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9장. 그녀의 위기(3).
“수상하다고?”
- 네! 이사님.
“뭐가 수상해?”
- 아가씨가 들어간 건물에 움직이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입구에 수상한 자들만 경호하고 있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베테랑이 감지된 촉을 알려왔다.
“위치가 어디야?”
- 봉은사 바로 옆 건물입니다. 장태산 투자 회사 건너편입니다.
“뭐라고? 장태산 건물 앞이라고!”
손대균은 깜짝 놀랐다.
강남에 사무실을 낸다고 했던 회주 아들.
우연인지 장태산 회사 건물 앞쪽에 회사를 차린 모양이었다.
‘하필 왜 그곳으로 유리를 부른 거야!’
손대균은 노련한 변호사였다.
그동안 직접 담당한 일이나 로펌에서 처리했던 사건 중에 끔찍한 건들이 꽤 많았다.
특히 남녀 간의 치정으로 인한 폭력 사건이나 이혼문제는 중요한 형사 사건들 중 하나였다.
다른 범죄보다 그 잔혹성과 흉포함이 일반 사건들과는 크게 달랐다.
퍼뜩 지난날 처리했던 그런 종류의 사건들이 떠올랐다.
‘말도 안 돼. 아무리 비상식적 인간이라고 해도 이제 겨우 두 번 본 유리에게 나쁜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좋지 않은 생각들을 애써 부정했지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불길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50년 넘게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체득한 세상 경험.
우발적인 일들은 매일 세상 곳곳에서 벌어졌다.
- 이사님. 뭔가 대책을 세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정돈가?”
- 느낌이 안 좋습니다.
특히 검찰에서 오래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는 정보원은 촉이 남달랐다.
“으음…….”
손대균은 속으로 갈등했다.
회주가 부탁을 빙자해 경고했다.
자신의 아들이 조금 과격하게 굴어도 이해해 달라고 말이다.
만약 여기서 크게 일을 키우면 지시불이행과 다를 바 없었다.
- 결정을 빨리 내리셔야 합니다.
평소와 달리 오늘따라 정보원까지 재촉하고 나섰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기다려. 바로 내가 가겠네.”
- 넵!
로펌에서 거리는 가까웠다.
직접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았다.
아무리 회주 아들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상식은 겸비하고 있을 터.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은 자가 두 번째 만난 유리에게 해를 가할 거라는 상상은 하고 싶지 않았다.
띠릭.
통화가 끝났다.
“그런데 이 찝찝함은 뭐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도 계속되는 개운치 않은 기분에 인상을 쓰는 손대균.
타다닥.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회주 집안과 정혼을 맺었지만 딸을 방치한 건 아니었다.
눈에 넣어도 결코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막내딸 유리.
종종 뜻하지 않게 험한 말을 내뱉기도 했지만 손대균에게는 목숨과 다를 바 없었다.
***
‘더럽고 불결해!’
오광재는 미칠 것 같았다.
머리채를 움켜잡힌 채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손유리가 미웠다.
긴 세월 동안 오로지 자신의 마음속 연인이었던 사람의 배신.
여러 정황상 장태산과 깊은 사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아챘다.
공항에서 볼 때부터 기분이 몹시 불쾌하고 더러웠다.
그간 그가 상상해온 손유리는 순결의 결정체 같은 상징이어야 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온전히 정혼자인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어야 맞았다.
대한민국 법조계의 대표 인사 격인 손씨 집안을 그만큼 믿었다.
아버지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문제가 될 만한 남자와의 과거도 없었다.
장태산이라는 자와 잠깐 썸을 탄 게 전부라고 알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도 물론 찝찝했지만 마음 넓게 넘어갔다.
손유리는 누가 봐도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하지만 공항에서 마주친 손유리는 지금까지 상상해 왔던 모습과 사뭇 달랐다.
자신을 향해 수줍은 미소를 짓는 대신 황망함과 화를 드러내며 당황스러움만 안겨 주었다.
정혼자라 신분을 밝혔음에도 냉대했다.
여자에게 처음으로 그 같은 상처를 받았다.
손유리만 생각하며 그동안 버텨왔던 지난 세월이 분노로 들끓었다.
홧김에 공항에서 만난 낯선 여인과 하룻밤을 보냈다.
그때부터 마음에서 또 다른 속삭임이 들려왔다.
들어본 적 없던 속삭임으로 무척 달콤했다.
욕망이 차올랐다.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면 품고 싶어 욕망이 끓어올랐다.
지금껏 동정이었던 오광재는 이제야 여자를 알았고, 눈을 떴다.
사업을 확장해 돈을 쓸어 담고 싶은 욕심도 함께 고개를 들었다.
누구도 감히 무시하지 못할 권력의 진짜 주인이 되고 싶었다.
장태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스펙을 갖고 있었다.
나름 천재로 인정받아왔던 오광재였기에 자존심에 더욱 상처를 입었다.
압도적이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다.
미국 명문대 입학과 다를 바 없는 한국대 입학은 물론 어린 나이에 사법시험까지 패스했다.
고등학교 시절 주식을 비롯해 여러 금융투자로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렸다.
추정 재산만 해도 3조가 훌쩍 넘었다.
그럼에도 제대로 자산 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 남자를 좋아하는 자신의 여자.
놈의 회사가 있는 맞은편 건물에 사무실을 차렸다.
자신 있었다.
미국에서 배워온 경영기업에 아버지의 능력만 더해지면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아버지의 능력.
타인들은 성자라 추앙했지만 가진 권력이 상상을 뛰어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가 아버지 앞에 고개를 숙였다.
하물며 거대 로펌 주인도 아버지를 조심스러워했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회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처음에는 다소 충격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오광재가 아는 아버지는 누구보다 위대한 성자였다.
그런 아버지 찬스를 이용해 발판을 마련한 오광재.
돈을 퍼부어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로 사무실을 꾸몄다.
미국 월가의 어느 성공한 이의 사무실을 그대로 따라 연출했다.
손유리가 기죽을 거라 생각했다.
최소한 자신의 스케일을 직접 보고 어느 정도 인정하리라 여겼다.
순진한 착각이었다.
남자의 재력이 매력이라 생각하는 일반적인 여자와 성향이 달랐다.
자신을 천박한 자본가 정도로 보고 비웃는 듯한 손유리의 표정.
분노가 차오르고 순식간에 꼭지가 돌았다.
강한 어조로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내뱉었을 때 이성이 끊겼다.
도망치듯 뒤돌아서는 손유리를 막았다.
음성인식으로 문이 통제됐다.
그때 걸려온 장태산의 전화.
거기서 오광재의 눈이 완전히 돌아갔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 사태.
“놔! 이 미친놈아!”
손유리가 미친놈 운운하며 소리쳤다.
“크크크크.”
그 외침에 오광재는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성격변태라도 된 듯 가슴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즐거움이 끌어 올랐다.
와락.
머리채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아아악!”
고통에 손유리가 더 강하게 비명을 터트렸다.
리앤장 로펌의 주인이 손유리의 아버지였지만 오광재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주루루룩.
손유리의 두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이런 거친 손찌검은 처음이었다.
“목선이 아름답군.”
머리채를 단단히 잡은 채 오광재는 왼손으로 손유리의 얼굴을 지나 목덜미를 매만졌다.
부르르르르.
공포와 끔찍한 접촉에 손유리의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사이코들은 반항할수록 더한 쾌감을 느낀다는 걸 책을 통해 접한 적이 있는 손유리.
“더 반항해봐. 널 이렇게 천천히 부셔줄 테니까!”
콰작.
오광재는 구둣발로 바닥에 떨어진 손유리 스마트폰을 밟았다.
“……용서해줄게. 날 풀어줘…….”
손유리는 목이 비틀린 채 힘겹게 말을 꺼냈다.
“부탁하는 자세가 엉망이군. 장인어른이 그렇게 가르쳤나?”
“으윽.”
목에 가해지는 힘 때문에 고통이 밀려왔다.
전혀 배려심이 없는 폭군 변태 오광재.
이제는 눈도 마주칠 수 없었다.
“태산 씨가…… 날 구하러 올 거야…….”
손유리는 한 자락 희망을 놓지 않고 붙잡았다.
“장태산이? 그놈이 신이라도 되는 줄 알아? 후후훗.”
오광재는 무엇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손유리가 이곳에 있음을 장태산이 알 리 없었다.
그리고 찾아온다 해도 소용없었다.
아버지가 보내준 경호원들이 입구를 버젓이 지키고 있다.
손유리 하나쯤 어떻게 해도 아버지의 힘으로 가볍게 무마시킬 수 있었다.
모든 선택권은 자신에게 있었다.
“놔! 날 놔달라고!”
손유리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놔달라고? 그럼 놔줘야지.”
쫘아아악.
머리채를 놓으면서 손으로 뺨을 세차게 가격하는 오광재.
콰다다당.
손유리의 몸이 거칠게 문에 부딪쳤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흐으으윽. 흐흐흑.”
서럽게 울음을 터트린 손유리.
힘으로 상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특히 오광재는 오랜 기간 운동한 듯 몸이 다부졌다.
거기에 더해진 알 수 없는 기운은 사람이 행사할 수 있는 수준의 힘을 넘어섰다.
“닥쳐! 징징거리는 소리 듣기 싫어!”
오광재가 소리쳤다.
“흐윽.”
금세 흐느끼는 소리를 죽이는 손유리.
“그래 그래야 착하지. 귀여운 내 여인아.”
오광재가 무릎을 숙이며 공포에 질린 손유리의 턱을 들어올려 눈을 맞췄다.
숨죽이고 오열하는 손유리를 만족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당신은…… 미쳤어.”
손유리는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오광재의 두 눈을 보며 한마디 했다.
“미쳤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어떡하지. 난 지금 그 어떤 순간보다 행복한데.”
오광재는 손유리의 말에 개의치 않았다.
차라리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손유리의 모습이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복종.
오광재는 지금 자신이 손유리에게 복종을 요구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율적인 대등 관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비에 젖은 새처럼 떠는 손유리가 마음에 더 들었다.
스으윽.
오광재가 손을 뻗었다.
“더러워…… 손 치워.”
이를 악물며 손을 뻗어오는 오광재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군. 그럼 가르쳐 줘야지. 내가 누군지.”
멈추지 않고 손을 뻗어가는 오광재.
“퉤!”
급기야 손유리가 악마 같은 오광재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책에는 사이코를 자극하지 말라는 문구가 있었지만 침이라도 뱉어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스윽 자신의 손으로 얼굴의 침을 닦는 오광재.
“교육이 필요해. 흐흐.”
그리고.
촤아아아앗.
오광재가 거칠게 손유리의 상의 셔츠를 찢었다.
“아아아악!”
손유리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현실에 비명을 질렀다.
손으로 급히 뜯겨진 셔츠를 추스르며 옷섶을 여몄다.
‘태산 씨……!’
손유리는 이젠 끝이라는 마음으로 장태산을 떠올렸다.
눈앞이 캄캄했다.
나침판도 없이 거친 바다를 항해하던 중 맞닥뜨린 거센 폭풍에 휩쓸리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흐흐흐흐흐…….”
진득한 욕망에 물든 오광재의 웃음소리가 소름 끼치게 귓가에 맴돌았다.
“아름다워. 매우.”
오광재는 찢겨진 옷 한 자락을 내던졌다.
그리고는 손유리가 두 손으로 여며 가린 옷섶을 향해 손을 뻗어갔다.
뜨거운 욕망에 사로잡힌 눈동자는 이미 뻘겋게 충혈이 됐다.
이제는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방음도 완벽하게 처리된 한낮 강남 한복판의 건물 최상층 사무실.
손유리를 구해줄 동아줄 같은 건 아무 데도 없었다.
와장창차창.
갑자기 박살나며 사방으로 비산한 유리창이 아니었다면 손유리는 그대로 숨이 멎었을 것이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