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4장. 부탁의 방법(4).
“청와대?”
“주순자가 은밀히 부른 것 같습니다.”
“왜?”
“그게…….”
손대균은 자신의 되물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금세 깨달았다.
주순자는 일송회에서도 터치 못 하는 여자였다.
과거에는 어느 정도 남편이나 다른 권력자들을 통해 말이 먹혔지만 이제는 말 그대로 안하무인이 됐다.
권력의 강력한 단맛에 심각하게 중독됐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잡고 휘두르는지 몰랐으며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도 몰랐다.
도깨비 방망이에 한 번 빠져들면 나중에 치러야 할 대가가 반드시 온다는 걸 그 여자는 알지 못했다.
그런 안하무인 주순자와 만남을 가졌다는 장태산.
‘도대체 뭘 또 꾸미는 거지?’
언제나 누구든 장태산과 엮이게 되면 생각지 못했던 큰 사태가 발생했다.
최대한 리스크를 줄여야 서로가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이 커지고 있었다.
“좀 더 깊이 알아볼까요?”
“민정수석실에 아는 동생이 있다고 했나?”
“검찰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내던 수사관입니다.”
“알아봐.”
“넵!”
“윤병운 수석 성격이 까칠하니까 소문 새나가지 않도록 단속 잘해.”
“조심하겠습니다.”
“나가봐.”
“수고하십시오.”
리앤장의 핵심 정보원이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태산이가 위험한 폭탄을 왜 가까이 하려는지 모르겠군.”
일송회에서도 서서히 다음 대 권력에 대해 말이 나왔다.
처음에는 말이 잘 통할 것 같았던 주순자와 조근영 대통령.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일방적인 폭주가 시작됐다.
억눌렸던 욕망을 터트리기라도 하듯 폭주하는 둘의 행보가 참으로 어리석었다.
그 밑에 있는 놈들도 비슷한 부류들로 구성됐다.
“둘이 만약 손을 잡는다면…….”
위험한 시나리오가 예상됐다.
무식하게 폭주하는 무식한 아줌마와 속을 알 수 없는 대형 자본가의 만남.
일송회에 엄청난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 해도 회주가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대통령도 갈아치울 수 있는 사내였다.
띠리리리리리리.
스마트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손대균이 긴장했다.
띠릭.
“회주님.”
- 오! 손 장로님! 많이 바쁘시죠?
회주는 사람 좋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닙니다.”
- 묻는 게 바보스러운 질문이죠. 손 장로님이 회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걸 다 아는 마당인데. 하하하.
회주의 목소리에서 생기가 느껴졌다.
“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영광일 뿐입니다.”
- 감사합니다. 손 장로님 같은 분이 있어 일송회의 앞날이 밝아요.
짧은 인사치레가 오고 갔다.
‘그냥 전화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손대균은 회주에게 무언가 목적이 있음을 눈치챘다.
평소 지금처럼 가볍게 안부를 묻기 위해 통화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 다름이 아니라 부탁이 있어서 말이에요.
“하명하십시오.”
- 우리 아들이 본격적으로 사업을 해보겠다고 합니다.
“아드님이요?”
- 그래서 이것저것 법률적 조언이 필요합니다. 리앤장에서 도와주세요.
“물론입니다.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 아직 어린 녀석입니다.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양해하고 이끌어 주세요.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 그래야죠. 우리가 남도 아니고…….
회주가 의미심장한 말로 말끝을 흐렸다.
“맞습니다. 저희가 남은 아니죠.”
- 유리 양 전화번호를 아들 녀석에게 줬습니다. 괜찮죠?
“잘하셨습니다.”
- 우리 의견과 달리 요즘 젊은 것들이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뒤로 물러나 지켜보도록 하죠. 정 마음에 안 들면 그때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습니다.
“딸자식으로 인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손대균은 전화기를 들고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회주를 상대할 때면 본능적으로 몸이 긴장했다.
공간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치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리앤장 안에도 그의 끄나풀이 있을 터였다.
그런 만큼 행동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 손 장로님.
“넵 회주님.”
- 혹시라도 말이에요. 우리 아들이 조금 과격하게 나가더라도 이해해주세요. 애가 누굴 닮았는지 가끔 성격이 욱할 때가 있어요.
“네?”
- 심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 그렇게 알고 계세요.
협박이 분명한 것 같은 부탁.
“……알겠습니다.”
손대균은 다소 불편해진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회주의 말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모른다면 바보였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어도 지금 같은 상황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무리 손녀를 예뻐했어도 회주를 위해서라면 유리의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시집을 보냈을 게 뻔했다.
뭔지 모를 회주에 대한 지독한 공포.
손대균도 아버지로부터 절대복종하라는 말만 들었다.
- 그래요. 그럼 우리 아들 잘 부탁하고 이만 끊습니다.
“들어가십시오.”
- 아! 그리고 장태산 때문에 너무 머리 아파하지 마세요. 주순자와 만나봐야 별것 없어요.
“!!!”
손대균은 자신보다 빠르게 회주가 이미 정보를 접했음을 알았다.
대한민국에 거미줄처럼 깔려 있는 회주의 정보 네트워크가 한 수 위였다는 걸 깜빡했다.
- 수고해요. 그럼.
띠릭.
통화가 끝났다.
“휴우.”
짧은 한숨을 내쉬며 손대균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태산아…….”
그리고 여러 감정이 뒤섞인 채 후배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
- 저 아줌마가 권력 실세예요? 제가 보기에는 그냥 욕심 많은 동네 아줌마 같은데…….
귀신이 주순자를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귀신만 그런 게 아니다.
나중에 주순자의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 국민들 대다수가 귀신 같은 반응을 보인다.
특출나게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화려한 경력도 없는 평범한 아줌마.
그런 그녀가 대한민국을 뒤에서 통치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어졌다.
아파트 부녀회장 자리도 감당하기 벅차 보이는 성질 더러운 아줌마에 불과했다.
그러면서도 저렇게 나이를 먹고도 남자는 무지하게 밝혔다.
호빠 선수들과 뿌린 염문만 해도 장난 아니었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피식 웃으며 답했다.
청와대 주인이자 대한민국의 리더가 거주하는 곳에 날 불렀다.
막상 장본인인 대통령은 얼굴도 안 보였다.
공무원인 청와대 경비 경찰과 경호원들도 애써 나를 모른 척했다.
이것만 봐도 주순자가 이곳에서 부리는 패악질이 장난 아니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판이 된 공직기강.
가장 윗물인 청와대가 똥물이 되었으니 아래쪽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장태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뭐가 말입니까?”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인데. VIP께서 부탁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널 부른 거야.”
주순자가 얼굴색을 감추고 꼬리를 말았다.
“믿어 드리죠.”
“믿어 드리죠가 아니라 사실이야!”
“네네.”
여유롭게 받아쳤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스르릇.
문이 열리며 전생에 TV에서 많이 봤던 여자가 쟁반에 차를 들고 들어왔다.
“차를 준비했습니다.”
“놓고 가.”
“네.”
고개를 숙이며 나가는 와중에 나를 짧게 스캔하는 것을 잊지 않는 그녀.
일개 트레이너임에도 3급 공무원이 된 유명한 그녀의 얼굴을 직접 보게 됐다.
- 이분들 뭐죠? 이 진한 사기꾼 냄새는…….
귀신은 갈수록 영특해졌다.
대한민국 국민들을 상대로 단체로 사기를 처먹은 이들이다.
“잘 마시겠습니다.”
예의상 인사를 건네줬다.
“별 말씀을요.”
유선주가 웃는다.
나도 웃어줬다.
앞으로 몇 년 뒤면 혹독하게 대가를 치러야 할 그녀의 미래를 애도하면서.
“장태산. 부탁 하나 하자.”
유선주가 들어왔던 문으로 나갔다.
주순자가 본격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말씀해 보십시오. 평범한 시민을 청와대까지 불러 기를 죽이면서 부탁할 일이 무엇인지 저도 궁금합니다.”
- 형님이 기가 죽기는 합니까? 흐흐흐.
내 말에 입술을 깨무는 주순자.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내가 얄미운 것이다.
그러나 뻔히 그녀의 수가 다 보였다.
다른 이들이라면 바짝 쫄았겠지만 난 아니다.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러시아 차르, 중국 공산당 인사들까지 만났다.
인도 총리와도 인연이 깊다.
거기에 세상을 지배하는 진정한 숨은 주인과도 뽀뽀한 사이다.
“너 정말 재수 없는 거 알아?”
“피차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야!”
주순자의 성질머리는 겪으면 겪을수록 진짜 개떡 같다.
“주순자 씨, 내가 부탁할 때는 어떤 자세로 말하라고 했죠?”
차갑고 냉담한 목소리라 다시 한 번 전에 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으득.
입술을 피가 날 만큼 잘근 깨무는 주순자.
“정중하게 상냥함을 담아서.”
배운 게 없는 아줌마에게 웃는 얼굴로 세상 제대로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
“부탁 하나 하자…….”
주순자가 성질을 죽이며 입을 열었다.
“저 돈 없습니다. 다른 이들한테 하는 것처럼 나한테 삥 뜯을 생각 마십시오.”
“내가 깡패야? 삥 뜯게!”
지금도 뜯고 있으면서 본인만 몰랐다.
“말해 보십시오. 무슨 부탁을 들어드리면 됩니까? 시간이 많지 않아요. 저 아직 학생인 거 아시죠? 오후에 강의 있습니다.”
“…….”
느긋한 내 말투에 나를 지그시 노려보는 주순자.
“미국 대통령하고 친하지?”
“오바마 대통령요?”
“그래.”
“어느 정도 말은 통합니다.”
갑작스럽게 미국 대통령을 언급하는 주순자.
“주선해 봐.”
“뭘요? 소개팅요?”
“지금 나랑 장난해?”
“구체적인 주어가 빠졌지 않습니까. 요즘은 주어 빠지면 다들 못 알아들어요.”
전직 대통령을 비하하느라 만들어진 주어가 없는 말.
국민들을 어리석은 바보 정도로 알고 있는 정치인들이 세상에 많았다.
“국익을 위해서라고 말했잖아.”
“어떤 국익요? 사면초가에 몰린 대통령과 정권을 위해 단독 정상회담이라도 주선해 달라는 겁니까?”
“!!!”
주순자가 깜짝 놀랐다.
머리가 나쁘니 조금만 추측하면 될 내용을 빙빙 돌려서 말했다.
조근영 대통령은 오월호 사태로 위기에 봉착해 있다.
자신의 부끄러운 치부를 감추기 위해 무리하게 사건을 덮으려다 자꾸 일이 커졌다.
그걸 보호한답시고 영혼을 판 정치 사냥개들과 기레기 언론들이 앞장서 나섰다.
똥오줌도 못 가리는 영혼 없는 이들을 인터넷 전사로 투입하면서 말이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그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가능해? 정말?”
주순자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목적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리는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연히 가능하죠. 지금이라도 해줘요?”
“그래! 부탁해!”
주순자는 애가 탔다.
자기가 생각해도 위기를 돌파할 만한 획기적 기획이 분명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짜로요?”
씨익 웃으며 되물었다.
“……말해봐. 내가 웬만한 건 다 들어 줄 테니까.”
- 형님, 확 땡기세요!!!
귀신도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알았다.
“그럼 제 조건은…….”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