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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6장. 선생님(2). (975/1,284)

986장. 선생님(2).

“뭐야? 넌 왜 하나도 안 변했어! 이거 반칙 아냐!”

“무슨 소리야. 여기 눈가 주름 안 보여?”

“안 보여! 내 눈에는 바게트빵만 먹고도 미녀가 된 파리지엔느만 보여!”

“칭찬으로 들을게.”

“진짜 반갑다 친구야!”

와락.

오랜만에 모교에 들렀다. 오랜 단짝 친구가 손유리를 격하게 반겼다.

귀국을 하긴 했지만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급하게 들어오느라 프랑스 화실에 모든 걸 놓고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붓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환경에 매우 예민했다.

자기가 평소 작업하던 환경에서 조금만 변화가 일어나도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됐다.

그 점에서 유리도 마찬가지였다.

전에는 그림이 잘 그려졌던 방인데 다시 돌아온 집은 많이 낯설었다.

바뀌어 버린 집안 공기가 집안 분위기까지 다 바꿔놓았다.

병상에 누워 있는 가족들을 돌보느라 밝았던 엄마도 변했다.

안주인의 부재로 집은 텅 빈 공가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갈 곳이 없었다.

몇 년간의 부재로 서울에서 손유리는 외톨이 신세가 됐다.

친했던 강아린도 법조계에 투신하기 시작한 후 바쁜 나날을 보냈다.

꿈꾸던 판사 라인을 탔다.

지방에 내려가지 않고 동부지원에 배정됐다.

아직 햇병아리라 판결문 보조를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매일 자정이 넘어서 퇴근을 했다.

서울에 도착한 후 강아린의 얼굴도 못 본 상태다.

그때 손유리의 귀국 소식을 듣고 대학교 때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대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단짝 친구.

유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한걸음에 학교를 찾았다.

한국대 미대를 졸업하지 못하고 중간에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그곳에서 학부를 마쳤다.

대학원 생활도 프랑스에서 이어갔다.

그런 손유리에게 한국대 미대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한때 야상점퍼를 입고 활보하던 미대.

몇 년의 세월의 지났음에도 변한 게 별로 없었다.

알고 지내던 이들은 이미 대부분 졸업을 했다.

눈앞의 친구처럼 대학원에 진학한 이들은 극소수였다.

“학교 보니까 어때?”

“응?”

“첫사랑 보는 것 같지 않아? 막 설레고 그런 감정 들지?”

“어…….”

“나도 그랬어. 4학년 때 힘들었다. 취직은 성공했지만 학교 떠나기가 싫더라. 엄마도 대학원 마치고 시집이나 가라고 해서 눌러앉았어. 지금 생각해 보면 잘한 결정이야. 취직한 동기들이나 선후배들 보니까 다들 장난 아니더라. 우리 같은 그림쟁이들이 조직생활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먹고 살 만한 집안이 아니면 미술은 독립적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대부분 긴 무명 시절을 거쳐서야 어느 때를 만나 순간 빛을 발한다.

그때까지 어떻게 버티느냐가 바로 부모의 뒤받침에 달려 있었다.

배고픔으로 예술 하던 시절은 다 옛날 얘기였다.

가끔 번뜩이는 천재들이 두각을 보이며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 역시 극소수에 불과했다.

“작품은 많이 했어?”

“요즘 내가 득도해서 뭐가 좀 나온다. 교수님들도 좋다고 하셔. 여기저기 출품도 해서 소소하게 상도 타고.”

“잘했네.”

“그래봤자 프랑스에서 인정받은 너만 하겠냐? 정말 부럽다. 손유리. 너 갈 때 나도 좀 데려가지. 왜 혼자 날랐어!”

“갑자기 그렇게 됐어.”

“너 남자친구랑 부모 피해 도망갔다는 소문까지 났다.”

“내가?”

“너 한창 어울리던 법대생있잖아. 키 크고 엄청 잘생긴 데다 음대와 미대까지 격파하고 다녔던 천재.”

“태산이?”

“맞아! 장태산. 둘이 썸 탔잖아.”

“썸까지야…….”

“됐어. 우리가 바본 줄 알아.”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는 장태산과의 썸 얘기에 손유리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엊그제 얘기 같은데 벌써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장태산 진짜 잘났다. 사시에 일찍 패스했다고 미대까지 소문났잖아. 그리고 여동생들도 한국대 다니잖아.”

“장주아가 우리 후배지 않아?”

“맞아. 주아가 후배지. 그 녀석도 똘똘해. 내가 그래서 착실하게 대학원에서 예뻐해 주고 있어.”

“잘해줘.”

“그런데 너도 주아 알아? 너 프랑스 유학 가고 난 뒤에 입학했는데…….”

“귀국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났어.”

“정말?”

“응.”

“그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던 손유리.

“!!!”

예술대 광장 쪽을 바라보다 순간 그대로 멈췄다.

“왜 그래? 누구 아는 사람……. 어! 저 남자 어디서 많이 봤는데……. 맞아 장태산!”

친구가 멀리 장태산을 알아봤다.

‘누구지?’

장태산은 혼자가 아니었다.

웬 여자가 장태산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여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손유리의 가슴이 순간 아려왔다.

“어! 나 저 여자 알아!”

“누군데?”

“베토벤 여제. 은여현.”

“베토벤 여제?”

“줄리아드 다니다 갑자기 우리 학교로 온 학생이야. 베토벤 전곡을 해석할 줄 안다는 찬사를 받았어. 대학원 과정도 초고속 패스해서 지금 강사가 됐어. 워낙 실력이 빵빵해서 여기저기 오케스트라에서 부르고 난리야.”

“그래…….”

“그런데 두 사람 아는 사인가?”

친구가 손유리보다 더 관심을 보였다.

손유리가 보기에도 두 사람의 모습이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장태산을 보며 눈부신 미소를 화사하게 터트리고 있는 여자.

그렇게 뛰어난 미모는 아니었지만 호감이 절로 가는 인상이었다.

빠아~ 빠바바~♫.

손유리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다.

“여보세요?”

- 유리 씨, 접니다.

“네?”

- 벌써 제 목소리를 잊어버렸습니까? 오광재입니다.

“!!!”

***

- 이 여자 분은 또 누굽니까? 학교에 연애하러 다니셨습니까?

귀신이 난데없는 만남에 고춧가루를 뿌렸다.

나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눈에 들어오는 낯익은 얼굴.

“여현 씨.”

“선생님! 학교에는 어쩐 일이세요?”

베토벤의 사랑 은여현이 활짝 웃었다.

뜻밖의 조우였다.

걷다 보니 예술대였다.

주아도 학교에 와 있어서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걸음했다.

그때 마침 날 발견한 은여현.

“이번 학기에 복학했습니다. 졸업해야죠.”

“그러시구나.”

은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 나이도 비슷한데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좀 그렇습니다.

나에 대해 귀신은 아직도 많은 걸 모르고 있었다.

은여현은 처음 만났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베토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그녀는 불멸의 연인의 현대판 주인공이었다.

“실력 많이 늘었나요?”

“네! 선생님 덕분에.”

은여현이 자신 있게 답했다.

베토벤의 은총이 함께하고 있으니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언제 연주 한번 듣고 싶습니다.”

“시간 나실 때 음대로 절 찾아와 주세요.”

“네?”

“선생님 덕분에…… 강사가 됐어요.”

“정말요! 진짜 대단하십니다!”

한국대 음대 교수 되는 게 만만치 않았다.

시간 강사 자리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웬만한 실력이 아니면 자존심 덩어리인 한국대 교수들이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을 압도적인 실력으로 찍어 눌러줘야 어느 정도 가능했다.

“라이헤르트 교수님이 강력하게 추천해 주셨어요.”

추억의 이름이다.

그와 만났던 짧은 추억이 떠올랐다.

“그렇군요.”

“교수님, 떠나신 건 아시죠?”

“모릅니다.”

“선생님을 기다리다 베를린으로 가셨어요. 만나게 되면 꼭 찾아달라고 하셨어요.”

“그래요?”

“네! 진심으로 기다린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향곡을 완성하겠다며 그 말씀도 전해달라고 했어요.”

라이헤르트 교수라면 그럴 사람이다.

내가 건넨 교향곡을 완벽하게 연주하기 위해서 모든 걸 내려놓았을 라이헤르트.

그의 성장이 기대됐다.

- 형님이 그 정도로 대단한 분이세요?

귀신이 내심 놀라서 묻는다.

은여현의 눈빛에 담겨 있는 존경의 마음은 누가 봐도 남달랐다.

귀신아.

- 넵! 형님!

이제부터 너도 날 선생님이라고 불러라.

내가 말해 놓고도 무안하기는 하다.

아직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었다.

-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나이도 어린 나를 형님으로 모시는 것도 귀신 입장에서는 자존심 많이 내려놓은 일이었다.

사실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도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선생님.”

“네?”

“시간 되시면 커피 한잔하실래요?”

은여현이 기대에 찬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남녀 관계는 아니었다.

그녀는 평생 일편단심 베토벤과 사랑에 빠져 살 것이다.

“오빠!”

그때 주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대에서 나오며 날 발견하고 세차게 손을 흔드는 주아.

“여동생 맞죠?”

“네.”

“미대 교수님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해요. 오빠를 닮아 실력이 대단하다고 말이에요.”

하긴 주아도 실력이 많이 늘었다.

내친김에 교수 시켜 줄 생각이다.

집안에서 한 명쯤 교수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타다닥.

주아가 달려왔다.

대학원생이지만 나에게는 아직 어린 소녀 같은 동생이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주아는 은여현을 보고 깍듯하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예술대는 생각보다 좁았다.

“반가워요.”

“우리 오빠 아세요?”

“그럼요. 장 선생님은 제 인생의 은인이세요.”

“선생님요?”

주아가 날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부우우웅.

그때 내 바로 옆으로 차 한 대가 거칠게 지나갔다.

- 어! 이 익숙한 향수는 뭐지?

그때 귀신이 후각을 발동시키며 벌름거렸다.

익숙한 기운에, 스쳐 지나는 차를 다시 살펴보았다.

“!!!”

그때 보였다.

창문을 열고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멀어져 가는 차량의 주인공.

“오빠. 그런데 유리 언니 못 봤어? 학교엔 온다고 했는데.”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주아.

말없이 멀어지는 차 뒷모습을 바라봤다.

뭔지 모르지만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저절로 인상이 서서히 굳어졌다.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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