 즐겨라. 발정기 호색 오크 같은 인간 놈아!

- 닥쳐! 너 우리 형님한테 어디서 그따위 망발이야!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 싸가지 없이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맞는 말?

야! 이 잡귀야!

변호해 주는 척하면서 더 신랄한 디스를 퍼붓는 장립.

하여간 오지게 마음에 안 든다.

- 준비해라. 그리고 그 위기의 순간이 지나도 끝난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둬ⵈⵈ 베커 장. 넌ⵈⵈⵈ. 그분께서 선택한 인간이니까. 흐흐흐.

알파닥이 뭔가 숨기는 듯 음흉하게 웃음을 흘렸다.

왠지 오랜만에 기분이 쎄하다.

- 그런데 너ⵈⵈ 진짜 예쁘다. 혹시 남자친구 있어?

어? 잡귀. 너 지금 알파닥이 보여???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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