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9장. 새로운 계절. (968/1,284)

979장. 새로운 계절.

“임신? 확실해?”

“산부인과 컴퓨터를 해킹했습니다. 확실합니다.”

“피가 뜨거울 나이지만 의외군.”

리장창은 제갈유량의 보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립이 이렇게 큰 사고를 칠 줄은 몰랐다. 그가 기억하는 장립은 어리지만 젠틀하고 어른스러웠다.

장립 같은 거물들은 늘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홍콩과 베이다이허에서 엮인 여인들만 해도 수두룩했다.

그녀들은 장립을 잡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썼다.

하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장립은 자신의 행동과 사생활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단박에 중국 핵심 권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지만 장립은 단호하게 거부했었다.

그런 장립이 의외의 장소인 한국에서 사고를 쳤다.

머문 기간도 길지 않았다.

술집에서 만난 여인과 하룻밤을 즐기는가 싶더니 졸지에 애 아빠가 됐다.

“이름은 서유나. 미모가 제법이고 한국 명문대를 나왔지만 집안은 별 볼 일 없습니다. 다른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것 같은데…….”

제갈유량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끌렸을 수도 있어. 평범한 것도 매력 중 하나니까.”

리장창은 다른 해석을 내놨다.

그는 손에 꼽히는 화려한 미모의 여인을 아내로 만났지만 막상 결혼 생활 내내 행복하지 않았다.

가끔 평범한 삶을 꿈꾸기도 했다.

중국몽을 위해 일생을 바쳐 살아왔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매일 전쟁이 벌어졌다.

다른 이들처럼 평범한 일상이 허락되지 않았다.

“경호가 더 철저해졌습니다.”

“장태산도 알고 있겠지.”

“홍콩으로 데려와야 하지 않을까요?”

“누구를?”

“장립의 아이를 가진 여자 말입니다.”

“자네 같으면 데려오겠나?”

“……그래도.”

“힘으로 끌고 온다면 손해가 막심해. 그냥 놔둬. 내 생각에는 미국으로 아이 엄마를 데려갈 것 같네.”

리장창은 장립의 수를 자신의 입장에서 읽었다.

중국 권력 핵심에 접근한 장립이 홍콩에 터전을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홍콩은 은밀히 중국 통제에 들어오고 있었다.

반환 후 50년간 법과 자치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사실 누구도 믿지 않았다.

영국을 비롯한 미국 같은 서방 국가들이 반발하고 나오겠지만 서서히 홍콩의 자유를 억압할 것이다.

본토에서 은밀하게 인민들이 홍콩으로 이주 중이다.

본래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법이다.

티벳과 위구르 지역처럼 한족이 서서히 진출하면 모든 게 끝난다.

앞으로 10년 안에 홍콩은 지금까지 누려온 자유의 상당 부분을 헌납하게 될 것이다.

지금도 언론 자유를 빙자해 천안문 추모를 벌이는 홍콩.

중국 위정자들에게 있어 눈엣가시 같은 처지였다.

본토의 다른 인민들과 달리 너무 과도한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스스로 피를 흘리지 않고 누리게 된 자유.

공산당의 매서운 계략 앞에서는 허망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머물지는 않겠죠?”

“당연하지. 장립은 바보가 아니야. 장태산과 계약 문제로 어쩔 수 없이 만났지만 장립에게는 중국인의 피가 흘러. 당연히 형제같이 지낼 수가 없지. 적당히 치고 빠질 거야.”

리장창은 장립에 대해 확신을 가졌다.

한때는 장태산과 동일 인물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했지만 모든 게 명명백백 밝혀졌다.

장립과 장태산은 분명한 독립체로 따로 움직였다.

장태산도 지금처럼 중국을 멀리하면서 사업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분명 사업 대리자 장립을 통해 중국에 진출하고자 할 것이다.

“엘자 쪽에서 연락이 계속 옵니다.”

“누구라고 했지?”

“고선택 전무라는 자입니다.”

“엘자그룹 회장과 사촌이라고 하지 않았나?”

“권력에 피붙이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조건은?”

“저희 쪽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했습니다. 장태산과 계약이 이뤄지면 중요 설계도 내부 자료를 보내주겠답니다.”

“그게 다야?”

“중국 투자자들이 보유한 엘자 주식에서 자기 손을 들어 달라 요구했습니다.”

“흐흐. 내부투쟁만큼 멍청한 게 없지.”

“어부지리를 노릴 수 있습니다.”

“아직도 한국 기업에 빼먹을 게 많다. 디스플레이와 반도체, 배터리 분야에서는 강국이야.”

“쟁쟁한 한국 그룹들의 핵심이죠.”

“디스플레이 쪽은 앞으로 5년이면 된다고 했나?”

“핵심 인재들을 상당수 포섭했습니다. LCD 쪽은 거의 다 끝났습니다. 공장을 가동하고 수율이 안정화되면 한국 기업들은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대로 돌려줘야지. 과거 한국 놈들이 일본에 했던 그대로 우리도 후려치는 거야. 싼값에 시장을 야금야금 점령하면서 어느 순간 목덜미를 확 물어야지!”

리장창의 눈동자에 비열함이 넘실거렸다.

한때는 기술 강국으로 불렸던 한국을 거의 다 따라잡았다.

이제 몇몇 분야만 잡아먹으면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한 번 무너지면 다시 일어날 수 없는 무한경쟁 산업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다.

일본도 한국에 잡혀 쟁쟁하던 기업들이 파산하거나 지금까지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엘자 쪽에는 뭐라고 할까요?”

“구체적으로 조건을 더 제시해 봐. 놈들이 우리 영토에 완성하고 있는 모든 공장들……. 5년 안에 모조리 수중에 넣는다!”

“넵!”

리장창의 선언에 제갈유량이 힘차게 답했다.

서서히 완성되어 가는 중국몽.

일대일로 사업은 순풍에 돛 단 듯 쭉쭉 뻗어나갔다.

천문학적으로 벌어들인 외환으로 중국 곳곳을 개발하고 내수시장을 키웠다.

전 세계가 미국이 아닌 중국 중심으로 판이 옮겨지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인심 좋은 인권 대통령 노릇이나 하고 있는 오바마.

이제 그들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이룰 날이 멀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시작될 진정한 중국몽.

모든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무소불위 황제 국가가 탄생하게 될 것이다.

***

“쌍둥이라……. 능력도 좋으셔.”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는 상황이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애를 덥석 안겨줬다.

삼신할머니가 안 보이는 수를 썼다.

뭔지 몰라도 임성철 회장의 쌍둥이가 국가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다섯별은 또 뭐야? 내가 결혼하면 애를 다섯을 주겠다는 소리겠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너무 꿈이 크십니다.”

내 이름 태산처럼,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가족을 만든다면 그들은 내 아킬레스건이 될 것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로도 벅찼다.

중국과는 휴전 기간이지만 언제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몰랐다.

또 국내에서는 일송회가 호시탐탐 어둠 속에서 날 노렸다.

회주의 진정한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음흉한 일본 놈들도 틈만 나면 뒤통수를 치려고 만반의 준비 중이다.

미국 정부 또한 자국 이익 중심으로 나라를 움직이고 있다.

야훼는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조금이라도 약점을 보이게 되면 쓰러뜨리려는 적들이 도처에 널렸다.

최대한 방어하면서 선수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노려야 했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나밖에 없다더니 바로 쌍둥이를 보러 가다니……. 세상에 믿을 귀신 하나도 없어.”

옆에서 매일같이 아부하던 잡귀는 임성철 회장을 따라나섰다.

지박령과 비슷한 기운으로 나와 임성철 회장과의 일정 거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장립 귀신.

이미 태중에 든 쌍둥이들을 자기 자식이라 여겼다.

누가 뭐라고 해도 어차피 장씨 성을 따라야 한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임성철 회장과도 합의를 봤다.

“문제는 앞으로야.”

임성철 회장도 인간이다.

몸이 젊어지자 마음도 똑같은 에너지를 띠고 움직였다.

한마디로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를 신고 살아가고 있었다.

12시가 되면 마법에서 풀려나야 할 임성철 회장.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그래도 예견치 못했던 신데렐라의 운명은 화살을 쏘아 올렸다.

그들의 운명이 비극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에게 주어진 책무가 참으로 막중했다.

“오정 식구들이 알면…… 뒤집어지겠지.”

세상에 어떤 자식들도 자신들에게 이복동생이 생기는 걸 반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오정 같은 그룹에서는 지분 문제로 복잡하게 얽히게 돼 있으니 더욱 그랬다.

재산 싸움 정도가 아니라 전쟁이 벌어질 터.

알려져서 좋을 게 없었다.

임윤아에게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칠 생각이다.

오직 관련된 신들과 나, 임성철 회장만 알아야 한다.

“임준형 부회장도 안타깝군.”

임성철 회장이 큰 사고를 치는 와중에 장성한 아들 또한 평범하게 살지 못하고 있었다.

권력을 잡은 평범한 아줌마가 사고를 크게 치기 시작했다.

나중에 국가를 전 세계의 비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주순자.

그녀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공무원의 기강이 무너지고 있었다.

가장 윗대가리인 대통령이 허수아비 신세가 돼 버리자 간신배들이 날뛰었다.

고위 공직자들은 잇속을 챙기기에 바빴다.

다수 여당인 국회의원들도 이권에 눈이 돌아갔다.

공무원들은 복지부동에 빠졌다.

검찰과 법원도 제대로 썩어들어 갔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곳곳에서 구린내가 진동했다.

깨어 있는 시민들 중심으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채 갔다.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할 권력 집단이 상왕이나 귀족 행세를 하기에 이르렀다.

억울한 이들의 곡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누구 하나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

야당도 무기력에 빠졌다.

세뇌된 다수의 지지층이 대통령의 든든한 배경이 됐다.

“하아.”

한 번 겪은 일임에도 짧은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시간 추는 생각보다 느리게 흘러갔다.

통장에 돈은 차곡차곡 잘 쌓여가고 있었다.

본격적인 전쟁을 위한 총알인 셈이다.

핵폭탄의 등장 이후로 무력은 의미가 퇴색됐다.

남아 있는 건 무한 경제전쟁.

그 서막이 멀지 않아 포문을 열 것이다.

FTA 아래서 추진됐던 각종 자유 경제 무역 협상 역시 의미가 퇴색되어 간다.

빈익빈 부익부처럼 강하고 부유한 국가만이 살아남게 된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수십 년 동안 쌓아왔던 기술 강국으로써의 이점이 사라질 것이다.

“먼저 졸업부터 하고.”

변호사 자격증이 있긴 하지만 학교 졸업장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학생 신분이라는 타이틀을 버리는 게 아쉬웠다.

지난 생에는 제대로 즐겨보지 못했던 학창 시절이다.

회귀한 이후도 바쁘게 보내긴 마찬가지.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며 폭풍처럼 이십대 초반이 지나갔다.

후반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점점 거세지는 폭풍의 계절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역사들이 휘몰아쳐 올 것이다.

수면 아래 감춰졌던 더러운 것들의 폭발.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이다.

진정한 선과 악의 정체가 어떤 모습을 띠었는지를.

“아유라 땡 잡았어. 내 덕분에 양 말고 젖소도 많이 키우고 말이야.”

2020년까지 가끔씩 언론에 등장했던 서양유업은 뿌리째 흔들렸다.

자신들의 주제를 파악 못 하고 함부로 나에게 덤볐다.

뿌린 대로 업의 씨앗이 싹을 틔웠다.

불같은 여론에 정치권은 몸을 사렸다.

신태주가 소유했던 전자 장부를 한껏 활용했다.

권력자들 몇몇을 골라 협박 메일도 보냈다.

서양유업에 지원하게 되면 그대로 장부 내용을 밖에 뿌릴 거라고 경고했다.

은행권이 대출을 막았다.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해 자금 조달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타이밍을 노렸다.

사채 시장도 허 대부를 통해 조종했다.

기업은 흑자였지만 부도가 예정됐다.

유제품도 함께 취급하고 있는 오양식품에 서양유업을 넘길 생각이다.

자잘한 기업들까지 경영하기는 무리가 됐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새싹들이 먹는 분유를 공급하는 것이다.

나름 정직하다 평가를 받는 오양식품이었기에 믿을 만했다.

아유라가 본격적으로 경영에 투입됐다.

그녀를 코치하면 승승장구할 게 자명했다.

뿌리를 튼튼하게 키워야 한다.

값싼 노동력으로 경쟁하던 사업은 대한민국과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다.

“임성철 회장님, 행복하십시오.”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고 싶어 하는 행위는 생명체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이다.

진심을 다해 축복을 빌었다.

“이제 가을이구나.”

밤이 깊어갔다.

차가운 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간간이 들어왔다.

새로운 계절이 찾아왔다.

띠리리리리.

그때 적막을 깨고 벨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이름이 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의원님. 오랜만입니다.”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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