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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2장. 사과의 방법(2). (961/1,284)

972장. 사과의 방법(2).

“휴우.”

텅 빈 집을 보며 손유리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한때 가족이 모두 모였을 때는 온기가 제법 흘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귀부인으로 여유를 누리며 살았던 엄마는 지금 오빠와 할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상주하며 보살피느라 바빴다.

아빠 손대균도 아침 일찍 나간 듯 인기척이 없었다.

집안일을 봐주는 아주머니만 남아 조심스럽게 반겨줬다.

아직 가을로 접어들지도 않은 날임에도 집안에는 냉기가 돌았다.

구석구석에 럭셔리한 가구들과 벽면 명화들이 빈집을 채우고 있었지만 모두 다 주인을 잃은 폐품처럼 보였다.

언뜻언뜻 부연 먼지가 눈에 띄는 자신의 방에서 손유리는 무심히 창밖을 바라봤다.

더없이 따뜻했던 장태산의 집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집안에 흐르는 공기의 차이를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불과 얼마 동안의 사이에 모든 게 엉망이 됐다.

부모님처럼 장태산을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장태산은 이유 없이 함부로 타인에게 해코지를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할아버지를 비롯해 가족의 욕심 때문에 불러온 사태였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했지만 그럼에도 손유리 역시 결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단단히 묶여 있는 관계.

이번 귀국 역시 아버지의 부름에 따랐다.

공항에서 벌어진 약혼자 오광재와의 문제도 가볍지 않았다.

아버지 성격에 그와의 혼사 일을 밀어붙일 게 뻔했다.

지금 같은 시대에서는 말도 안 되는 결혼 방식이었지만 충분히 불사할 분이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정략결혼.

“이 인생은 내 거야.”

손유리는 프랑스 생활을 하는 동안 확실히 깨우쳤다.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은 충분히 잘 알았다.

하지만 살아가는 인생은 분명히 각자의 것이었다.

친구는 물론 가족마저도 모두 다 내가 있기에 존재하는 대상들이었다.

그들과의 관계를 위해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희생하도록 강요당하는 건 범죄와 다를 바 없었다.

프랑스에서 일궈낸 모든 건 손유리 자신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였다.

부모님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자신만의 인생.

그 중심에 장태산이 든든한 버팀목으로 버티고 있었다.

어제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미래의 그 어떤 것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 불확실성 앞에서도 장태산 곁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졌다.

그와 함께 있으면 누구도 줄 수 없었던 평안함과 기쁨이 샘솟았다.

똑똑.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엄마?”

“아빠다.”

“ⵈⵈ들어오세요.”

끼릭.

문이 열리고 손대균이 들어섰다.

깔끔한 감청색 슈트와 셔츠 차림이었다.

‘낯설어.’

손유리는 아빠를 보며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프랑스에서 며칠 함께 보냈던 아빠와 느낌이 너무 달랐다.

몇 달 전 한국에 들어와 봤던 모습과도 비교됐다.

그런 아빠의 모습에 갈수록 이질감이 들었다.

과거에 알던 아빠의 이미지와도 사뭇 동떨어졌다.

“실망이다.”

한국으로 귀국한 후 가진 첫 만남이었다. 그러나 손유리를 향한 아버지 손대균의 인사는 냉담하기만 했다.

“ⵈⵈ.”

손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물러서는 순간 다시는 기회를 잡기 힘들 거란 사실을 잘 알았다.

“뭐가요?”

꼿꼿하고 당당하게 대꾸했다.

부녀 사이의 대화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건조한 말들이었다.

“네 행동에 이제 책임질 나이는 된 것 같은데ⵈⵈ. 아니었구나.”

“도대체 무슨 말씀이죠? 아빠. 전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가 아니에요.”

프랑스에서 나눴던 다정한 부녀의 대화는 이미 과거의 추억이 되어 버렸다.

파바밧.

두 부녀 사이에 날선 기운들이 오갔다.

“분명히 말했을 텐데. 오광재 군과 함께 집으로 오라고 말이다.”

“저도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선약이 있다고 말이에요.”

“선약이 장태산이냐?”

“비행기 안에서 태산 씨 동생을 알게 되었어요. 마침 태산 씨가 공항에 마중을 나와 있어 우연히 만나게 됐고요. 그래서 같이 식사하러 간 거예요.”

“프랑스에서 왔으면 응당 집으로 먼저 오는 게 예의가 아닐까?”

“어쩔 수 없었어요. 아빠도 알잖아요. 태산 씨와 제가 어떤 사이인지.”

손유리는 굴하지 않고 강하게 나갔다.

손대균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화가 날 때 나타나는 손대균의 표정이었다.

“아빠 앞에서 자랑은 아닌 것 같구나.”

“전 제 인생에 있어 무엇이든 책임질 수 있는 성인이에요. 아빠가 그렇게 키웠잖아요. 프랑스로 내칠 때 어느 정도 짐작하신 일 아니에요?”

손유리가 지난 일을 끄집어냈다.

그동안에 다 치유되기에는 여전히 상처가 깊었다.

아무도 원망하고 싶지 않았지만 손대균이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후벼 팠다.

“많이 컸구나.”

“아빠 덕분이에요.”

“손유리.”

“네. 아빠.”

“너 한 사람에게 손씨 집안의 미래가 달렸다.”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그 오광재라는 분이 누구기에 아빠가 그런 말을 하시는 건가요? 제가 알고 있는 리앤장의 이름값도 우습게 알 정돈가요?”

손유리도 대한민국에서의 리앤장이 갖는 이름값 정도는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법조계 권력 집단.

웬만한 인사들은 좋지 않은 일로 리앤장과 얽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 리앤장의 주인인 아빠가 계속해서 저자세를 강요했다.

“맞다.”

“네?”

“오광재의 아버지는 그런 분이다. 감히ⵈⵈ. 네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 우리 집안과 너 하나 숨통 끊는 건 일도 아니다.”

손대균이 냉정한 말투로 상황을 인정했다.

“아빠ⵈⵈ.”

손대균의 대답에 손유리가 크게 당황했다.

자존심 강한 아빠의 이런 모습은 정말 처음이었다.

“다시 약속 잡아 놓겠다. 이번에는 실망시키지 말거라.”

“ⵈⵈ.”

‘도대체 어떤 집안이기에ⵈⵈ.’

손유리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쉬어라.”

손대균은 할 말을 마치고 등을 돌렸다.

그러다 문손잡이를 잡고 잠시 멈췄다.

“태산이는 만나지 말거라. 그 녀석과 함께 있다가 너도 죽을 수도 있다.”

“!!!”

뭔가 알고 있는 듯 경고하는 손대균.

끼릭.

문을 닫으며 사라졌다.

“하아아.”

긴장으로 냉기가 흘렀던 방에 정적이 돌았다. 손유리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배경 지식으로는 현재 상황은 이해되지 않는 일투성이었다.

“태산 씨ⵈⵈ.”

짧은 순간 잠시 안겨 있던 듬직한 한 남자의 품만이 간절하게 생각날 뿐이었다.

***

- 어서 꿇어! 임마!

귀신도 덩달아 외쳤다.

“으으으.”

신태주가 신음을 흘렸다.

꿇으라는 말 속에 기를 담아 내질렀다.

평범한 일반인 신태주가 감당할 수준의 음파가 아니었다.

“네가 보낸 킬러 저격수 이름이 이고르라는 건 알지?”

“ⵈⵈ.”

신태주의 겁먹은 눈동자가 대답을 대신했다.

“지금 그놈이 어디 있을 거 같아?”

- 지옥!

귀신이 대신 답했다.

“어, 어디 있나?”

신태주가 떨며 물었다.

“신고했을까 봐?”

신태주를 빤히 바라봤다.

“뉴스에 나오지 않았다면 당연한 거 아니야?”

- 묻었다. 그것도 깊숙이! 흐흐흐.

귀신이 내 귀에만 들리는 소리로 악당처럼 웃으며 지껄였다.

“묻었다. 아무도 찾을 수 없게 깊숙이.”

“!!!”

“뉴스가 잠잠하잖아. 서울 한복판에서 킬러가 군사용 저격총으로 공격했다면 지금 온 나라가 난리났을 텐데.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너무 조용하지?”

꿀꺽.

신태주의 목울대가 마른침을 삼키느라 꿀렁거렸다.

“난 지금껏 날 공격한 놈을 가만히 두지 않았어. 그게 내가 정한 불변 규칙이지. 목숨을 노리면 목숨으로.”

- 분위기 쫙 깔렸습니다. 저 자식 눈동자에 공포가 가득 담겼습니다.

“난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아. 네가 밖으로 나가는 순간ⵈⵈ 네 가족들은 지옥을 맞이할 것이다. 소리 소문도 없이 말이야.”

“신고하겠어!”

신태주가 마지막 발악을 했다.

“누구한테? 뭘? 증거는?”

연이은 질문에 신태주는 입을 다시 다물었다.

“선택은 네 몫이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지만 주희를 위해서 한 번의 과정이 더 필요했다.

아직도 상처가 다 치유되지 않았다.

빠르게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있어 가해자의 사과가 꼭 우선되어야 했다.

황승재 교수의 아이를 차로 받은 가해자 아줌마에 대한 참교육도 동시에 진행했다.

잘못했으면 용서를 먼저 구함이 도리이건만 요즘은 그런 인간적인 예의가 실종됐는지 강제하지 않으면 능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권력과 돈 뒤에 숨어 양심을 속였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에게는 그대로 되갚아주는 맛이 쏠쏠했다.

나만의 권선징악 증명 방법.

털썩.

생각은 오래 하지 않았다.

신태주가 무릎을 꿇었다.

“제 가족을 살려 주십시오! 제가 죽을 죄를 졌습니다!”

- 캬아! 이 맛에 산다니까.

귀신이 사이다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야?”

“네! 정말 용서를 구합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목소리가 우렁찼다.

신태주의 거만하고 몰염치한 정신이 꺾인 게 보였다.

이제 대화할 자세가 된 셈이다.

“앉아요. 다 큰 어른이 아무 데서나 무릎을 꿇으면 쓰나요.”

표정을 바꿔 활짝 웃으며 앉을 자리를 권했다.

“???”

“교도관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적당한 선에서 눈치껏 하세요.”

“네? 네!”

방음이 되는 접견실이지만 교도관이 내부를 볼 수 있는 구조였다.

신태주가 무릎을 꿇자 걸음을 움직이는 교도관.

후다닥 신태주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1차 훈련이 끝났다.

“신연주 양 시집 가야죠.”

“네?”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며 살고 싶으면 연락하세요. 제 동생에게 정중한 태도로 진심을 다해 사과하라고 전하십시오.”

“바로ⵈⵈ 조치하겠습니다.”

“사과해 보니까 어때요? 참 쉽죠?”

“ⵈⵈ.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괜히 자존심을 내세우다 좋은 기회를 놓친다니까요. 사과 한마디면 될 것을. 쯧.”

혀를 찼다.

가볍게 인생을 사는 데 필요한 교훈도 한 토막 알려줬다.

“그리고 홍콩 계좌에 빼돌린 비자금 중에서 30억 뚝 떼 기부하시죠.”

“!!!”

“뭘 그렇게 놀랍니까. 한국에 처가 명의로 꿍쳐 놓은 차명 계좌와 현금은 빼드렸잖아요. 그건 검찰 쪽에서 털어먹었을 테니 전 손대지 않겠습니다.”

신태주가 날 귀신 보듯 바라봤다.

내가 언급한 건 신태주가 아주 은밀하게 꿍쳐 놓은 비자금이었다. 가족조차 알지 못하는.

다 털어먹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 뺏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신태주를 이용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불만 있습니까?”

“아닙니다ⵈⵈ.”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모르십니까?”

쉽게 정체를 단정 지을 수 없게 계속 악당같은 웃음을 계속 날려줬다.

이 자리에서 선한 인간 코스프레는 필요치 않았다.

악인에게는 오직 악이 선이었다.

“죄송합니다.”

신태주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ⵈⵈ 확실히 마무리 지어줄 일이 있습니다.”

“네?”

“억울하지 않습니까? 다들 쥐새끼처럼 빠져나갔는데 당신만 영어의 몸이 된 게 말입니다.”

신태주를 슬쩍 자극했다.

- 오! 독기가 살아납니다! 

신태주도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보통의 인간.

돈 놓고 돈 먹을 때 동업자라고 함께했던 놈들이 위급한 상황이 닥치자 모두 등을 돌렸다.

이럴 때 조금만 자극하면ⵈⵈ.

“재판정에서 한 놈만 물고 늘어지십시오.”

“네? 누구를ⵈⵈ.”

“대상은 바로ⵈⵈ.”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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