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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5장. 선생님. (974/1,284)

985장. 선생님.

“아오! 개자식! 총 있으면 총으로 확 쏴 죽이고 싶어!”

주인 없는 방에서 혼자 분을 삭이는 주순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장태산과 이렇게 엮이면 언제나 마음에 부아가 차고 탈이 났다.

청와대로 놈을 부르면 어느 정도 기가 죽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청와대는 대한민국 권력의 심장부였다.

처음 이곳에 입성하던 날 주순자도 청와대가 풍기는 남다른 포스에 기가 눌렸다.

무겁게 내려앉은 무게감이 살면서 겪었던 것들과는 사뭇 달랐다.

하나같이 총을 소지한 경호원들 모습부터가 낯설었다.

그래서 대통령을 일컫는 다른 말이 단기 제왕인지도 몰랐다.

특히 한국에서 대통령의 권한은 엄청났다.

그런 권좌의 주인이 된 조근영과 그 뒤에 앉아 그녀를 조종하는 주순자.

입성 당시 마음속을 짓눌렀던 무게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자기 손으로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통령 조근영은 청와대를 제 집처럼 생각했다.

그 분위기에 주순자도 긴장이 풀어졌다.

과거 자기 집에서 거주하던 시절처럼 조근영과 한방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넘쳐나는 청와대 예산으로 침대도 새로 들이고 마음에 드는 살림으로 대거 바꿨다.

그리고 기필코 세상 밖에 알려져서는 안 될 비밀도 만들었다.

몰래 먹는 사탕의 달콤함처럼 쾌감이 남달랐다.

모두들 우러러보는 대한민국 권력의 산실에서 벌어지는 저열한 욕망들.

남편의 눈치가 조금 보이긴 했지만 그것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조근영은 주순자의 말만 따르고 신뢰했다.

간단한 일부터 큰일까지 조종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긴긴 세월 동안 주순자의 보필을 받아온 터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했다.

기본적으로 머리는 좋아 준비해 준 연설문을 앵무새처럼 잘 읽긴 했다.

인사 문제에도 적극 개입했다.

상상만 했던 진짜 꿀이 뚝뚝 떨어졌다.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장차관 및 고위 공무원, 국가기관 산하 기관장들이 수두룩했다.

한 자리당 수억씩 오갔다.

충성을 보인 자들에게 몇 자리 내어주고도 자리는 넘쳤다.

전직 대통령의 측근들도 싹 정리됐다.

고맙게도 전통이라며 알아서 스스로들 자리를 넘기고 나갔다.

간간이 눈치 없이 버티는 자들이 있었지만 그들 또한 민정수석을 통해 압력을 넣어 정리했다.

단 몇 달 만에 주순자는 본인의 인맥으로 대한민국 공직 사회를 장악했다.

웬만한 비리는 모두 눈 감았다.

어쩌다 언론에 노출되는 멍청한 자들을 본보기로 삼아 정리하면 그만이었다.

그 뒤부터는 대기업 총수들을 차례로 갈궜다.

결코 돈이 마르지 않는 화수분과 같았다.

과거에는 만나기 어려웠던 그룹 총수들이 돈다발을 들고 청와대로 찾아왔다.

통치자금이라는 명목으로 당당히 챙겼다.

단위가 최소 10억대가 넘었다.

언젠가 조근영 대통령이 자신의 부친 금고에 수백억이 넘는 돈이 들어있다고 말했을 때 믿지 않았다.

현재 화폐 단위로 계산하면 조 단위였다.

그러나 이제는 믿는다.

큼지막한 금고에 현금과 달러, 금괴가 차곡차곡 쌓였다.

누구도 감히 터치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주순자는 무척 대담해졌다.

법인을 세우고 공식적으로 투자를 받았다.

검색이 없는 외교관 행낭을 이용해 달러를 해외로 빼돌렸다.

불법인 것을 알지만 누구도 거역하지 않았다.

몇 번 해당 국가에서 항의가 들어왔지만 달라진 대한민국의 위상으로 일시에 무마시켰다.

물론 보이지 않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당연했다.

자칫 언론에 알려지게 되면 난감할 내용들이 꽤 많았다.

헐값에 해외 자산들을 대거 팔아넘겼다.

물론 냉정하게 말해 국익에 저해되는 일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주순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언제나 사익이 국익보다 먼저인 여자였다.

조근영의 정권 동안 절대 흔들리지 않는 미래 왕국을 설계해 놓아야 했다.

탄탄한 법인과 해외로 빼돌린 자금으로 이생에 영생을 꿈꿨다.

좋은 말로 해서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자는 모두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그러면 하나같이 알아서 모두 무릎을 꿇었다.

주순자는 보이지 않는 대한민국의 실세 중의 실세 여왕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이들 중 단 한 사람만이 주순자를 거부했다.

“장태산! 장태산!!! 으드득.”

주순자가 이를 갈았다.

청와대 초청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도리어 주순자가 주인 같다며 진담 같은 농담을 던졌다.

게다가 이런 분위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까지 지었다.

주순자는 속으로 화가 나면서도 풀이 죽었다.

장태산으로부터 부탁하는 자세가 잘못됐다는 지적까지 몇 차례나 들었다.

누구도 감히 하지 못한 훈계를 대놓고 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유 선생 눈에는 괜찮아 보여?”

“아닌 것 같네요ⵈⵈ.”

“내가 그 자식만 보면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아. 얼마나 얄미운 줄 알아.”

“그렇게 대단한 남자예요?”

“소문 못 들었어?”

“듣긴 들었지만 나이가 너무 어린데ⵈⵈ.”

“요즘 것들은 나이 어린 게 더 영악해. 내가 부른 이유를 다 알고 있었어.”

“그럼 우리 편으로 만드는 건 어때요?”

“우리 편? 장태산 그 자식을?”

“네!”

유선주가 강력한 어조로 권했다.

“안 올 거야.”

“왜요? 그 나이대면 야망이 대단할 때잖아요. 조금만 자극하면ⵈⵈ.”

“유 선생, 장태산 재산이 얼만 줄이나 알아?”

“얼만데요?”

유선주가 귀를 쫑긋 세우며 관심을 보였다.

“최소 이거.”

주순자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300억요? 대단하기는 하지만ⵈⵈ.”

유선주가 보아왔던 성공한 남자들을 떠올려 보면 300억은 돈 축에도 들지 않았다.

강남에서 크게 한 방 터트리면 한순간 1000억 이상을 벌 수도 있었다.

“쯧쯧. 간이 그렇게 작아서야ⵈⵈ.”

“그럼 3000억요? 와우! 엄청나네요.”

유선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십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장태산이 3000억의 자산가라면 대단한 건 사실이었다.

“좀 더.”

“네? 좀 더라면ⵈⵈ. 설마 3조요???”

유선주가 말을 더듬었다.

3조라는 금액은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규모였다.

대기업 회장의 주식 평가액에 버금가는 돈의 규모.

“그것도 대충 밝혀진 재산이 그 정도야.”

주순자가 국정원과 여러 국가기관을 통해 확보한 정보였다.

“!!!”

유선주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인맥도 대단해. 유 선생 못 봤지? 조금 전 내 앞에서 그 자식이ⵈⵈ. 미국 대통령과 통화했어.”

“네???”

“지금 미국은 대통령이 잘 시간이야. 그런데 직통으로 연결됐어. 그게 무슨 의미인 줄은 알지?”

“믿기지가 않아요.”

“그래서 내가 화가 나!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 볼 놈이 아니라는 게 스트레스야! 마음 같아서는 요절을 내고 싶지만ⵈⵈ.”

주순자는 뒷말을 차마 뱉지 못했다.

장태산이 직접 찾아와 면전에서 경고를 했다.

건들지 말라고.

그래서 청와대로 불러 부탁을 한 것이다.

“그럼 제가 한번 나서볼까요?”

“유 선생이?”

“제 주변에 넘쳐나는 여자 인맥들 많잖아요. 저 나이 때 미녀 싫어하는 남자 없어요.”

유선주가 눈동자는 반짝였다.

“그건 그렇지만ⵈⵈ.”

“동영상 같은 거 하나 찍으면 끝나요. 제깟 놈이 대단해 봐야 대한민국에서 발붙이고 살려면 조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겠어요? 분명 가족도 있을 거 아니에요.”

“있지. 양친 부모에 쌍둥이 여동생.”

“그럼 안성맞춤이네요.”

“잘할 자신 있어?”

“소문 안 나게 처리할게요. 저만 믿으세요.”

다들 유선주가 트레이너로서 자질이 뛰어나 청와대에 입성한 줄 안다.

하지만 그녀의 다른 모습은 아무도 몰랐다.

피트니스로 연결된 인맥을 통해 스폰을 주선하는 게 주업무인 유선주.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듯 두 눈이 유난히 빛났다.

잘나고 돈도 많은 장태산.

‘한 번 작업해 볼까?’

유선주는 오랜만에 전의를 불태웠다.

***

- 그 아줌마 눈빛 봤어요? 형님이 침실에 있던 미국 대통령을 깨워서 확약을 받아냈을 때 그 벙찐 얼굴은ⵈⵈ. 흐흐흐.

귀신이 대리만족으로 신났다.

주순자가 부탁한 청을 들어줬다.

어렵지도 않은 부탁이었다.

국익까지 거론할 것도 없었다.

무식한 주순자와 조근영 대통령이 똑똑한 오바마를 만나봐야 할 얘기도 없었다.

사진이나 몇 장 찍고 쓸데없는 말이나 지껄이다가 올 것이다.

오바마 입장에서도 땡큐인 상황이다.

슬슬 김이 빠져나가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이다.

타국 대통령을 만나 수다라도 떨어야 그나마 월급 받는 데 덜 미안할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빚을 만들어 놓았다 생각할 수도 있었다.

날짜도 좋았다.

따로 날을 잡아 줄 것도 없었다.

이동할 때 화장실까지 들고 다닐 만큼 예민한 대통령.

몇 달 뒤가 APEC 기간이다.

그때 둘이 조촐하게 정상회담을 갖기로 날을 잡았다.

충분히 외교라인을 통해서도 가능한 조율이지만 주순자는 나를 다리로 이용했다.

소문을 듣고 나름 확인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리고 두 눈 앞에서 확실히 보여줬다.

주순자와 나의 수준 차이를.

- 그런데 정말 안타깝네요.

뭐가?

귀신의 실망한 부분이 궁금했다.

- 무당삘이 살짝 보이던데 그런 아줌마를 대통령이 정말 따른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그걸 국민들이 알면서도 가만히 있습니까?

국민들은 아직 모른다.

대단한 언론이 눈과 귀를 꽉 막아놓고 있었다.

거대 언론의 병사들인 기레기들이 틈틈이 실드를 쳤다.

막상 자신들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입을 닫았다.

청와대 쪽으로 파견 나간 선배 기자들이 알아서 입단속을 시켰다.

정보에 빠삭하고 눈치 빠른 기레기들이 이런 정황을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대부분 선후배 사이로 엮여 있어 모르기가 더 어려웠다.

그럼에도 입을 닫고 있는 그들.

두툼한 봉투에 눈이 멀어 영혼을 팔아 버린 기자들.

멀지 않아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엘리트로 취급받으며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기자들이 기레기로 추락하며 민족 배신자로 불린다.

어디 가서 기자라는 명함을 내밀면 욕을 먹는 시대가 곧 도래하는 것이다.

모두 다 자업자득.

욕을 먹어도 이미 뇌까지 팔아먹어 뭘 잘못했는지조차 모른다.

저널리즘 같은 건 취직과 동시에 땅에 파묻어 버린 탓이다.

본분을 지켜야 하는 기자가 아닌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소설가들이 된다.

진실에 기반한 사회고발이 아닌 데스크나 사주가 원하는 뉴스를 가공해 창조해 내는 놀라운 능력자들.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걸 그들만 몰랐다.

- 그래도 좋았습니다. 형님 덕분에 대통령이 거주하는 곳도 가보고 차도 마시고.

귀신이 내 눈치를 슬슬 봤다.

자신은 화교지만 난 대한민국 국민이다.

귀신아.

- 넵! 

애 보러 안 가냐?

- 퇴근 후에 가봐야죠. 형님을 보필하는 중요한 임무를 놔두고 어찌 사사로이 가문의 일에 매달리겠습니다.

장립이 요즘 세상사는 걸 제대로 배우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눈치 없던 귀가 많이 업그레이드됐다.

내 옆에서 이것저것 보면서 개안을 한 듯했다.

이대로라면 신이 되어서도 잘 버틸 것 같다.

여차하면 진이 누님 클럽에 취직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그래도 이곳만 못합니다.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궁보다 아직은 순수함이 남아 있는 이 캠퍼스가 주는 낭만이 좋습니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거잖아요.

나도 아쉬웠다.

이제 마지막 학기다.

더 이상 학과 과목을 개설하지 못할 거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제 법학과 동기들 몇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수업이라고 해봐야 별것도 없다.

군대를 마치고 사시 준비 중인 예비역들과 내가 전부였다.

교수님들은 수업보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 토론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차피 사시 준비생들과 학문적 소양을 깊이 나누기에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대학원도 아니고 학부생들에게 가르칠 범위는 정해져 있었다.

사시 준비생들이기에 웬만한 과목 시험 스킬은 교수님들도 범접하기 힘들었다.

공강과 휴강이 반복됐다.

수업 시간에도 자습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커피 한 잔 빼들고 캠퍼스를 거닐었다.

졸업하면 이제 학생 신분이 아니다.

가을이 오고 있는 관악산의 정기를 흠뻑 흡입할 수 있는 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시간을 만끽했다.

“장태산 선생님!!!”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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