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5장. 형님 공작이세요?
“아니 갑자기 신녀의 위라니요. 저에게는 과분한ⵈⵈ.”
“거절하겠다는 것이더냐?”
“아, 아닙니다!”
여인은 당황스러웠다.
한국에서 돌아온 직후 근신 처분이 내려졌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징벌이었다.
맡은 일을 처리 못 한 것은 물론이고 도리어 타깃에 의해 발각되어 본국으로 송환됐다.
가문에 돌아와서도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그간 심혈을 기울여 왔던 수행의 경지도 한계에 다다랐다.
고작 후배들을 교육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찾아온 사령의 전갈.
자신을 신녀로 삼겠다는 통보였다.
‘갑작스럽게 왜?’
여인은 의구심에 휩싸였다.
신녀라는 위치는 대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열도에서 신성시하는 유일한 존재를 곁에서 모시는 일을 하는 직분이었다.
일반인들은 모르는 세계지만 사령과 관계된 조직에서는 경사 중의 경사로 여기는 일이었다.
특히 이렇게 신녀가 배출된 가문에는 어마어마한 혜택이 주어졌다.
신녀가 갖는 권위 또한 막강했다.
가장 신성시되는 신적인 존재를 가까이 모셨기에 모두들 신에 비견할 정도로 여기고 대우했다.
그야말로 신분이 하루아침에 수직상승했다.
문제는 신녀가 될 자격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보통 신녀들은 나이가 무척 어릴 때 선발됐다.
여러 가문에서 가장 특출 난 아이들 중심으로 선택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에 반해 여인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살수의 재목으로 키워졌다.
신의 일을 대변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당황하지 말라. 너만 부르는 게 아니다.”
“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사령께서 신녀를 여럿 소집했다. 뭔가ⵈⵈ 큰일을 준비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가주인 아버지의 말에 여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신녀가 되면 일상생활의 자유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에 다시 가고 싶었는데ⵈⵈ.’
한때는 누군가의 정보를 빼앗고 그 타깃을 제거하기 위해 잠입했던 한국.
지금은 매일같이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곳에서 보냈던 시간은 지금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오로지 철모르는 교환학생 신분으로 살았다.
친구가 됐던 이들과 먹었던 순대국은 아직도 입에 침이 돌게 했다.
더욱이 여인의 마음을 훔쳐 간 사내가 그곳에 있다.
고백하지는 못했지만 옆에만 있어도 행복함을 느끼게 해줬던 남자.
“준비하라!”
“하이!”
다다미에 이마를 대며 고개 숙인 여인은 남모를 슬픔을 흘려보냈다.
죽는 순간까지 그녀는 가문을 위한 칼이었고 한낱 부속품이나 진배없었다.
한때의 추억을 간직한 채 평범하게 살아가기에는 이생의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안녕ⵈⵈ. 장태산.’
여인은 마음으로 작별을 고했다.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왠지 슬픔으로 물들 것 같은 예감.
입술을 잘근 깨물며 여인은 오늘도 온전한 자신 내려놓고 타인이 원하는 삶의 길 위에 섰다.
“크크크크ⵈⵈ. 어리석은 쇠탈의 후예여. 너로 인해 모든 신들의 계약은 산산이 깨졌다.”
뭉클뭉클 지독한 향이 가득한 공간.
커다란 두 마리 뱀이 똬리를 튼 벽화 앞에서 사령은 쇳소리 긁는 음성으로 말했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신의 자식이 각성했다.
그동안 수없이 도전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진정한 신의 강림.
신들의 맹약이 깨지자 곧바로 신의 의지가 전달됐다.
“내 가장 강한 아이가 각성했다ⵈⵈ. 전혀 예견치 못한 곳에서 터진 씨앗은 단단하고 크게 자랄 것이니ⵈⵈ 기대하고 있거라. 그녀와 내가 한몸이 되는 순간, 쇠탈의 가면을 뜯어 부숴버릴 것이니ⵈⵈ. 크하하하하하.”
광기에 젖은 쇳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다른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사방이 쇳소리 가득한 음성으로 요동쳤다.
공간 곳곳에 진득하게 녹아 있는 사악한 기운들.
사령과 함께 포악한 광소를 터트렸다.
***
두두두두두두두.
거친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뒤흔들었다.
어느새 가을로 접어든 계절.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밀밭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 혀, 형님! 멈춰 봐요! 도대체 여기가 어디냐니까요!!!
귀신의 절절한 외침을 한참 전부터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녀석과 삼인행을 맺은 이후 처음으로 찾아온 이계.
변한 게 없었다.
지구의 어떤 곳보다 청정하고 맑은 기운이 폐부를 식히고 정화했다.
숨 쉴 때마다 온몸을 충전해 주는 듯한 자연의 향취.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날아갔다.
- 이게 뭡니까! 자동차는! 도시는! 내가 좋아하는 시크한 도시 미녀들과 문벅스 커피숍은 다 어디로 가고 프랑스 깡촌 시골보다 못한 곳이냐고요!
귀신에게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손유리가 있는 러시아 성에서 곧장 이계로 점프했다.
갑자기 바뀌어 버린 환경에 귀신은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성이 빠르게 눈앞에 다가왔다.
활짝 열려 있는 대형 성문 앞에 기사와 병사들이 기치창검을 세우고 수비를 서고 있다.
그동안 제대로 이곳저곳을 털어 기사들의 급이 달라졌다.
- 혀, 형님! 멈춰요! 저분들 우리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잖아요! 정신병자 돈키호테도 아니고 그대로 돌격하면 안 돼요!!!
귀신이 당황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기사와 병사들 모두 정확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성벽 위에도 대형 활이 장전되어 있는 게 보였다.
누가 봐도 살벌한 광경이긴 했다.
두두두두두.
그럼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성문을 향해 직진했다.
오직 아린과 나에게만 허락된 돌진.
처처저저적!
기사와 병사들이 나를 확인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 멈추라고요! 미친 말 새끼 브레이크 밟아요!!!
가볍게 무시하고 그대로 돌진.
“추우우우웅성!”
성문 양옆에 도열한 기사와 병사들이 힘차게 충성을 외쳤다.
황제 아래 단 한 명밖에 없는 황실수호공작.
- 미친! 형님 귀족이세요? 진짜 여기 진짜 중세 시대 맞아요? 저 병사들 갑옷하고 무기 살벌해요! 형님!!!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 대답 좀 해주세요!
귀신이 허공에 둥둥 떠서 뒤쫓아 오며 미친 듯 소리쳤다.
마지막 지구 귀환 시점이 홀로 말 타고 산책 나왔던 때이다.
손유리의 아픔을 위로해 주는 사이 찾아온 이른 아침까지 지박령처럼 꽁꽁 묶여 있던 장립은 억울하다며 눈물을 보였다.
세상에 믿을 인간 하나 없다고 얼마나 눈물을 보이면 울어대던지.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절대 감정적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울고 있는 아이 한 대 더 쥐어박듯 장립을 이끌고 차원 이동을 했다.
설명도 양해도 없는 강제 이동.
살아 있는 생물체는 뱉어내는 차원 이동 루트였기 때문에 육신 없는 영혼의 이동도 가능할지 궁금했었다.
자연스럽게 귀신을 처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귀신도 한세트가 되어 이계로 점핑했다.
귀신아. 보면 몰라? 여기 이계잖아.
- 그러니까요! 보고도 모르니까 문제죠! 형님이 도대체 뭔데 차원 이동을 합니까? 그런 게 가능이나 합니까? 영화에서도 가능한 일을 어떻게 인간인 형님이 할 수 있냐는 겁니다! 이게 상식적이지는 않잖아요!
너 내가 아직도 인간으로 보이냐?
흐흐흐흐.
귀신에게 섬뜩한 웃음을 날려줬다.
- 무, 무섭단 말입니다! 제가 보기보다 겁이 많아요. 총보다 창하고 칼이 더 무서워요! 그리고 저 곳곳에 걸려 있는 이상한 깃발과 표시는 뭡니까! 괜히 쫄리고ⵈⵈ. 보기만 해도 숨이 막혀요.
곳곳에 마련돼 있는 신전을 보고 귀신이 살짝 쫀 거 같다.
그러니까 육신이 있을 때 착하게 살라는 거다.
엄연히 이계의 신도 신이다.
특히 왕성에 들어선 신전은 모두 내가 특별히 선별했다.
정의롭고 공정한 신들만 추려 모셨다.
지구에서나 이곳이나 멋모르고 잡신들 모셨다가는 나라는 물론 패가망신을 면하지 못한다.
- 제가 안 착하게 산 적 있습니까? 시집가는 새색시마냥 매일 조신하게 형님 밑에서 조언자이자 충성심 넘치는 비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새색시?
귀신이 갈수록 입만 산다.
왕궁에서 태어났다면 전형적인 간신배가 됐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두두두두두.
그사이 뻥 뚫린 대로를 달려 내성으로 향했다.
황제 혹은 허락받은 고위 귀족만 다닐 수 있는 대로.
대한민국에서였다면 무슨 특혜냐며 다들 욕바가지를 퍼붓겠지만 이곳은 달랐다.
이곳에서 귀족의 생명은 권위다.
황제 또한 귀족들 중 한 명.
어쩔 수 없이 잘 먹고 잘사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특혜도 마찬가지다.
평민들과 다르다는 걸 보여줘야 진실로 믿고 따라왔다.
여기서 민주화 계몽 운동한다고 하면 백성들에게 뺨 싸대기 맞는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듯 이계 생리에 자연스럽게 나도 동화됐다.
지구에서는 법과 문명에 의지해 살아가는 장태산 변호사로 살고 있지만 이곳에서는ⵈⵈ.
사사삭.
대로 주변으로 이동하는 백성들이 나를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 님 진짜 귀족이세요?
귀신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게 확실하다.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튼튼하고 보기 좋은 말을 타고 대로를 폭풍 질주할 수 있는 이가 현재는 나밖에 없었다.
합리적 추론을 전혀 모르는 장립.
어느새 내성이 시야에 보였다.
은빛 찬란한 갑옷을 착용한 근위기사들과 병사들이 포진해 있는 내성.
배반자 놈들을 처리한 뒤로 경비는 한층 더 강화됐다.
전쟁은 계속 진행 중이다.
팰트론 왕국을 접수한 뒤 내 스타일대로 다스리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왕과 왕세자가 저세상 사람이 됐지만 그렇다고 귀족들 모두가 투항한 건 아니었다.
항전을 택한 놈들이 제법 있었다.
그들을 일일이 찾아내 확실히 불씨를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예상 밖으로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팰트론 왕국 땅은 생각했던 것보다 꽤 넓었다.
불씨도 제거한 마당에 완벽하게 접수해서 안전을 꾀했다.
전쟁의 기운이 후끈 풍겨왔다.
이제는 황실 대 왕국 연합과의 전쟁이 남아 있다.
영지와 영지 정도의 싸움 수준이 아니다.
왕국과 왕국 간의 대규모 전투를 준비 중이다 보니 시간이 필요했다.
수십만 병사들을 먹일 식량을 축적하고 무기를 손질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귀족과 기사들을 상대로 충성 서약을 받는 것도 일이었다.
정보력을 동원해 상대 쪽 전략을 탐색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인공위성이나 정보수집기로 정보를 획득하는 시스템이 전혀 없었다.
공들여 키운 세작이나 정보 길드, 상단 등을 이용해 수작업으로 정보를 획득해 분석해야만 했다.
가볍게 영주성 본진 털이 하듯 치고 빠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말 그대로 국가 간 전쟁.
이동하는 시간만도 몇 달 가까이 걸렸다.
모두 다 철저한 계획이 필요했다.
마법사가 포함된 특별 공격조의 기습 공격에도 대비해야만 한다.
마탑과 척을 진 상태.
욕심 많은 놈들이 제국의 부활을 대놓고 바라지 않았다.
그런 만큼 아린의 안전에도 만반을 기해야 하는 상황.
투항한 귀족들과 기사들 상당수는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면 1년이란 시간이 가는 건 일도 아니다.
처저저적.
근위병들이 내가 나타나자 창을 바로 세우고 자세를 잡았다.
“추우우웅성!”
한 차례 더 울리는 힘찬 함성.
- 와아아아! 분위기 쩝니다. 진짜 형님 이 동네에서 신분이 뭡니까? 귀족은 맞는 것 같은데ⵈⵈ.
귀신이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저 신기한 듯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왕성이라 내성도 컸다.
그대로 말을 타고 직진.
히이이이잉.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해 말을 멈췄다.
“충성!!!”
병사가 다가와 말고삐를 받았다.
타다닥.
망토를 휘날리며 본궁 계단을 올랐다.
- 여기 왕궁이에요? 도대체 이 어마어마한 건축물은ⵈⵈ.
유럽 왕실의 건축물들은 왕성과 비교하면 명함도 못 내밀 저급한 수준이다.
규모와 분위기뿐만 아니라 마법 건축학으로 무장한 왕성은 신비로움 그 자체를 뽐냈다.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처적!
곳곳에서 마주친 경비병들이 무기를 든 채 무언의 경례를 올렸다.
장중했다.
그리고.
“황제 폐하! 베커 장 황실수호공작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장이 내가 왔음을 알렸다.
“들라 하세요.”
그그그그극.
최종 관문의 문이 열렸다.
넓은 집무실에 앉아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던 그녀가 날 보고 활짝 웃는다.
- 혀, 형님 공작이세요? 뭡니까? 화, 황제가 여자. 설마 둘이!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