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8장. 대부의 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서유나 사표 냈대.”
“사표? 갑자기 왜?”
“몰라. 그런데 회장님까지 나서서 말렸대.”
“회장님까지? 왜?”
“그게 말이야ⵈⵈ. 서유나랑 인연 있는 남자가 외국계 엄청난 거물이래.”
“외국인이야?”
“화교래.”
“돈 엄청 많겠네?”
“얼굴도 잘생겼대. 비서실 직원들이 봤는데 나이도 젊고.”
“그런데 서유나가 왜 사표를 내? 회사 어렵게 들어왔잖아?”
“홍문수 대리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잖아. 같이 있으면 불편하지.”
“홍문수 대리 다시 봤어. 사내에서 그러면 돼? 권력을 위해 사랑을 버리다니ⵈⵈ.”
“머리 좋은 남자들 대부분 그렇잖아. 고지아 집안이 빵빵하잖아.”
“고지아가 더 밥맛이야.”
“낙하산이라는 설이 파다해.”
“고씨 패밀리잖아. 고선택 전무님 지분도 만만치 않고.”
“그래서 난 싫어.”
“맞아. 고지아ⵈⵈ. 일 처리 완전 엉망이래.”
“불공평한 세상. 우리 같은 평민들은 닥치고 일이나 해야지.”
여직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휴게실.
엘자그룹 본사 여직원 몇몇이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사내 소문을 물어 나르는 매개체 중의 한 곳.
며칠 전 사표를 낸 서유나에 대한 소문이 쫙 돌아 있는 상태다.
“그런데 서유나 임신한 거 아냐?”
“임신? 왜?”
“나 어제 화장실에서 봤는데 입덧하는 거 같던데.”
“어! 언니도 봤어? 나도 봤는데!”
“그럼 확실하네! 임신 맞아.”
“세상에ⵈⵈ.”
서로 정보를 교환하던 중에 임신 사실까지 확인하게 된 여직원들.
‘임신?’
일이 귀찮아 생리통을 핑계로 수면실에 누워 있던 고지아가 직원들 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 인상을 썼다.
자신이 뒷담화 대상이 된 지 오래인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홍문수를 차지하기 위해 스스로 자처한 일이었다.
직접 귀로 듣고 있으려니 기분은 나빴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옛날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말이다.
한때는 사람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상처를 받았지만 지금은 훈장으로 여겼다.
잘난 집안에서 태어난 데다 잘나가는 아빠를 둔 덕에 벌어진 일이다.
어차피 저들과는 세상으로 향하는 출발선이 달랐다.
백날 뒤에서 까봐야 저들의 인생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그런데 애 아빠는 누굴까?”
“그러게ⵈⵈ 홍문수 대리님? 그것도 아니면ⵈⵈ. 그 남자?”
“흐흐흐. 고지아 쌤통이네. 연애하자마자 애 아빠와 사귀게 되었으니.”
“어머머머. 정말 그렇네.”
“이 기쁜 소식을 가서 널리 퍼트려라. 나의 키보드 전사들아!”
“오늘 오후 채팅방 난리 나겠네.”
“호호호호호, 내가 1빠 해야지.”
신이 난 여자 직원들이 활기 넘치게 웃었다.
“아가리 그만 좀 닥쳐주면 안 될까?”
그때 고지아가 커튼을 활짝 열고 나왔다.
“!!!”
흠칫 놀란 여직원들.
“총무팀, 인사팀ⵈⵈ. 곳곳에서 모였네. 나 씹고도 당신들 앞날이 편할 줄 알아?”
직급은 고지아가 더 낮았지만 거침없이 반말로 내깔렸다.
“아니 그게ⵈⵈ.”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나 먼저 갈게.”
“언니! 같이 가요!”
화들짝 놀란 여직원들이 하나둘 부리나케 도망을 갔다.
순간 적막에 싸인 여직원 휴게실.
“짜증나. 이게 다 서유나 그 계집애 때문이야!”
고지아가 두 눈에서 독기를 뿜어냈다.
입사 때부터 늘상 자신과 비교되었던 서유나.
퇴사하는 순간까지 말썽이었다.
“내가 왜?”
그 순간 고지아 뒤쪽에서 나타난 서유나.
“뭐ⵈⵈ야! 깜짝 놀랐잖아!”
고지아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묻잖아. 내가 널 왜 짜증나게 만들었냐고.”
‘어라? 오늘따라 뭐 이렇게 빳빳하게 나와.’
고지아는 서유나의 다소 바뀐 듯한 분위기를 금방 알아챘다.
과거에는 눈만 마주치면 피하기 바빴던 서유나였다.
그런데 오늘은 분위기가 몹시 달랐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당당하게 고지아를 응시했다.
“몰라서 물어? 너 임신해서 사표 냈다고 소문이 쫙 돌았어. 쪽팔리지도 않아? 결혼도 안 한 주제에.”
고지아가 내친김에 독설을 뱉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혼전 임신이 쪽팔린 일이야? 그것보다는 동기 남자친구랑 바람피우고 빼앗아 간 게 더 부끄러운 짓 아닌가?”
“뭐라고! 서유나! 너 말 다했어!”
“아니. 할 말은 많은데 입이 더러워질까 봐 참는 거야.”
“야!”
“왜!!!”
‘뭘 믿고 이렇게 설쳐!’
고지아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사표 내니까 뵈는 게 없는 거야? 너 우리 아빠가 누군지 몰라?”
“그러는 넌 내 남자친구가 누군지 알아?”
서유나가 피식 비웃음 비슷한 웃음을 내비치며 반문했다.
“누, 누군데!”
“너와 네 잘난 남자친구, 그리고 고 전무님 정도는 한 방에 날릴 수 있는 남자야.”
“뭔 헛소리야!”
“기다려봐. 결과가 말해 줄 테니까.”
서유나는 더 이상 말을 아끼지 않고 내질렀다.
남자친구 장립이 말했다.
어떤 순간에도 참지 말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라고.
설사 그 대상이 엘자그룹 회장이라 해도 상관하지 말라고 말이다.
“흥! 그래 기다려볼게. 네 잘난 남자친구가 얼마나 대단한지!”
고지아는 서유나가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린다 생각했다.
“나도 기다려져. 내 남자친구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본 적 없는 모습으로 활짝 웃는 서유나.
그녀 역시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의 남자친구가 진짜 얼마나 대단한 남자인지.
***
지금 웃음이 나와?
정신 나간 귀신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임성철 회장이 그러면 안 되는 일이었다.
죽어야 할 인간이 멀쩡히 살아서 활동했다.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엄청난 리스크였다.
임성철 회장이 짓게 되는 모든 업의 공동책임을 져야만 했다.
고로 쌍둥이들에 대한 업의 파장도 내 몫이 된다.
황승재 교수 아들에 이어 또 두 아이를 더 책임지게 생겼다.
고아원 원장도 아니고 이게 뭐란 말인가.
- 오늘 기분도 좋은데 파티하시죠! 제가 한턱 쏘겠습니다!
쏴? 귀신인 네가?
흥에 취한 장립이 정신줄을 아예 놓았다.
계획이 틀어졌다.
임성철 회장과 러시아로 통으로 보내려 했는데 이제는 그도 틀렸다.
“이거 보게. 아주 귀엽지 않나?”
“벌써 다녀오신 거예요?”
“응.”
- 오! 귀여워요! 진짜 쌍둥이 맞습니다. 하하하하.
내 분위기가 좀 풀어진 것을 눈치채고 임성철 회장이 조용히 품에서 초음파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이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태중의 아기 모습.
두 눈을 똑바로 떠도 잘 구별이 안 갔지만 생명체가 둘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 그놈들! 장군감이네. 무럭무럭 자라 장씨 집안 대를 잇거라!
장립은 초음파 사진을 보며 아빠 미소를 지었다.
임성철 회장도 그런 장립을 말리지 않았다.
결심을 한 듯했다.
“회장님 괜찮겠습니까?”
“뭐가 말인가?”
“이 아이들은 임씨 자손이 아닙니다.”
“괜찮네. 어차피 한국 사람들 대부분 알고 보면 다 친척 아닌가. 성씨, 그게 뭐가 중한가. 내 핏줄이면 됐지.”
세계를 호령한다는 기업가의 똥배짱 정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아.”
짧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는 말리지도 못하게 됐다.
애를 지우라고 말할 권리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삼신할머니가 직접 개입한 일이었다.
그건 뭔가 뜻이 있다는 의미다.
“어디서 사실 생각입니까?”
“어디에 살면 되나?”
- 홍콩 갑시다! 그곳이 교육하기 좋습니다!
넌 저승이나 먼저 가!
귀신의 말은 일단 패스다.
- 프랑스 어떻습니까? 유럽 문화 선진국에서 한 녀석은 화가로 다른 한 녀석은 경영자로 키우는 겁니다!
“아시겠지만 제가 지금 중국과 전쟁 중입니다. 중화권은 일단 제외입니다.”
“알고 있네.”
“당분간 한국에 거주해야겠지만 거주지는 미국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리장창이 이제는 의심을 완벽하게 거두었을 것이다.
장태산이 장립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으니 지금부터는 또 다른 수를 두려 할 것이다.
임성철 회장의 지금 신분은 화교다.
내 계획을 위해서라도 미국이 좋을 것 같다.
로버트를 비롯해 조력자들이 많다.
경호원들도 파견하기가 쉬웠다.
중국도 미국 내에서는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장 회장 뜻을 따르겠네.”
- 미국도 좋죠! 명문 사립 코스를 밟는 것도 찬성입니다. 으흐흐흐.
“여자친구 분은 뭐라고 하십니까?”
“내 뜻대로 하라더군.”
“좋은 사람이군요.”
“맞아. 좋은 여자야.”
임성철 회장의 입가에 포근한 미소가 만들어졌다.
비 오는 날의 사건 하나가 이렇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래서 작은 인연도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것이다.
- 이름은 어떻게 지을까요? 이거 설레서 오늘부터 잠이나 올지 모르겠습니다.
“장 회장이 지어주게.”
삼자 통신 와이파이가 가동되는 중이다.
임성철 회장이 나에게 태어날 아기들의 이름을 부탁했다.
-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형님이 이것저것 배운 게 참 많으신 분이시죠. 그리고 애들에게 섭하게 할 분도 아니고ⵈⵈ.
아부하며 포석을 까는 장립 귀신.
“경호원을 여자친구 분에게도 붙여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사시는 집은ⵈⵈ 일단 제가 거주하는 곳으로 하시죠.”
“알겠네.”
“계속 회사에 보낼 생각은 아니시죠?”
“오늘 사표를 낸다더군.”
“잘하셨습니다.”
운명의 파편이 어디로 튈지 몰랐다.
임성철 회장의 아이는 이제 내가 개입해야 할 대상이 됐다.
- 그럼요! 귀한 자손인데 태교에 힘써야죠.
“다른 부탁은 없습니까?”
어차피 돈이야 넘쳤다.
안전만 확보되면 다른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장 회장ⵈⵈ.”
임성철 회장이 은근히 목소리를 깔았다.
“말씀하십시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경제인이었다.
임성철 회장은 어느 정도 내 반응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넓게 확장했을 그 무엇.
“태어날 아이들의 대부가 되어주게!”
올 게 왔다.
저 말이 나올 거라는 걸 예상했다.
나를 대부로 두는 순간 아이들의 인생은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 꿀꺽.
장립도 침을 삼켰다.
귀신도 내 대답을 기다렸다.
“물론입니다. 아이들의 대부, 기꺼이 되겠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세상을 위해서라도 아이들을 건강하고 밝게 키워낼 것이다.
그게 대부인 나의 책무이자 가야 할 길이었다.
“고맙네! 장 회장!!!”
- 형님! 고맙습니데이.
임성철 회장과 장립이 동시에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 삼신할머니가 당신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다섯별을 점지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응? 다섯별???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