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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7장. 그녀의 위기. (976/1,284)

987장. 그녀의 위기.

“아가씨가 방금 학교를 나섰습니다.”

“누굴 만났나?”

“대학 동창과 잠시 만나고 전화를 받은 뒤 급히 이동했습니다.”

“장태산은?”

“청와대에서 나와 학교에 있습니다.”

“둘이 만났나?”

“아닙니다.”

“그럼 지금 유리는 누굴 만나러 가는 거야?”

“위치추적장치 가동 중입니다. 현재 강남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래ⵈⵈ.”

리앤장 이사실에서 손대균은 정보 라인의 보고를 받았다.

손대균은 평소보다 더 예민한 상태였다.

계속되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회주의 부탁은 경고나 다름없었다.

부드러운 어투를 사용했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뼈와 가시가 박혀 있었다.

최근 들어 다시 예전처럼 차갑게 대하긴 했지만 손대균은 딸을 무척 사랑했다.

할아버지 손국중을 빼닮은 아들과 달리 유리는 손대균의 DNA를 타고 나와 순수한 면이 강했다.

그래서 더 평범하게 살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긴 세월 쌓아온 집안의 업이 유리를 향해 불어 닥쳤다.

“이사님. 저ⵈⵈ.”

보고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할 말 있나?”

“ⵈⵈ아가씨 주변에 전문가들이 따라붙어 있습니다.”

“전문가?”

정보 라인을 담당하는 이들은 모두 다 이 바닥에서 뼈가 굵은 베테랑들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전문가는 그 수준의 차원이 달랐다.

“저희들도 겨우 눈치를 챌 정도입니다.”

‘회주가 보냈다!’

손대균은 가슴이 뜨끔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유리까지 회주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절대 섣불리 건들면 안 될 일이었다.

“놔둬.”

“넵!”

“유리를 잘 살펴봐.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알겠습니다.”

“나가봐.”

“쉬십시오.”

정보요원이 나갔다.

“회주ⵈⵈ. 도대체 내 딸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겁니까!”

답답한 듯 창밖을 내다보며 혼잣말로 소리치는 손대균.

이래서 조심하고 또 조심했던 것인데 기어코 사달이 났다.

아버지 때부터 지은 업이 실제 딸에게까지 미쳤다.

인생은 필연보다 우연에 의해 좌우된다지만 업장의 결과물은 결단코 우연이 아니다.

딸의 불행을 막기 위해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러자면 자신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이럴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태산아ⵈⵈ.”

손대균은 또다시 여러 감정이 뒤섞인 음성으로 후배의 이름을 불렀다.

“이 사무실 어떻습니까? 제 스타일대로 뽑았는데 마음에 드십니까?”

‘도대체 이 남자 정체가 뭐야.’

손유리는 강남 소재의 한 빌딩에 도착했다.

대형 건물은 아니지만 수백억 정도는 나갈 만한 곳으로 대로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냥 척 봐도 위치가 좋았다.

시원하게 보이는 봉은사가 눈에 들어왔다.

강남에서도 요지.

그곳 최상층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오광재가 활짝 웃었다.

모던하고 심플한 가운데 묘한 화려함이 조화를 이룬 공간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접하기 힘든 월가 스타일의 인테리어다.

한눈에 보이는 모더니즘 계열 화가들이 남긴 명작들이 걸렸다.

가구들도 반짝이는 게 특성인 고급 스텐 계열로 진열됐다.

하지만 엔틱 스타일을 좋아하는 손유리와 맞지 않았다.

“별롭니까?”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오광재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당당했다.

손유리는 그런 오광재를 가만히 바라봤다.

장난삼아 돈 자랑 하려고 부른 것 같아 보였다.

인간적으로 갈수록 실망감만 커졌다.

그 순간 할아버지가 맺어 놓은 약혼자의 눈에 섬뜩한 광기가 번뜩였다.

“네.”

손유리는 짧게 대답했다.

한 번쯤 만나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공항에서 봤던 오광재는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손유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말들을 연신 내뱉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해도 요즘 같은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혼인 방식이라 인정하던 오광재.

손유리를 전리품처럼 여기는 경향이 짙었다.

그래서 초면임에도 기분이 나빴다.

상대방의 기분 따위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 성품임을 알아봤다.

찬란한 은빛으로 겉은 그럴싸하게 포장했는지 모르지만 안쪽은 칙칙한 쇳빛 같은 남자였다.

옆에 있다가 숨이 막힐 게 뻔했다.

그림 실력이 늘수록 손유리도 기감이 발달해 갔다.

그래서 확실히 해두려 이 만남에 응하기도 했다.

“이런ⵈⵈ 유리 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뜯어고쳐야겠죠.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십니까? 프랑스에서 유학하셨다니 그쪽에 맞출까요?”

오광재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말과 달리 불쾌감이 엿보였다.

부잣집 도련님이 자신의 장난감을 거절한 또래 아이에게 보이는 감정 같았다.

“타인인 제가 굳이 말해야 하나요?”

손유리는 최대한 감정을 빼고 물었다.

모르는 번호로부터 온 전화가 화근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오광재는 그녀의 스케쥴을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했다.

잠깐 갈등했지만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에 초대에 응했다.

장주아를 보기로 했지만 뒤로 미뤘다.

오광재를 깔끔히 정리하지 못하면 계속 예고 없이 이런 식으로 엮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당연하지 않나요? 유리 씨와 함께할 인생인데.”

“오광재 씨!!!”

손유리가 단호한 목소리로 오광재의 이름을 불렀다.

“네. 유리 씨.”

오광재는 날카로운 부름에도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정말 실례인 거 모르세요?”

“뭐가 말입니까?”

“우리 공항에서 처음 봤어요. 그런데 절 진짜 자기 약혼자 취급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안 됩니까?”

“미국에서 대단한 학위를 땄다고 아빠에게 들었어요. 그런 지성이면 지금이 상대에게 얼마나 불쾌하게 받아들여질 만한 상황인지 알 텐데 굳이 더 말해야 하나요?”

“학위와 사랑은 다릅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사랑에는 바보가 되는 법이죠. 저처럼 말입니다.”

오광재는 끄덕하지 않았다.

손유리를 향해 계속 순박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멀쩡하게 생겨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야!’

손유리는 오광재가 보이는 집착이 장난이 아님을 깨달았다.

공부 잘하는 이들의 특징 중 하나가 매서운 집념이었다.

오광재의 눈빛에서 자신에 대한 지독한 관심이 읽혔다.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소름돋았다.

“확실히 매듭짓기 위해서 왔어요.”

“차 먼저 마시죠.”

“됐어요.”

“유리 씨, 제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차가운 매력이 넘칩니다.”

“네?”

“하늘색 수채화 물감처럼 부드러운 줄 알았는데ⵈⵈ. 내면세계는 거친 유화 같은 맛도 있군요. 좋아요.”

좋다고 말하는 오광재를 보며 손유리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말이 통하는 인간이 아니야.’

이곳에 찾아온 게 실수였다.

사무실 구조를 갖췄지만 아직 직원은 한 명도 상주해 있지 않았다.

더욱이 건물을 통으로 사용하는 눈치였다.

자칫 여기서 신변이 위험해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대낮 강남이지만 위험한 남자와 단둘이 한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손유리는 뒤늦게 깨달았다.

“오광재 씨 마음은 어느 정도 알겠어요. 하지만 전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의 약혼은 할 수 없어요. 아무리 할아버지가 약조하고 아빠가 추진한다고 해도 마음에 없는 남자와 평생 살 수 없다고 생각해요.”

손유리는 정확히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그리고 오늘 이후로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광재 씨와 이렇게 한가하게 보낼 시간이 없네요.”

말을 마친 손유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로 말했다면 유치원생도 충분히 알아들을 만한 내용이었다.

“후후훗.”

오광재가 가볍게 웃었다.

“유리 씨가 더 마음에 드는데 어떡하죠?”

“뭐라고요?”

손유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오광재를 바라봤다.

완곡한 거절이 아니라 확실한 의사표현이었다.

“당신 닮은 딸을 낳고 싶어요.”

“!!!”

‘미친놈!’

그만 연락하라는 말에 딸을 낳고 싶다는 대답을 내뱉는 오광재.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지 마세요. 저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영화에서 보면 공부 잘한 엘리트 정신병자는 대부분 엄청난 사이코였다.

“전 어릴 적부터 목표를 세우면 양에 찰 때까지 극한으로 밀어붙였습니다. 미국 유학도 그래서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전액 장학생이었죠.”

오광재가 자신의 성격을 에둘러 이야기했다.

“유리 씨에 대한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사진으로 볼 때부터 사랑에 빠졌습니다. 반드시 유리 씨를 이번 생에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파밧.

손유리를 뜨겁게 바라보는 오광재.

‘진짜 또라이야ⵈⵈ.’

손유리는 광기 젖은 오광재의 눈에 몸을 떨며 한기를 느꼈다.

진짜 위험한 순간이 확실했다.

“저, 가겠어요. 더 이상 보는 일 없기를 바랄게요.”

손유리가 걸음을 옮겼다.

오광재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아직 얘기 안 끝났습니다.”

그때 들려오는 섬뜩한 목소리.

분노가 팽팽하게 담겨 있었다.

“전 끝났어요.”

“그럼 서로 곤란해질 상황이 벌어질 겁니다. 책임질 자신 있습니까?”

파르르르르.

진득한 오광재의 목소리가 자신을 옭아매는 것처럼 느꼈다.

“전 성인이에요ⵈⵈ.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인격체예요. 제 인생은 제가 책임져요.”

“제 말뜻이 그게 아니라는 걸 모르는 분 같지는 않은데ⵈⵈ. 아닌가요?”

오광재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담겼다.

그럴싸하게 포장한 대외용 성격이 본래 성품대로 비뚤어지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스윽.

오광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다닥.

손유리가 걸음을 빨리해 입구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

하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분명 들어올 때 자동으로 열리던 문이었는데 열리지 않았다.

“무, 문 열어요.”

손유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직 얘기가 안 끝났는데 어디를 그렇게 급히 가십니까?”

“전 끝났다고요! 약속이 있어요! 어서 문 열어요!”

손유리가 뾰족하게 소리를 쳤다.

“약속이라ⵈⵈ. 그 자식 만나러 가는 겁니까?”

“ⵈⵈ.”

“맞군요. 장태산.”

“당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지 않나요.”

“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아내가 될 여자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나쁜 놈인데.”

‘이 자식 위험해! 미친놈이 확실해!’

마음 같아서는 문을 부수어버리고 싶었지만 너무 단단했다.

“저기 앞에 건물 보이시죠?”

뒤로 다가온 오광재가 손가락을 뻗어 반대편 왼쪽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는 손유리.

“장태산의 사무실입니다.”

“!!!”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후훗.”

오광재가 사악한 악마처럼 웃었다.

처음에 봤던 젠틀한 이미지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뭐, 뭘 계획하고 있는 거예요! 태산 씨는 아무것도 몰라요!”

손유리가 본능적으로 외쳤다.

“태산 씨라ⵈⵈ. 듣기 별로군요.”

“그를 건드리지 말아요.”

“걱정입니까?”

“아니요. 충고에요.”

“충고라ⵈⵈ.”

“태산 씨는 자기 사람이 다치는 걸 극도로 싫어해요.”

“유리 씨도 장태산의 사람입니까?”

“ⵈⵈ네.”

“이런! 그 말은 굳이 뱉지 않아도 됐었는데. 쯧쯧.”

오광재가 혀를 찼다.

뒤에서 느껴지는 매우 차가운 기운.

라라라~♬ 라라라라라 랄라~♫.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스마트폰 벨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뒤에 서 있는 오광재의 숨결에 몸이 굳어 버렸다.

단지 등 뒤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포가 밀려왔다.

“급한 전화 같은데 받아요.”

스윽.

학교에 가볍게 들른 상황이라 작은 에코 백만 멨다.

그런 손유리의 가방에 마음대로 손을 넣어 스마트폰을 꺼내드는 오광재.

장태산이라는 이름이 떴다.

“문 열어요!!!”

손유리가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오광재와 함께 있는 공간에서 그의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받아! 받으라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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