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9장. 저격.
“뭐라고? 손유리가 장태산과 사라졌다고?”
- 네……. 주인님!
“이런 미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사 같았던 얼굴이 악마처럼 일그러졌다.
보고를 받던 회주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됐다.
“광재는?”
- ……아직 공항에 있습니다.
으드드득.
말을 들은 회주가 이를 갈았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지금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말이라면 한 치의 의심 없이 철석같이 믿었다.
손유리가 자신의 아내가 될 거라는 약속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아들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배신의 현장.
손유리가 다른 남자와 인연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한국대 재학 중에 두 사람 사이에 감정 교류가 어느 정도 있었던 것도 확인확인한 정보였다.
그 사실을 알고 난 직후 손국중에게 한 차례 경고를 주었다.
곧바로 손대균이 손유리를 장태산에게서 떨어뜨려 유학을 보냈다.
당시만 해도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일이었다.
그 나이대의 여성들이라면 한 번쯤 경험하게 될 풋사랑일 거라 치부했다.
장태산 역시 그때는 지금처럼 요주의 인물은 아니었다.
특히 손유리는 다른 여대생들보다 더 순수했다.
회주가 보았을 때 손유리의 관상이 무척 좋았다.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기가 전혀 탁하지 않았다.
또 손국중이 손녀 손유리를 보증하기도 했다.
손대균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장태산에 대한 문제는 가만히 두고 지켜봤다.
간간이 올라오는 보고 내용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일이 오늘 터졌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직접 마중 나간 아들 앞에서 다른 남자를 따라나선 손유리.
“흐흐흐.”
회주 입에서 소름 끼치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윗입술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자 날카로운 송곳니가 살짝 드러나 보였다.
‘하찮은 연놈들이 감히 내 아들을?’
아들이 원한다면 기꺼이 칼을 빼들 것이다.
“집으로 데려와.”
- 알겠습니다.
통화는 짧게 끝냈다.
“손대균 네놈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됐어? 딸년 하나 제대로 간수 못 하는 놈이 무슨 큰일을 도모하겠다고?”
회주는 손대균을 떠올리며 비웃었다.
장태산 때문에 집안이 엉망이 되었음에도 딸을 간수하지 못해 큰일을 두고 일을 그르치고 있었다.
“차라리 잘된 일일 수도 있다. 손대균의 약점을 잡기도 했고……. 이제 광재도 세상의 민낯을 경험할 나이도 됐지.”
회주는 깊이 분노했지만 이성적으로 여러 계산을 맞춰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온실 속 화초처럼 키워왔지만 이제는 미래를 살아내기 위해 경험해야 할 삶의 또 다른 이면.
아들의 성장을 위해서라도 고통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짧고 굵은 아픔 속에서 아들은 크게 성장을 이뤄낼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아들의 핏속에는 회주와 같은 짙고 어두운 역사가 같이 흐르고 있었다.
“후후훗.”
꽃다발을 든 채 그대로 오광재는 공항 로비에서 한 시간이나 서 있었다.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호의까지 손유리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 무엇도 빼앗긴 적 없다는 말끝에 보인 손유리의 격멸 어린 시선.
비수가 되어 오광재의 심장에 깊이 박혔다.
사랑이 증오가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비뚤어진 집착은 해독할 수 없는 독으로 변질됐다.
오광재의 입술을 비집고 차가운 미소가 자꾸 흘러나왔다.
머리 깊숙이 장태산과 떠나는 손유리 뒷모습 각인됐다.
“난 경고했다……. 단 한 번도 먼저 뺏긴 적 없다고.”
지금까지 누구보다 착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세상에서 버려진 자들을 거두어들여 돌봤다.
그게 세상을 사는 이유이고 즐거움이자 의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한 아우성.
아버지가 운영하는 시설로 돌아온 날부터 스스로도 몰랐던 성격이 드러났다.
더러운 코를 흘리며 아무 때나 달라붙는 아이를 한 차례 걷어찼다.
당연히 평소와 다른 오광재의 행동에 아이는 놀라 자지러졌다.
보모들이 안 보는 사이 벌어진 사태.
자신도 놀란 나머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달랬지만 아이는 다시 곁을 주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치매기가 있는 노인들의 몸뚱이를 수시로 주먹질했다.
어차피 치매 노인들에 대한 관심은 거기서 거기였다.
그리고는 노인이 걷다 스스로 넘어졌다고 태연히 둘러댔다.
그런 일들이 몇 번 반복되자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 속에서 응어리져 있는 그 무엇이 해소되는 것처럼 시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조심스러웠다.
아버지를 비롯해 누구도 모르는 이중성을 낱낱이 드러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분명 달랐다.
무언가 해소되지 않은 것을 더 파괴해 버리고 싶은 욕망이 자꾸 꿈틀거렸다.
“저…… 안녕하세요.”
그때 한 여성이 다가왔다.
투피스 정장 차림의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녀였다.
붉은 립스틱이 오광재의 눈에 들어왔다.
“누구신지?”
오광재가 다가선 여인을 보며 물었다.
“저 기억 안 나세요? 퍼스트 클래스 석을 담당했었는데…….”
여자가 눈웃음을 지으며 살짝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때 저에게 라면을 끓여줬던 분 맞죠?”
그 모습을 보던 오광재가 여자를 기억해 냈다.
당시에도 유별날 정도로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던 여자였다.
승무원 유니폼을 벗고 평상복으로 바꿔 입고 나온 듯했다.
“호호호. 다행이에요. 절 기억해 주셔서.”
여자가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은은한 향기가 유혹의 손길처럼 오광재의 심장을 자극해왔다.
“너무 잘 챙겨주셔서 다시 만나면 밥 한번 대접하고 싶었는데 이곳에서 만나는군요.”
오광재는 서슴지 않고 거짓말을 내뱉었다.
“어머 정말요?”
“네.”
“그럼 지금 사주실 수 있어요?”
“지금 말입니까?”
“오늘은 지상 근무라 일이 끝났어요. 친한 애들은 다들 남자친구랑 사라졌는데……. 저만 혼자 남았네요.”
말과 함께 살짝 눈웃음을 짓는 미모의 여인.
스튜어디스는 오광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멀쑥한 차림의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미국에서 퍼스트 클래스를 이용해 한국에 들어올 정도면 보나마나 있는 집 자식이라는 뜻이었다.
평소에도 스튜어디스와 퍼스트 클래스 젊은 남자 손님들 간에는 간간이 썸이 이루어졌다.
서로가 서로를 원했다.
돈 많은 젊은 남자는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명품과 같았다.
“그럼 잘됐군요. 같이 가시죠. 저도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습니다.
오광재가 잘생긴 외모를 더 부각하듯 활짝 웃었다.
“그런데 그 꽃은…….”
승무원이 보기에도 꽤 가격이 나가 보이는 꽃다발.
여자친구를 위한 선물이 분명했다.
툭.
오광재는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가볍게 꽃다발을 던져 버렸다.
“친구 녀석이 절 바람 맞혔네요.”
“그래요?”
승무원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이번 기회로 남자의 환심을 제대로 사는 일.
“가시죠.”
오광재가 빙그레 웃었다.
“네~.”
승무원도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오광재의 두 눈에서 꿈틀거리는 기이한 욕망과 잔혹함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밥 먹을 때 나 돼지 같지 않았어요?”
“잘 먹으니까 보기 좋던데요.”
“살 쪘다는 소리로 들려요.”
“선배는 그대로예요. 떠날 때 그날처럼.”
“…….”
장태산의 따듯한 목소리에 손유리는 심장이 먹먹해졌다.
‘꿈만 같아.’
비 오는 날 마지막으로 찾아왔던 장태산의 집.
손유리는 지금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다시 이곳에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차갑게 몸을 파고들던 비와 그날 밤의 뜨거웠던 장태산과의 추억.
짧지 않은 시간을 건너서 다시 맺어졌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은 많은 말이 오가지는 않았다.
이동하는 내내 장주아가 자신이 여행 중에 겪었던 이야기를 오빠에게 풀어놓느라 바빴다.
한결같이 웃는 얼굴로 맞장구를 치던 장태산의 오빠다운 모습.
한공간에서 두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훈훈해졌다.
장태산의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왔다.
장주아가 동행을 원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남매 사이에 끼는 일이 결례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운명처럼 얻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공항에서 오광재를 따라갔다면 또 다른 인생이 펼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손유리는 사라지고 혼자 프랑스에서 지내며 다시 태어난 듯 강해진 손유리가 돌아왔다.
홀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다.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는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하며 빠르게 성장하는 법이다.
손유리는 책임이 무엇인지 아는 어른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태산 씨도 똑같아요. 좀 더 어른스러워진 걸 빼면.”
“그때도 어른스럽지 않았나요?”
“신입생 같지 않았죠.”
“칭찬이죠?”
“그럼요. 그러니까 제가 한눈에 반했죠.”
손유리가 장태산을 대하는 태도는 대담했다.
유학 전처럼 마음에 이런저런 감정을 담지 않았다.
“선배. 멋있어졌습니다.”
“어떤 면이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인생이란 자기를 찾아가는 대담한 여정이라고. 그 점에서 선배는 똑바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도 칭찬이죠?”
“물론입니다.”
손유리가 편안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장태산의 집에서 오랜만에 집밥다운 밥을 맛봤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고슬고슬한 갓 지은 쌀밥에 묵은 김장김치로 끓여낸 두부 김치찌개.
파가 적당히 들어간 두툼한 달걀말이와 참기름 바른 김, 고추장 멸치볶음을 비롯해 각종 밑반찬은 손유리의 식욕을 자극했다.
솔직히 엄마가 만들어 준 음식보다 더 맛있었다.
미친 듯이 밥을 비웠다.
장주아와 경쟁하듯 식탁 위에 놓인 반찬들을 집느라 젓가락을 정신없이 움직였다.
누룽지까지 후식으로 먹고 난 뒤에 정신을 차려보니 장태산이 그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순간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래도 행복한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사랑했고 그리워하던 남자가 차려준 밥상은 꿀맛이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커피까지 마신 후 산책을 나왔다.
장태산이 살고 있는 빌라 안으로 나 있는 산책로를 걸었다.
동네 주민들은 따로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빌라를 장태산의 가족이 모두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입구 경비는 무척 삼엄했지만 안쪽으로 들어오자 의외로 고요했다.
가까운 거리에 도도히 흐르는 한강이 보였다.
서울에서는 최고의 입지 조건을 가진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한국에 온 것 같아요.”
배도 부르고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남자까지 옆에 있었다.
더 바랄 게 없었다.
“걱정 안 됩니까?”
“뭐가요?”
“손 선배님 성격이 장난 아닌데.”
“괜찮아요. 아빠와 딸 사이는 생각보다 가깝답니다.”
“쫓겨나면 말하십시오.”
“네?”
“보시다시피 빈집 많습니다. 주아에게 그림도 가르쳐 주면 주거는 무료에 강습료도 지불하겠습니다.”
“그 거짓말 책임질 수 있어요?”
손유리가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나 솔직히 자신 없었다.
아빠가 화를 내면 프랑스로 다시 나가야 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 연락되는 친구도 몇 명 되지 않는다.
한국보다 이제는 프랑스 생활이 더 편해진 상태였다.
“물론입니다.”
장태산이 확고부동한 음성으로 답했다.
“…….”
물끄러미 장태산을 바라보는 손유리.
파팟.
마주선 두 사람 사이에 뜨거운 스파크가 튀었다.
짧았지만 영원히 기억에 남을 추억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기억의 저장고에서 시시때때로 재생되는 장면은 서로를 바라보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투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떠나던 날과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스으윽.
손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장태산의 품에 스르르 안겼다.
자석과 같은 끌림이었다.
그런 손유리를 두 팔로 부드럽게 안는 장태산.
그 순간.
퓨슉!
어둠을 뚫고 날카로운 밝은 섬광 하나가 빗살처럼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회귀의 전설 2부